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렉터 박사의 저녁 식사 /하승창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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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79) 렉터 박사의 저녁 식사 /하승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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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1,850회 작성일 2021-10-08 14:42

본문

<수필산책 179>
 
렉터 박사의 저녁 식사
 
하승창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붉은 토마토소스 위에 올려진 하얗고 거대한 통 새우들, 식탁에 놓인 '새우 파스타'를 보고 있는 내 머릿속에 숱한 의혹들이 교차한다. '좀 작은 새우를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새우를 길게 한 번 잘라 줬어야 했을텐데?' 포크로 면을 두어 번 돌려 감고, 뾰족한 끝으로 새우를 푹 찌른 다음 한입에 넣고 씹으며 또 생각한다. '이 새우, 혹시 밑간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양념이 잘 배어들도록 미세한 칼질을 해 놓았을지도?' 헛된 바람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거대한 새우와 소스는 입 안에서 따로 놀았고 면은 반은 익고 반은 설익은 것이, 삶다보니 양이 부족해서 한 줌을 더 집어넣고 끓인 것임에 틀림없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최강록의 표현을 빌자면, 이 음식의 이름은 '삶은 통 새우요리, 근데 이제 토마토소스와 스파게티 면을 곁들인' 정도가 될 것 같다.
 
"어때?"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내의 눈동자. 저격 총 조준기의 레이저가 내 미간에 빨간 점을 찍는다. 현실의 총구 앞에서는 진실한 답변만이 위기탈출의 확률을 높이지만, 이 가상의 총구 앞에서 진실은 종종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를 주억거리며 대답한다.
 
"오~ 진짜 맛있는데?" 아내의 눈에 미심쩍은 기색이 비친다. 이 따위 대답으로는 노련한 수사관의 추궁을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아내가 페이스북 레시피를 보며 한참을 뚝딱거린 끝에 만들어 낸 부대찌개, 마치 군대 훈련소에서 먹은 정체모를 국을 떠오르게 했던 그 맛을 회상하며 말한다.
 
"당신이 이때껏 했던 요리 중에 제일 맛있는 것 같아." 이건 진실이다.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도 자신 있다. 비로소 활짝, 수사관의 얼굴이 펴진다. 나는 항상 아내의 음식 솜씨를 칭찬한다. 요리에 MSG를 쓰지 않는 아내를 대신해 '마음의 MSG'를 슬쩍슬쩍 뿌려 주는 것이다.
 
직장 일에 바쁜 아내이기에 주말만이라도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그 정성이 감사하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타박을 했다가 아내가 갑자기 국자를 꺾고 다시는 요리를 하지 않겠다는 '절쿡 (絶 Cook)' 선언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이 요리사는 간혹 자기가 만든 음식이 스스로도 맛이 없다 싶으면, 고개를 갸웃하면서 아무래도 MSG를 넣지 않아 그런 것 같단다. '그게 문제가 아닐텐데?' 하지만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나는 '불평과 비난'이라는 잔인한 맹수, 상대방을 무는 것으로 모자라 내 살점마저 뜯어먹고 마는 영화 속 '한니발 렉터'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몸에는 구속 복을 입혀 단단히 묶은 다음, 그 반질대는 이마에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는 구절을 새긴 인장을 찍어 지하 감옥에 봉인해 놓았던 것이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MSG를 사용해야 하는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자면, 전신 거울에 이리저리 몸을 비추어 보던 아내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경우. "나 살 찐 것 같지?" 이 질문에는 복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없고, 서술형의 답변도 허용되지 않으며, 오직 'NO' 라는 대답만이 자동응답기를 재생하듯 튀어나와야 한다. 이어지는 아내의 넋두리. "아무래도 운동을 좀 해야겠어." 그럴 리가 있나, 조깅을 하겠다며 재작년에 산 운동화는 아마 오늘 내다팔아도 새것 값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날 이후 아내는 한 달 가까이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아침마다 머리채를 질끈 묶고, 잠옷 치맛자락은 허리에 동여매고, 파워 에어로빅 영상을 보며 '씁-씁-후-후', 덤벨 대신 양손에 쥔 1.5 리터 물통을 붕붕 휘둘러 대는 것이다.
 
"왜 몸무게가 그대로지? 저녁을 굶어야 하나?" 숫제 욕실에 들여놓은 체중계 위에서 날마다 푸념을 하는 아내. '아니, 과자! 당신이 매일 밤마다 안마 의자에 앉아,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면서 먹어대는 그 과자!'
 
종일 이어진 릴레이 미팅으로 피곤했던 얼마 전의 일이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아이들의 미끄럼틀이 되어 넙치가 되도록 밟히고 나니 완전히 진이 빠졌다. 축 늘어진 몸을 침대에 누이고 잠시 핸드폰을 만지고 있자니, 이내 눈은 끔뻑끔뻑, 의식은 가물가물, 스르르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드는 순간. '빠스락 빠스락' 과자 봉지 소리, '와작와작' 과자 씹는 소리, '위잉~덜덜덜' 안마 의자 소음이 어우러진 3중주가 침실의 적막을 깨뜨린다. 평소엔 자장가처럼 느껴지던 소리가 이날은 어찌 그리도 짜증스럽던지...
 
꿈결일까?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이성의 유리컵과 거칠게 공명하던 불협화음이 급기야 혼미의 지평 너머에서 양떼의 비명처럼 들려오기 시작한다. '스탈링'의 무의식 깊은 곳에 트라우마를 남긴 그 비명! 밤마다 그녀를 악몽에 시달리게 만든 저 오라질 비명에 저주를! 그 순간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선 독설을 내뱉고 만 것이다. "운동을 하면 뭘 해? 밤마다 그런 걸 먹으니까 살이 안 빠지지."
 
 
 
공기가 싸늘하다. 제풀에 번쩍 잠이 깬 나는 때늦은 후회를 하지만 행차 뒤의 나팔 격. '차라리 꿈이었기를!' 과자 씹는 소리도 봉지 빠스락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양들은 비명을 멈추었나?"
 
어느새 재갈과 구속 복을 벗어 던지고 내 앞에 나타난 듯 렉터 박사의 입가에 검은 미소가 낭자하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생살을 물어뜯긴 아내는 그저 핸드폰만 보며 침묵하고 있을 뿐.
 
"언젠가 나는, 내 식사에 MSG를 넣은 무례한 요리사의 간을 누에콩과 와인에 곁들여 먹어 버렸지." 사람의 고통을 탐하는 냉혈의 미식가가 천천히 나이프를 꺼내 든다. "이렇게 되어 유감이네만, 모든 게임에는 끝이 있는 법, 오늘은 자네의 심장을 먹어 주지." 달아나려 애써 보지만, 후회와 자책감에 결박당한 내 몸은 요지부동, 이제 나의 심장은 잘게 다져진 타르타르가 되어, 검붉은 아마로네 와인과 함께 그의 저녁 식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탕!' 아내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총성, <오징어 게임>의 탈락자가 또 한 명 나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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