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50)그릇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승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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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50 >
그릇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승창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최근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주민의 야드 세일 (Yard Sale), 즉 중고품들을 자기집 마당에 늘어놓고 판매하는 공개 장터에서 사기그릇 하나가 35달러에 팔렸다. 집주인이야 있으나마나 한 물건이라 푼돈이라도 받고 팔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했을지 모르나, 이를 구매한 사람은 평소 골동품을 보는 안목이 있었던 모양이다. 구입 직후 전문 업체에 감정을 요청했더니 이 그릇은 무려 15세기 초 명나라에서 만들어진, 그것도 황실에서 사용했던 진귀한 보물로 밝혀졌다. 자금성 수라간에서 ‘영락제’의 쌀밥을 담았을지도 모를 이 그릇은, 600년의 시간과 지구 반 바퀴의 공간을 뛰어넘어 미국의 한 주택 마당에 비로소 그 찬연한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장구한 세월을 담은 이 ‘역사의 증인’에게 나는 무한한 신비로움과 경외감을 느낀다.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나를 깊고 큰 즐거움의 바다로 이끈다. 실크로드를 누볐던 투르크 상인들의 낙타를 타고 유럽으로 갔던 것일까? 아니면 ‘정화의 대함대’에 승선해서 인도까지 갔다가 ‘동인도 회사’의 상선으로 갈아탔을까? 청교도들의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을 수도 있고, 중국 재래시장을 방문했던 배낭여행객의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넘었을 수도 있겠다. 이 그릇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글로 엮인다면, 아마 ‘이븐바투타’의 여행기와 맞먹는 작품이 될 지도 모른다.
이번 달 소더비 경매에 출품될 이 그릇의 예상 낙찰가는 50만 달러에 이를 것이라 한다.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낸 그 구매자의 안목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한편, 후회로 가슴을 칠 판매자의 사연에는 그저 한숨이 나온다. 그릇을 산 직후에 감정을 의뢰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필시 이 구매자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었을 테지만, 거짓말을 한 것도 사기를 친 것도 아닌지라 얄미워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 알던 사이일 수도 있고,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세상이 마침내 그 가치를 알아주었으니 이 보물은 행복할 터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그릇의 가치는 물건을 담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제 영영 가치를 잃어버릴 이 그릇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으리라.
얻어들은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한 골동품 수집가가 시골 장터에 갔다가 요기를 하러 식당에 들렀다. 문간에서 밥을 먹는 개를 보다가 우연히 그 밥그릇에 눈이 닿았는데 이게 웬걸,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 물건이 아니다. ‘무지렁이 주인 영감이 진귀한 골동품을 개밥그릇으로 쓰고 있구나!’ 눈이 번쩍 뜨인 이 수집가는 꾀를 내었다. 수선을 떨었다가는 영감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를 것이 뻔한지라, 밥그릇 대신 개를 먼저 사기로 한 것이다. 흥정 끝에 상당한 돈으로 셈을 치른 그 수집가는 개를 끌고 문간을 나서다 마치 깜빡했다는 듯 주인에게 말을 던졌다. “이 개밥그릇 가져가도 되죠?.” 아마 발끝으로 그릇을 툭툭 차면서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감의 대답이 가관이다. “그건 안 되지. 고놈 덕분에 개를 백 마리도 넘게 팔았는데.”
‘꼼수’라는 단어가 있다. 대개 쩨쩨하고 얄팍한 수단을 의미하지만, 그 기원은 ‘상대를 꾀는 속임수’라는 바둑 용어에서 유래했다. 꼼수의 특징 하나, 상대가 대응법을 모르면 내가 쉽게 이긴다. 둘, 상대가 대응법을 알면 내가 역으로 당한다. ‘갓 사러 갔다가 망건 산다’고, 바가지 쓰고 산 개를 끌고 나가는 이 ‘하수’를 보며 주인 영감은 속으로 웃었으리라. 애초에 꼼수를 아니 썼으면 당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아마도 이 ‘고수’가 베풀어 놓은 치밀한 계책은 장터 맞은편, ‘개 삽니다’ 라는 간판을 내건 점포에까지 그물을 쳐 두었을 지도 모른다. 고수는 상대가 차리는 먹음직스러운 밥상을 절대로 걷어차지 않는다. 다만 상이 다 차려지길 어수룩하게 기다렸다가, 슬쩍 그 위의 밥그릇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을 뿐. 생각건대, 그릇의 가치는 그 쓰임새에 달려 있을 터이다. 배고픈 사람은 밥을 담는 데 쓸 것이고 식당 주인은 생계를 담는 데 쓸 것이며, 예술가는 그 혼을 담는 것에, 수집가는 행복을 담는 것에 그 가치를 둘 것이다. 같은 그릇이라도 이렇게 많은 쓰임새를 가지고 있을진대, 하물며 각양각색의 수많은 그릇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투박한 질그릇도 따뜻한 밥을 담아 소반에 올리면 생명의 그릇이 되고, 진귀한 도자기도 식은 밥찌꺼기를 담아 마당에 놓으면 개밥그릇이 된다.
엄마 배속의 ‘불가마’에서 자그마치 열 달의 시간을 보내고 세상에 나온 ‘인간’ 또한 장인의 피땀과 염원, 고통과 희열 끝에 빚어진 그릇과도 같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인간이라는 그릇은 스스로 그 가치를 오롯이 결정할 수 있다. 어쩌면 한 편의 글을 쓰는 것, 나아가 한 생(生)을 사는 것 또한 한 그릇의 음식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돼지국밥을 좋아한다.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없지만, 내 어릴 적만 해도 부산 부평시장 국밥골목에는 길가에 커다란 국솥에서 펄펄 뜨거운 김을 뿜어 올리는 가게들이 ‘한 집 건너 한 집’이었다. 국밥 한 그릇 만드는 것에도 적지 아니 손이 간다. 부탄가스 토치로 돼지머리 잔털을 바싹 태운 다음 삶고, 쪼개고, 뼈를 발라낸 나머지를 망에 넣고 틀에 눌러 머리고기를 만든다. 큰 솥에는 뼈와 채소를 넣고 한참을 끓여 국물을 우려내고, 살코기와 순대와 각종 내장은 뜨거운 물에 따로 삶아낸다. 쌀밥을 바닥에 깐 두툼한 뚝배기에 고기와 내장을, 혹은 순대와 머리고기를 썰어 담은 다음 국물을 붓고, 마지막으로 정구지 한 줌을 올린 후 새우젓과 다대기, 깍두기를 곁들여 내면 비로소 뜨끈한 돼지국밥 한 상이 차려지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다른 그릇에 담아내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간혹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오지 않거나,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더 그렇다. 상큼한 샐러드도 좋고, 시원한 냉면도 좋다. 냉장고 문을 열면 오만 가지 식재료들이 나를 불러대지만, 차려놓고 보면 오늘도 뚝배기에 담긴 눅진한 돼지국밥이다. 만날 돼지국밥만 먹는다고 푸념하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씁쓸한 웃음을 짓는 나에게 뚝배기가 말한다. “국밥이나 제대로 만들어라. 어설프게 이것저것 하다간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꼴이 될테니. 그럴 시간에 레시피 연구나 하는 게 좋을걸.” 맞는 말이다.
부산의 한 유명한 돼지국밥 식당은 깍두기를 재활용하는 꼼수가 들통나 곤욕을 치르고 있단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요리도 저마다 레시피가 다르겠지만 꼼수 쓰지 않는 정직한 식재료와 레시피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그리고 고수들에게 배운 노하우가 진하게 우러난 국밥 같은 ‘인생’ 요리를 완성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삶의 국솥에 불을 당기고 고기를 썰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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