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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48) 아침 산책길 도화지 / 전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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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9,361회 작성일 2021-03-05 10:53

본문

<수필산책 148 >
 
아침 산책길 도화지
 
전현진 / 한국 문협 인니지부 회원
 
아침 산책은 상쾌하다. 아침에 눈 뜨기가 어려워 그렇지, 운동화만 신으면 현관문 밖을 나서기는 일사천리이다. 햇살이 눈부시게 화창한 날에도, 선선하게 구름이 낀 때에도 부슬비 내리는 아침에도 일단 나선다. TV 광고에 나오는 조깅복은 없지만 마음만은 뉴요커처럼 산책을 시작한다.
 
걷기의 장점은 역시나 건강에 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정신이 맑아진다.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까닭은 눈에 담기는 풍경 때문이다. 나의 산책길은 100여 호 가구의 주택단지이다. 새파란 바탕에 양떼구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은 온 길을 밝게 비추어 검은 티끌이 숨을 곳 없는 풍경을 그려낸다. 그런 하늘아래를 걷노라면, 초록의 싱그러움은 절로 따라온다. 노랑나비, 흰나비 정답게 노닐고, 적도의 화려한 꽃은 지구 저편, 쌈바의 여인처럼 흥겹다. 머리 위에 가득한 하얀 꽃은 결혼식장의 아치를 연상시키고, 알록달록 흐드러진 작은 꽃들은 풍성하게 모아 만든 부케가 된다. 나의 산책 속 등장인물은 대부분 100여 호 안의 사람들이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그들의 일과는 떠오르는 아침 해와 함께 본격화된다. 기사가 있는 집은 어느 한 집 빠지지 않고 모두 세차를 하는데 그 모습이 같으면서 다르다. 두세 집 건너 한 칸씩은 물을 뿌리고, 거품 칠을 하고, 좌석에 올라서서 지붕 위까지 사방으로 말끔하게 닦아낸다.
 
현관을 나서 만나는 첫 번째 집은 먼저 호수로 물을 뿌려 주차장 바닥까지 흥건하게 물청소를 한다.
두 번째 집은 빗자루로 차 주변부터 쓴다. 세 번째, 네 번째는 바퀴 휠에 비누칠하고, 보닛을 열고 내부를 청소한다. 같은 시간 같은 일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고 있다, 쇼핑몰 매장처럼 클래식을 크게 틀어놓는 집이 있었다. 어느 날은 현관문까지 열고 볼륨을 최대로 높였는데, 열린 문 안에서 한 아가씨가 피아노 연주를 직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남의 집 문 앞에 앉아 음악 감상을 할 용기는 없었지만, 오랜만의 귀 호강을 놓칠 수 없었다. 대여섯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서 괜히 운동화를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음악에 귀를 맡겼다. 눈부신 햇살을 등에 지고 듣는 피아노 연주는 나를 낙원으로 데려갔다.
 
운동화를 만지다가 더 할 게 없어 아쉽게 발걸음을 뗐는데 다음번엔 연석에 걸터앉아서라도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립박수를 전달하지 못한 값을 마음속에 외상으로 올려두었다. 몇 집 더 건너가면 단발머리의 어린 유모가 집 앞에서 바쁜데, 먼저 인사하기엔 조금 쑥스러운 눈치라 나는 일부러 더 반갑게 "Pagi(빠기, 좋은 아침)!" 를 외치곤 한다. 그러면 그녀는 수줍음을 담은 큰 함박웃음을 띠며 "Pagi!"를 메아리 쳐준다. 메아리 위에는 얇은 휴지로 만든 목련 같은 꽃나무가 한가득 피어있는데, 밤새 비가 내린 날은 연말 시상식의 종이 가루처럼 바닥 가득 꽃송이 천지이다. 그럼 나는 시상식의 가수답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집 앞을 지나간다.
 
노래를 듣지 않는 까닭은 간단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 아침 길은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다. 좋아하는 노랫말이 풍경에 녹아들면 노래주인공이 된다. 그 점은 환상적인 장점이지만 아침이 지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는다. 내 걷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빼액 울어대는 새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오가는 오토바이나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귀에 꽉 닫친 음악 소리 때문에 하마터면 어여쁜 아가씨의 라이브연주도 못 듣고 지나쳤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어폰은 집에 두고 나온다. 대신, 음악을 밖으로 틀어 손에 쥐고 걷거나 스스로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아침 풍경이 정말로 하나가 되어 내 음악에는 세차하는 소리가 담기고, 아침 인사의 메아리가 울리며, 공사하는 인부의 목소리가 드럼처럼 끼어든다. 나만의 특별한 세상이다.
 
첫 모퉁이 집 아저씨는 매일 웃통을 벗고 문 앞에 앉아있는데, 요즘 들어 살이 좀 더 찐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난 그대로 산책길에 나서는 나의 모양새도 영 아름다운 자태는 아니어서 나는 다소 예의를 차려 못 본 척 지나간다. 그는 늘상 어깨에 핸드폰을 끼고 전화하면서 손으로 배를 두드린다. 러닝셔츠라도 입고 나오는 날이 우리가 인사할 수 있는 날이 될 것 같다. 위아래 색도 안 맞는 추리닝을 입고 나온 외국 아줌마가 거슬리는 것인지, 신경 쓰이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자동차와 싸우듯 세차하는 아저씨들도 있다. “아이고, 그러다가 차에 구멍 나겠어요.”라고 얘기해줘야 할 듯 한 몇몇의 진지한 표정은 좀 무섭기까지 하다. 열중하는 열기에 못이기는 척 나도 그냥 지나쳐갔다. 하루, 이틀, 열흘, 보름, 한 달이 지나는데 인사도 없이 가기가 머쓱하여 나는 갑자기 용기를 내었다.
 
“Halo(할로, 안녕하세요).” 말이 마스크 안에서 맴돌다가 점점 커지더니 “Pagi!”가 되어 손도 흔들었다. 아니, 열중하고 있던 것 아니었소? “Pagi”의 gi~가 끝나기 무섭게 재빠르게 인사를 돌려준다. 근엄한 표정은 어디 가고 미소까지 얹어 답해준다. 진즉 아는 체를 할 걸 그간의 시간이 무색하다. 아직 ‘진지한 세차하기’에 끼어들기 어려운 몇몇이 더 있고, 일부러 등 돌려 차를 닦는가 싶은 사람도 있지만, 러닝셔츠만 입어도 인사 예정인데, 옷을 다 갖추어 입은 이와는 눈만 마주치면 바로 인사다. 여자들은 집 앞과 현관을 청소하고 잔디에 물을 뿌리고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낮에는 안보이더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안다. 한 명이 쓸고 닦는 집도 있고, 여러 명이 함께 일하는 집도 있다. 한 집은 공사를 시작해서인지 늘 인부들이 십여 명쯤 있는데 그중 너덧 명은 여자들이다. 멀찍이 있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귀퉁이를 돌아올 즈음부터 인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안다. 나는 팔을 번쩍 들어 산책 중 제일 큰 목소리로 "Pagi"를 외친다. 그러면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거리며 작업하던 손을 크게 흔들어준다. 코로나가 아니면 옆에 다가가 뭐하냐고 물어볼 짬이 된 아줌마인데 다소 아쉽다. 아침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겐 나의 통행이 좀 미안스럽다. 마스크를 끼고는 있지만, 거리를 두어야 하니 나도 그들도 우선은 멈추어 선다. 배드민턴을 멋지게 치던 꼬마 숙녀는 뽀르르 뒤로 물러서 준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이번에는 "Pagi" 함께 "Terimakasih(뜨리마까시, 고맙습니다)"를 덧붙인다. 그러면 그들도 마스크 한걸음 뒤에서 배드민턴 채를 흔들며 인사해 준다.
 
 
아침 산책에는 규칙이 있는데, 주택 안의 동서남북 끝을 찍고 돌아서는 것이다. 혼자 걷는 것이니 싫증이 나버리면 슬쩍 그만두거나 대충 요령을 피울 것 같아 느리게 걸을지언정 벽 끝까지 가서 발 도장을 찍기로 했다.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집 끝엔 아무것도 없는데 모르는 집 앞에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는 게 좀 그랬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발걸음으로 사방의 땅따먹기를 수행하고 돌아서면 ‘잘했어’를 세 번 정도 말해준다. 끝 지점에는 다행히 오해를 덜어주는 CCTV가 있어 아침 산책하는 나를 지켜본다. 해가 뜨거워 그랬는지 그늘 바닥에 꽃송이들이 후드득 드러누웠다. 꽃송이를 주어다가 빙글빙글 돌리기도 하고, 꽃 없는 덤불에 꽃꽂이해주는 재미도 즐겁다. 머리에 꽂으면 또 얼마나 예쁘려나 하다가 아침부터 동네에 머리 꽃 꽂은 여자가 돌아다닌다는 제보를 피하고자 손에만 주어 든다. 꽃 몇 송이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첫 번째 집 기사 아저씨가 차에서 좀 떨어져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 좀 마주쳐야 인사를 하는데 매번 등 돌려 차에 물을 뿌리거나, 차 너머로 가서 세차를 하니 나도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오늘은 담배를 다시 꺼내려는 찰나에 내가 인사로 치고 들어갔는데, 이 양반도 웃으며 인사를 한다. 아이고 진작 이럴 걸 그랬네요.
 
물론 인사한다고 모두가 다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들어놓고도 눈만 끔뻑이는 사람도 있고, 멋쩍어 내 쪽에서 먼저 지나칠 때도 있다. 확실한 건 내 아침 풍경에 그들이 있고, 그들의 아침 풍경에 분홍 바지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끔은 파일럿 선글라스를 끼고 팔을 휘저어 걷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도화지 속에 들어있는데 인물들 대부분이 맨발로 물 세차를 하거나 청소를 하고 있다. 나만 꽉 막힌 운동화이다. 집 밖에서 맨발로 걸으면 어떤 느낌일까? 꽃을 머리에 꽂진 못했지만, 운동화는 벗어보기로 했다. 매니큐어가 삐뚤빼뚤 칠해진 발가락이 우스워 사진을 찍었다. 신발을 벗으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달팽이가 기어가고, 여치 같은 곤충이 있고, 물웅덩이도 패어있다. 마른 땅을 찾아 한 걸음씩 내딛는데 바닥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적당하고, 얼굴에 불던 바람이 발가락에도 지나간다. 내게는 흔치 않은 경험인데, 저들의 풍경 속에 나는 어떨까? 맨발 따위는 프레임에 잡히지도 않을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 헝클어진 머리를 하늘에 내보이니 머리 위에 꽃송이가 내려와 앉는다. 오늘 아침 산책길 도화지 속에는 머리에 꽃을 꽂은 동네 아줌마가 맨발로 인도네시아 하늘 아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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