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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84)빈 페인트 통에 대한 감상 /문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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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003회 작성일 2021-11-12 10:26

본문

<수필산책 184>
 
빈 페인트 통에 대한 감상
 
문인기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세월은 참 빨리도 흘러간다. 코로나와 몸부림치며 씨름한지도 2년, 세월이 흐르는 속도는 언제나 같으련만 전 세계가 갑자기 부닥뜨린 펜데믹과 씨름하는 동안 뉴스마다 코로나 전쟁의 진퇴에 대한 보도라 그것에 신경 쓰며 보낸 세월인지라 더욱 빨리 지나가버린 것 같다.
 
나는 매월 한번 지인들에게 카톡이나 메일로 조금 긴 편지를 월 초에 띄운다. 이렇게 나의 소식을 보낸지도 벌써 20년째다. 어떤 분은 받은 편지를 유심히 읽고 나의 편지 글 속에 언급된 주요 내용을 다시 언급하며 그것이 여망대로 이루어지도록 손 모으겠다는 약속과 함께 성의 있는 답장을 보내준다.
 
또 어떤 이는 편지를 다 읽지 않았는지 ‘언제 귀국했느냐?’며 안부를 묻는다. 편지 속에는 지난번 몸을 다쳐서 갑자기 귀국하여 치료받고 다시 인도네시아로 들어와 전처럼 이곳 사람들과 다시 어우러져 잘 지낸다는 소식을 썼건만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 통에 내 편지가 안 읽히는 것은 다반사구나 생각하게 된다.
 
하기야 나처럼 길게 편지를 쓰는 사람의 글을 바쁘고 혼란한 세상에서 누가 한 줄 한 줄 빠짐없이 읽고 앉았을까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나 또한 남의 글을 대할 때 나의 관심사와 다른 글이라 여겨지면 대개는 건성으로 읽고 넘긴다. SNS에서 대하는 글 중 긴 글은 읽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글을 올린 이가 친히 쓴 글이 아니고 남의 글을 퍼 나르는 글은 대개 읽지 않고 넘기는 편이다.
 
SNS에서도 유독 자신이 쓴 글을 게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글은 글 쓴 분의 성의와 필자의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과 깊은 내면을 이해하고 배우며 공유하고 싶어 대개는 끝까지 읽게 된다. 11월 1일, 평소처럼 편지를 띄웠다. 여러 지인이 편지를 읽고 답장을 보내왔다.
 
편지를 쓰면서 벌써 달력이 한 장만 남은 것을 보고는 남은 날 동안 2021년을 잘 마무리하시고 지난 2년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새해를 소망하며 계획을 세워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기원한다는 축원의 말을 써넣어 보냈다. 그리고 지난달을 지나며 행했던 나의 이야기, 나의 근황은 꼭 포함시켜 보냈다.
 
나의 근황 중에 지난 달 두 주간 12년 전 건축한 산골교회당에서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것도 썼다. 세월이 지나니 건물이 나이를 말한다. 남루한 예배당 곳곳에 비새는 곳을 수리하고, 벗겨져 속살을 드러낸 지붕과 안팎 벽체를 사포 질 하여 페인트칠을 다시 하는 대대적 보수 공사를 했다는 소식이다.
 
 
2주 동안 칠 공사를 하는데 페인트가 큰 통으로 여섯 통과 작은 통으로 대여섯이나 들었다. 수성페인트는 물을 섞어 칠하는 도료이기에 물을 타서 희석하면 그 정도까지는 소모가 안 될 것 같았지만 인부들은 날마다 부족하다며 추가 주문을 하는 바람에 애초 예산보다 배나 더 들었다. 작업량을 계산하여 인부들이 세운 예산이건만 예산보다 실제가 엄청난 차이를 보일 경우에는 의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모든 빈 페인트 통은 쓸데가 있으니 버리지 말고 남겨 달라고 인부들에게 주문했던 것이다. 다 소모된 빈통으로 실제 소모된 것을 확인하기 위한 나의 최소한의 의도가 담긴 주문이었던 것이다. 공사가 끝나고 뒹굴며 소리 나는 빈 통을 죄다 차에 싣고 산동네에서 내려왔다. 우수수 크고 작은 용량의 페인트 빈통 들이 사무실 창고에 모여 있는 것을 보는 마음에 문득 떠오른 생각은, 비록 칠갑 된 빈 통이지만 누군가는 이를 필요로 할 수도 있을 터 우선 캠프의 스텝들 중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창고 쌓아 두는 것보다는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재활용에 대해서는 어릴 적부터의 몸에 박혀 습관이 되었다. 가난한 시절 벽촌 태생에게는 모든 물자가 귀하게 여겨져 어떤 물건이든 그냥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무슨 물건이든 창고에서 오래 썩히는 것보다는 당장의 쓰임새 에 사용되도록 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이다. 다행이도 세 사람의 스텝이 물동이로 혹은 쓰레기 통으로 쓰겠다며 하나씩 집어 들었다. 갈라진 문밖 쓰레기통과 허드레 물을 모아 두었다 화단에 물 줄 때 쓰곤 하는 통이 오래전부터 갈라져 있기에 나도 큰 통 두개를 집어 들었다.
 
통들은 더할 수 없이 속과 겉이 칠로 범벅이 되어있어 씻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잘 씻어 남에게 주어도 선뜻 받아들기 어려울 터인데 때 국물 자국 범벅으로 모여 있는 통들인 데도 순식간에 새 주인들의 품에 한두 개씩 안겼다. 누구의 품에 안긴 것이 호강을 하게 될지 모르나 운명적으로 하나씩 택함을 받은 것이다.
 
퇴근 무렵 모두 하나씩 들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모두들 어느새 깨끗하게 씻어 상표도 선명한 새 페인트 통으로 만들어 하나씩 들고 나서는 것이다. 개운하게 닦았기에 음식을 담아도 될 만큼 말끔한 통으로 변신시켜 흐뭇한 표정으로 들고 가는 스텝들을 보면서 묘한 감상에 젖었다. 나이 들어 궁상을 떤다는 말이나 안 들을까 했는데 고맙게도 밝은 얼굴로 하나씩 들고 가는 것이 고맙다. 눈치 보여 하나씩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집어 들었지만 가다가 혹시나 “우리를 뭘로 보냐?”며 길가에다가 집어 던지고 가지나 않을까 했지만 오히려 깨끗하게 닦아 들고 사무실을 나서는 그들로 인해 감사하였다.
 
나도 집에 와 통 두개를 그들처럼 사포질로 페인트 자국을 벗겨내고 깨끗한 새것으로 만들어 놓고서 흐뭇하게 쳐다보는데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타이틀부터 막 상영이 시작된 ‘담보’ 라는 제목의 한국영화에 빨려 들어 끝까지 보면서 마음이 촉촉하던 차에 유난히도 자식들에게 내핍과 절약을 강조하며 교훈을 주셨던 선친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빈 페인트 통을 들고 가는 밝은 표정의 스텝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더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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