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73) 시청 앞 지하철, 그리고 파인애플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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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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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73>
시청 앞 지하철, 그리고 파인애플
이재민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All the leaves ara brown~~~으로 시작되는 캘리포니아 드림의 첫 소절이 흘러나오면, 나는 조건반사처럼 영화 ‘중경삼림’의 몇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내 나이 스물다섯, 첫사랑과 이별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여름에 한국에 다니러 갔다가 시청 근처에 볼일이 있어 2호선 지하철을 탔다. 줄곧 서서 갔는데 동대문역에서 드디어 내 앞에 자리가 났다. 앉으려는 찰나 급히 열차 안으로 들어온 중년 여성의 민첩함에 그만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여인은 후다닥 잰걸음으로 들어와 손에 쥔 양산으로 콕 자리를 찜하고 앉았다. 자리에 그렇게 영역 표시를 하고 앉는 모습이 보기에 그리 좋지 않았다.
애초부터 자리에 큰 미련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권리를 빼앗긴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여인은 조금 무안했는지 시선을 좌우로 돌리다가 뒤적뒤적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여인이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려는 순간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매가 어딘지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섬광처럼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람 한 점 슥 스쳐갈 때, 빗방울 하나 툭! 떨어질 때, 햇살 한 줌 바삭 부서질 때, 나뭇잎 하나 사락 흔들릴 때 문득문득 떠올랐던 이름, 첫사랑! 그 고약한 실루엣이 내 눈앞에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78억 명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헤어졌던 옛사랑이 내 자리를 빼앗고 앉아 있는, 기막힌 우연, 순간 내 동공이 확장되고,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에 지진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두근두근한 심장을 억누르며 여인이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잠시 마스크를 내리거나,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랐다. 그러면 좀 더 그녀가 진짜 그녀인지를 확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끝내 그러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을 닮아서 그러니 잠시만 마스크를 내려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내려달라고 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 멀뚱멀뚱 그녀의 눈만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여인은 미간을 잠시 찌푸리는 불편한 내색을 하였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내 눈을 보고 나를 기억해줄까 싶었지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찰나 이번 역은 시청, 시청역입니다~ 하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열차에서 내려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깐 착각일지 몰라도 여인도 잠시 내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문이 닫힙니다. 문이 닫힙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다시 그녀가 기억의 터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도 버스 안, 내 앞에 자리가 났었다. 그때도 나는 앉을까 망설이다가 버스에 오르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냥 자리를 비워두었다. 버스에 오른 그녀가 내 앞에 앉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앳된 그녀가 내게 처음 던진 말은 자리에 앉아도 되냐는 말이었다. 이후 한 번 두 번 그렇게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설렜고, 벚꽃으로 세상이 부풀어 오른 어느 봄날 드디어 그녀를 뒤따라가 고백을 해버렸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은 뜨겁고, 무모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때는 서로의 마음이 너무 어려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을 자주 반복했다. 그녀는 결국 내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버렸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이별의 상처는 너무 커서 그 어떤 실로도 봉합할 수 없었다.
이별 후 나는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모든 일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자꾸 눈물을 흘렸으니까.
왕가위 중경삼림을 극장에서 혼자 본 것도 그 무렵이다. 우울한 분위기의 영상과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사람은 변한다. 어제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는 대사에 푹 빠져버렸다.
남자 주인공 경찰 223은 그의 생일인 5월 1일에 맞추어 한 달 동안 매일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델몬트 파인애플을 사 모은다. 그리고 끝내 그녀가 5월 1일이 되어도 돌아오질 않자 파인애플을 모두 먹어치운다. 공교롭게도 내 생일도 5월 1일이라 배우의 연기에 감정 이입하기에 딱 좋았다. 극장에서 나온 후 나 역시 한 달 간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았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과 공통점이 있다면 첫사랑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고, 차이점이 있다면 통조림들을 세 개째 먹고 나는 더 이상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영화는 서른 통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몽땅 먹어치우는 설정이 가능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메스껍고 역한 단맛은 고약한 내 실연의 아픔과 어울려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멋지지도 않을 뿐더러 슬픔을 과장한다고 해도 슬픔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청역을 빠져 나와 잠시 땅거미가 내려앉은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 타박타박 걸었다. 일부러 돌담에 손을 대고 걸었다. 딱딱하고 꺼칠한 세월의 느낌이 참 좋았다. 한 때는 내가 첫사랑과 이 길을 함께 걷고, 어느 순간 서로 반대 편 길로 걸어갔듯이 참으로 많은 첫사랑의 사연들이 이 길에 남겨져 있겠다 싶어 가슴이 아련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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