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15) 우리 삶의 벽에 대하여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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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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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14 >
우리 삶의 벽에 대하여
서미숙 / 수필가,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장)
내가 살고 있는 자카르타 시내의 아파트에서 외부로 나갈 때나 돌아올 때 눈길을 사로잡고 시야를 잡아당기는 지점이 있다. 그곳은 바로 우리 아파트 앞 훤하게 탁 트인 넓은 공터이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현지인들의 작은 동네였는데 지금은 그곳이 철거되면서 넓은 공터에 나무가 무성히 자라서 숲을 이루고 하늘과 마주하고 있다. 아파트 한 동을 더 지으려고 오래전부터 우리아파트 그룹에서 사들인 땅인 듯싶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경제가 더욱 악화되어 새로운 건축물이 지어질지는 미지수다. 언젠가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콘크리트 벽이 내 시야를 가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넓은 여백으로 펼쳐진 숲길 같은 공간이 너무 좋다.
베란다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다가 그곳과 시선이 맞닿으면 나를 끌어당기는 무언의 안락함을 느낀다. 그 여백의 공간에서 나만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오래전에 살던 아파트는 바로 앞 동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어서 남으로 향한 곳은 낮에는 햇볕이 뜨거웠고 밤이면 건너 동의 불빛 때문에 커튼으로 벽을 만들어야 했다. 베란다와 현관문을 마주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위안을 삼곤 했지만 멀리 있는 풍경과 먼 산보기를 좋아하는 나에겐 앞 동에 가로막혀 버린 벽 때문에 마음을 답답하게 했었다.
그러다 몇 해 전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온 후론 탁 트인 시야로 인해 동화 속 풍경을 연출하듯 나만의 여백 놀이에 빠져있다. 멀리는 시내가 한눈에 바라보이고 가까이는 흙 냄새나는 넓은 공터와 울창한 숲이 초록의 여백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그 여백의 공터에 아름다운 공원을 옮겨놓거나 산등성이나 해변을 옮겨 놓기도 한다. 때로는 거침없이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데려오기도 한다. 일상의 사소한 풍경이지만 바라보이는 시야의 여백으로 영혼이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은 도시는 물론이고 전원주택 단지에도 시야를 가리는 아파트가 무리를 지어 벽을 쌓아 올리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시각적 공간을 차단하고 있다.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여백마저 단절되는 것 같은 아쉬움이 앞선다. 역사의 물레방아가 돌아가듯 사람이 살아가는 문화도 바뀌고 있지만, 아파트라는 주거문화가 콘크리트의 차가운 벽들이 우리 마음의 벽까지 쌓아버릴까 걱정이 되는 건 단지 나만의 기우일까? 하얀 울타리에 빨간 장미넝쿨을 올리고 햇볕 가득한 마당귀퉁이에 예쁜 꽃밭을 가꾸던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흙을 밟고 지내던 그 시절의 자유롭던 기억들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이제 나이가 들어감일까? 오늘도 아파트 앞에 펼쳐진 너른 공터를 바라보며 자유로운 상념 속으로 빠져든다.
느린 동작이지만 분주하게 오가는 현지인들의 삶의 곡선을 따라 이번에는 해안가에 옹기종기 어우러진 해안마을을 상상해 본다. 지난해 한국에서 동해안을 따라 여행하던 수평선 멀리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향해 눈동자가 달려가기 시작한다. 산등성이가 어깨처럼 부드럽게 굽이지는 능선과 제각각 푸르른 산세가 운치 있는 해안이 절경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아파트의 직선에 의하여 아름답던 절경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항구 들목에서 바라보는 동네야 그렇다 치고 해안선 너머로 탁 트인 항구의 앞바다를 가려서 키가 산을 넘어가던 풍경이다. 삭막하기 그지없던 콘크리트 벽으로 차단된 아파트 더미들, 그 차단된 벽을 바라보며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아름답던 해안선의 바다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자연만의 절경을 흰 벽들로 인해 놓쳐버린 것 같은 허무한 심정이었다.
벽이라는 말은 어원학적으로‘무르스(Murus)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울타리를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보호와 안전을 뜻한다. 벽은 양면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이자 삶의 근원이기도하며 한편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애물, 고립의 상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한 벽으로 인해 생기는 경계는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과 밖, 여기와 저기라는 관계를 유형화하면서 하나의 차별을 만들고 극단적인 두 개의 공간이나 개체를 만들어 낸다. 벽은 단절을 넘어서는 소통의 벽, 공감각적 시공간을 제공하는 벽,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담는 벽, 위압적이지 않고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있는 벽 등이다.
살다보면 세상은 보이지 않는 벽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어떤 벽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우리의 상상과 발전을 저해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서 일차적인 벽은 사고의 벽이 아닌가 싶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지방 사람들 중에 성인이 될 때까지 도시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기회가 없어서 못 가본 사람들이다. 계속 고향을 지키며 사는 것이 익숙하고 편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두 번째의 벽은 경험의 벽이다.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도시에 계속 살거나 자신이 태어난 주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주의 특성상 평생 동안 생선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아마도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계속 경험을 피하는 관성이 있는가 보다. 젊은 시절에는 호기심이라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익숙한 환경과 입맛에 길들여지고 또 언제나 만났던 사람들만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에는 인터넷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간접경험을 체험할 수 있지만 아직도 개인이 경험해보지 못한 벽은 존재하는 것 같다. 세 번째는 금전에 대한 벽일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먹고 사는 것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많은 사람들이 금전적인 핑계를 대지만 사실 우리의 벽은 금전적인 것 보다는 생각의 벽이 더 많다. 돈이 생기면 한다는 것은 대부분 핑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불신의 벽이다. 우리의 삶에서 서로에 대한 불신 때문에 힘들어질 때도 많다. 우리 사회의 신뢰도가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선진국에 비해서 아직도 불신의 벽이 있고 이런 장벽이 사회발전에 많은 문제를 동반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불신의 벽으로 인해 멀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다섯 번째는 지식의 벽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지식을 쌓지 못하면 아무리 보려고 노력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 안 보이는 것들도 보이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에 관심도 많아진다. 나무들의 잎과 열매 등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숲에서 자연과 공기와 대지가 협연하는 거대한 콘서트를 보는 느낌이다. 이 세상은 많은 보호벽과 장벽이 존재한다. 이런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삶의 균형 감각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런 균형 감각을 갖기 위해서는 정서를 훈련하는 독서와 명상이 필요하고 육체적으로는 운동과 산책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매번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으니 난감하다. 산을 파헤치고 바다를 막아 높이 쌓아올린 건물들의 벽도 벽이지만 우리 마음이 닫혀버린 마음의 벽을 균형 있게 허물어줄 소통의 매체인 문학이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바라다 보이는 벽에 대한 시각적 공간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 가슴에 부각되어있는 해도(海圖)가 언젠가 쌓아올릴지 모르는 아파트 벽으로 인해 묻혀 버릴까봐 안타깝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쉼터가 되는 마음속의 여백을 찾아 정서를 연마하고 감성을 충전하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만남을 제한하고 있는 요즘이 딱 그런 시기인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여백을 찾는 소중하고 귀한 시간으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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