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한국문단 특별기고 (171) 그때 그 골목길은 지금도 있을까 / 최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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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71) 한국문단 특별기고>
그때 그 골목길은 지금도 있을까
최원현 / 수필가 (한국수필가 협회 이사장)
여름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저만치 느티나무 당산나무가 먼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나무를 돌아 지나가면 탱자나무 울타리의 골목길 첫 집이 이모님 댁이었다. 관사라고 하지만 슬레이트 지붕에 창문만 유리문일 뿐 여느 집과 별로 다름없는 시골집이었다.
그곳에서 이모님은 아들 셋을 낳아 기르셨고 유복녀까지 낳으신 터였다.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는데도 집안이 휑하다. “이모!” 하고 내가 목소리를 높여 불러도 안에선 아무 응답이 없다. 방문을 열었다. 이모가 벽을 쳐다보고 망부석처럼 앉아 있다. “이모!” 하고 다시 불러도 매양 그대로다. 신을 벗고 방에 들어가도 이모는 벽의 한 곳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냥 그러고 있는 것인지 초점 잃은 눈이 움직일 줄 모른다.
“이모, 왜 그래?” 내가 이모를 붙들고 흔들자 그제야 나를 쳐다보는 눈이 조금 움직인다. “원현이냐? 왔냐?” 겨우 두 마디다. 그런 이모의 손을 내가 붙들자 이모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런데 윗목에서 가냘픈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돌리니 작은 이불을 덮고 아기가 누워있는데 얼굴이 벌겋다. 아이는 지쳤는지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있다. 유복녀였다. 아이를 가슴에 안아본다. 머리에 손을 대보니 열이 펄펄 끓는다. 섬뜩 이러면 안 되는데 싶어 아이를 안고 버스 정류장께에 있는 이모부 친구의 약국으로 달려갔다.
외할머니께 이모한테 가겠다고 했더니 갑자기 나를 붙드시곤 울음을 터트리셨다. “네 이숙 갔다!” “예? 어디로요?” “네 이숙 죽었단다.” 나는 일순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의식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붙드시곤 이모부가 지난 추석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과 아들만 셋인데 딸 하나를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유복녀를 낳았단다.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연락도 안 했었다는 것이다.
이모네 집으로 향하는 고샅은 여느 동네 동구 밖과 별로 다른 게 없었다. 다만 초입이어서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고 마을 앞 커다란 느티나무는 수백 년 수령은 됐음 직 크고 우람했기에 그 앞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나는 위축이 되곤 했다. 그러나 여름에는 시원하기가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었으며 겨울엔 눈이 무섭게 내려도 느티나무 주위로는 큰 멍석자리처럼 눈이 쌓이지 않을 만큼 가지가 촘촘하고 튼실했다.
나는 이모네 집을 좋아했다. 늘 혼자 만이었던 내게 세 동생은 한없이 귀여운 존재였고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신 내게 이모와 이모부는 내 채워지잖는 어린 가슴의 한쪽을 채워주곤 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쯤이면 이모부는 이모부대로 이모는 이모대로 내게 살짝 용돈을 주머니에 넣어주시곤 했는데 그때까지 내가 받은 용돈으론 가장 큰 액수이곤 했다.
그 겨울 나는 생후 몇 개월밖에 안 된 이종사촌 여동생을 내 품에 안고 동네 어른들을 따라 장례를 치렀다. 광주의 병원까지 갔으나 가는 도중 나를 한 번 쳐다보며 싱긋 웃고는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병원에 도착하니 숨이 멎은 지 20분이나 지나 아무것도 해볼 수가 없다 했다. 그 애를 내가 가슴에 안고 가서 두어 뼘 남짓 넓이의 구덩이에 넣고 흙을 채웠었다. 그리고 이모네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 고샅 그 골목을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 동생을 데리고 즐겁기만 하던 골목이었다. 이모부가 오시나 몇 번씩 드나들던 골목이었다. 어느 날은 이모가 “느그 이숙 온다!” 해서 “어디?” 하니 “지금 당산나무께 오고 있다.” 했다. 당산나무까진 한참이다. 그런데 거기 오고 있단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거린데 말이다. 그런데 조금 있자 진짜로 이모부가 오셨다. 난 참으로 궁금했다. 어떻게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텐데 이모부가 오는 걸 알았을까. “너도 장가가서 부부로 오래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 그게 이모의 답이었다.
내가 늘 오고 가며 노닐던 우리 집 고샅 골목길도 아닌데 왜 이모님네 골목길이 더 생각나는 걸까. 지금쯤 그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담양 가사문학관이 들어서서 이젠 그곳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움과 아쉬움 속에 그때 그곳이 마냥 그리워지는 것은 내 어린 날 가장 풍요로운 추억이 깃들어있던 곳이기도 하고 내 손으로 삶과 죽음이 나뉘는 걸 체험했던 곳이기도 해서일 것 같다.
그날 약국에 갔더니 빨리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에 바람처럼 이모네로 달리던 길, 이모와 함께 다시 그 길을 나와 발 동동 구르며 차를 기다리던 길, 방학 때면 찾아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매미를 잡고 뭐가 그리도 바빴는지 쉴 새 없이 오가던 그 길들이 이제 아련한 추억 속에 묻혀버렸지만 지금 가면 찾아볼 수도 없을 곳임에도 내 기억 속엔 선히 떠오르는 길들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골목길은 참으로 운치가 있다. 지붕과 지붕이 닿을 듯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이웃집에서 무슨 음식을 해 먹는지 냄새만으로도 금방 알 수 있었고, 아이들 야단맞는 소리에 부부 싸움의 소리까지도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런 정겨운 모습은 찾아볼 길 없고 쓰레기로 골머리를 앓는가 하면 주차 전쟁이 치열하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 관심조차 없는 현대의 골목길은 그저 생존경쟁만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마음, 풋풋한 정을 나누는 따스한 손길도 도시화란 이름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랜 지금엔 골목길이란 말만 들어도 그리움으로 가슴이 찡해 온다.
그러나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옛날, 그 추억과 낭만과 삶이 범벅이 된 골목길의 추억을 다시 살려내어 그 냄새를 맡고 싶다. 50년도 더 지나버렸는데 이모님네의 그때 그 골목길은 얼마나 변해 있을까.
*최원현 / 수필가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1951년 전남 나주 출생. 『한국수필』수필(1987),『조선문학』문학평론(2008)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월간『한국수필』발행인 겸 편집인. 국제 펜 한국본부 이사. 강남문인협회장·한국수필작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펜문학상 수상 외,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그냥》《어떤 숲의 전설》《누름돌》《문학에게 길을 묻다》등 수필집 17권, 《창작과 비평의 수필 쓰기》등 문학평론집 2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및 고등학교《문학 상》《국어》, 중국 동북3성《중학생 작문》등과 여러 교재에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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