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74)몬도가네의 시대를 걸어가며 / 문인기
페이지 정보
수필산책
본문
<수필산책 174>
몬도가네의 시대를 걸어가며
문인기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모처럼의 귀국이지만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고 들어와 치료받으며 보낸 3개월, 이제는 목발 없이도 산을 오를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산을 노루처럼 달려 오르고 뛰어내려오던 강건한 다리를 은근히 자랑하였건만 한번 다치고 나서는 확연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얻은 소중한 것은 작은 변화에도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친 사람들의 육체적 장애와 그 답답한 맘을 진솔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사고를 당했던 그 순간에는 다시 전처럼 걷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나를 눌렀었지만 이후 비록 더디지만 다가와 감싸 주는 회복은 그 모든 어두운 생각들을 몰아내고 우려로 쫄아 든 가슴에 감사한 생각이 들도록 해준 것이다. 다리를 다쳐서 고국에 들어왔기에 여덟 살 막내 손자와 무척 가까워졌다.
할애비가 다쳐서 수술부위 사진을 보고서도 울었다는 손자는 자신을 짚고 걸으라고 나에게 어깨를 내주어 여린 어깨를 의지하여 걸음마를 하면서 산책하는 것이 이제는 아침저녁의 행복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손자와 함께 산책길을 걸을 때마다 많은 대화를 나눈다. 무뚝뚝하여 좀처럼 애정 표현을 못한다고 놀림을 받는 경상도 출신이지만 어린 손자 앞에서는 말수가 많아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내에게도 지금까지 극히 희소하게 내 뱉은 ‘사랑해!’라는 한마디를 손자에게는 산책 때마다 뜬금없이 표현하곤 한다.
이 말을 들은 아이로부터 듣는 “저도 할아버지를 사랑해요!’라는 대답을 반듯한 행복의 퍼즐 한 조각으로 삼아 가슴에다 하나하나 맞추어 가며 더 크고 실감나는 행복을 구체화 시켜 가는 기쁨이 있다. 손자의 시대는 지금처럼 삭막하고 아픔이 많은 시대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걷는다. 어쩌면 이 아이의 시대가 지금보다 더 삭막해진다 할지라도 의연히 이겨 내며 험한 세상에 사랑을 비추는 존재가 되도록 강인하게 이 시대를 헤치며 자라주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내 맘에 늘 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요즘 산책 때마다 나는 손자에게 이상한 의식을 주입시키고 있음을 의식하고는 흠칫 놀랐다. 우리가 원치 않았고 예상치 못한 사태, 팬데믹의 바이러스는 변신을 거듭하며 우리를 포위하고 점점 조여 들어오고 있어 더 물러설 수 없는 곳, 집에서만 칩거하다 보니 답답증을 해소할 양으로 전보다 더 자주 동네 산책길을 나선다.
아내와 손자를 데리고 걷는 길에서 우리끼리 흔히 나누는 대화가 어린 손자에게 이상하게 들리는지 한번은 ‘우리 가족은 몬도가네 가족이야요’라고 말했다. 언젠가 제 부모로부터 몬도가네가 무슨 뜻인지를 들었나보다. 나에게서도 잊힌 단어 ‘몬도가네’를 오랜만에 듣고는 함께 웃었다. 그 의미를 다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기이한 행동, 혐오성 식품을 먹는다든지 하는, 한마디로 ‘개 같은 삶/ 세상’를 일컫는다 한다.
이 말이 유행한 동기가 된 영화 ‘몬도가네’는 1960년대에 한국에서 상영되었는데 영화는 문명 속에 도사린 인간의 야만성을 폭로하였다. 이 몬도가네라는 용어가 갑자기 손자의 입을 통해 다시 살아날 만치 오늘날의 시대 상황이 몬도가네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 한 예로 산길을 걸으며 좁은 길에서 다가와 스치는 사람들과 인사 없이 지나치는 것은 이미 요즘의 에티켓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인사를 먼저 건넸다가 무안을 당한적도 여러 번 있다. 인사하는 나를 상대방이 눈을 왕방울같이 크게 만들어 보면서 침묵으로 지나치는 통에 가슴이 먹먹한 차가움을 실감하였다.
세계는 벌써 2년 가까이 입과 코를 막고 살아간다. 예방 주사를 못 맞아 아우성, 맞지 않겠다고 아우성, 계속 죽어가는 희생자로 인해 급조 공동묘지의 면적이 끝없이 넓어져 가는 슬픈 현실, 중계방송 하듯 매일 발표하는 전 세계의 확산 실황은 우리의 관심사를 고착시키고 그에 비례하여 정서는 점점 메말라 가는 느낌이다.
산책을 하면서도 멀찌감치 다가오는 사람들을 로봇인간이 전자 눈을 통해 순간적으로 검색하여 분석하듯 대응해야 하는 시대이다. 마스크를 안 했거나 턱에다 걸치기만 한 사람, 코를 내 놓은 사람, 노 마스크로 전화 통화를 하며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로 전환한다. ‘거리 유지!’ 라고 손자에게 외친다. 그러면 손자는 재미있다는 듯 ‘오바, 오바, 거리유지!’라고 복창을 하며 걷는다. 상대가 들으면 기분 나쁠까 하여 요즘은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즉 인도네시아어로 ‘자우(jauh)!’라고 외친다. 의례히 손자는 ‘자우! 자우!’를 연속 외쳐 뒤따르는 할머니에게 전달한다. 상대는 아마 어린 손자를 데리고 걸으며 아이에게 까불지 말고 걸으라는 외침 정도로 여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산책길에서는 질문이 많은 나이의 손자가 자주 묻는 질문들이 있다. ‘왜 저 사람들은 마스크를 저렇게 턱에다 걸치고 다니나요? 왜 저 사람은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나요? 왜 많은 사람이 방역 규정을 안 지키나요?’ 직설적으로 대답하기가 참 조심스럽다. 마음 같아서는 ‘저들은 겁이 없어 그렇단다, 자기만 아는 무례한 사람들이라 그렇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아이에게는 좀 더 순화시켜 말해준다. ‘남을 배려하고 서로 조심하여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려는 생각이 부족하여 그렇단다.’
서로 간에 인사가 사라진 산책 길, 사람을 안 만나기를 바라고 만나게 되는 것이 싫고 무서운 산길, 서로 몰라도 밝게 인사말을 건네며 스치던 이웃과의 관계가 사라진 현실, 다른 사람의 행동에다 판단을 내려 즉결 처단하는 냉랭한 속내, TV 정치대담 패널 중에 나의 생각과 다른 발언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특정 패널이 왠지 얄밉고 불편하여 채널을 돌려버리는 심사, 밴드나 단톡방에서도 진보 보수로 나뉘어 친구 간에도 첨예하게 갈라져 서슬 퍼래진 관계, 세상 살기 힘들어 퍼부을 대상을 정하면 누구라 할지라도 설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존칭을 버리고 쌍욕을 내지르며 저주하는 응어리 진 가슴, 그렇지 않아도 이기주의로 삭막해졌는데 전염병은 더욱 나와 내 가족만 안전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생각 속에다 가둔다.
여생에 나는 어린 손자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인생의 산책길에서 어떤 대화로 아이를 가르칠 것인가? 삶으로 아이에게 보여줄 어른들의 본이 되는 삶을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어떻게 나부터 회복시켜 갈 것인가? 이 고난의 시대는 단지 한숨과 탄식과 원망으로 얼굴 찡그리고 지나야 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련의 경험을 통하여 더욱 너그러워져서 고난에 빠진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위로하여 일으킬 수 있는 품성으로 다듬어지는 황금 같은 기회임을 아이에게 심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날을 며칠 안 남기고 있는 지금이지만 단 며칠만이라도 손잡고 손자와 걸으며 좀 더 꿈을 심어 소망으로 싹 틔울 수 있는 대화를 나누리라.
- 이전글(175) 새끼고양이 집 떠나던 날 / 하연수 21.09.10
- 다음글(173) 시청 앞 지하철, 그리고 파인애플 /이재민 21.08.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