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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51) 작은 여유 / 송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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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1,633회 작성일 2021-03-26 09:32

본문

< 수필산책 151>
 
작은 여유
 
송민후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봄과 여름사이 남쪽의 아침바람은 지나온 계절을 닮았다. 달리는 차창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운 실크 스카프가 뺨을 스치고 가듯 부드럽다. 비개인 하늘에 구름이 무겁게 매 달려있다. 늘 아쉬움이 남는 고향 방문이 이번에는 유난스레 아쉽다. 하루 더 쉬었다가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삶의 터전으로 가고 있다. 우리가족은 가는 길에 좋은 곳 있으면 쉬어가기로 하고 도로 표지판을 읽어가며 갔다. 1시간쯤 달리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녹차 밭으로 방향을 잡았다. 계획 없는 나들이라 걱정 반 기대 반인 상태로 입구를 찾았다. 차밭 가는 길을 표시해둔 화살표를 따라가니 낮은 오르막길이다. 곧게 뻗은 삼나무가 하늘을 가려 그늘진 길을 걸었다. 어쩜 그렇게 곧게 하늘만 쳐다보고 자랐는지 그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삼나무 가로수는 마치 호위병 같다. 불편한 신발 탓에 피로감이 몰려올 즈음 삼나무 길이 끝났다. 차밭이 펼쳐지리란 기대와 달리 상점과 노천카페들이 즐비해있고 높고 긴 나무계단이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니 드디어 녹차 밭, 아니 작은 산 같다. 차밭을 올려다보니 파란하늘에 떠있는 하얀 구름이 어서 오라고 웃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나무 사이를 걷다보니 어제 내린 봄비 덕분에 먼지가 없어 좋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울퉁불퉁한 땅에서 걸을 때마다 먼지가 올라왔을 길이다. 상쾌한 날씨 탓인지 힘든지도 모르고 오래 걸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듯 은은한 향이 느껴지는 곳에 나무의자가 놓여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듯 차나무는 여간해서 가지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쉼터 옆 나무들은 제법 나이를 먹은 듯 튼실한 가지를 뽐내고 있었다. 그 사이를 바람이 헤엄치듯 달아나며 향나무라는 이름표를 보여준다. 이름표가 없었다면 그게 무슨 나무인지 몰랐을 것이다. 보통의 향나무는 비를 맞고 난 뒤에 향이 진하다고 하니 그래서 간이의자 주변에 은은한 향이 풍겼나보다. 어제 내린 비와 서늘한 바람에게 고맙다. 적당히 굳어진 차밭 오솔길, 잘 씻어져 더 짙은 향을 맘껏 뽐내는 향나무까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차밭 풍경에 나도 모르게 와! 하는 탄성이 나와 순간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선 자리에서 한 바퀴 풍경 따라 돌다보니 주변이 온통 푸르다. 높고 낮은 산들에 둘러싸인 호수 같은 녹차 밭! 삼삼오오 방문객은 호수에 떨어진 꽃 잎 같다. 호수 주위를 심심치 않게 솟은 나무들은 키 큰 울타리 같다.
 
아래쪽 대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성나 치켜든 고양이 꼬리처럼 일정한 리듬을 갖고 움직인다. 싸르락 싸르락 댓잎이 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마치 다양한 인격체와 외모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어느 마을처럼... 등산을 마친 듯 뿌듯함과 시원함을 만끽한다. 한참을 눈동자가 녹색으로 물든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려다보았다. 차 밭 중앙에서 두 팔을 벌린 채 사진을 찍는 사람을 보니 마음이 동해 걸어 들어가 보기로 했다.
녹차 밭에 묻혀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니 행복감이 솟구친다. 하지만 차 밭 사이 길은 내게 쉬이 통로를 허락지 않았다. 크지 않은 내 발도 두발 다 내딛기에는 좁았다. 게다가 마른 잔가지들이 살갗을 공격해댔다. 엎드려 길을 가보려다 생각보다 여린 가지들에 짠한 마음이 들어 되돌아 나왔다. 차나무들은 뿌리와 뿌리가 서로 엉켜있고 가지와 가지들도 서로 안고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흙에서 오는 양분을 고루 나누어 만든 새싹은 다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서로의 온기를 채워가면서 나무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긴 나무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 온 뒤의 하늘이라 하늘색과 구름색이 선명하다. 문득 단풍잎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동안 단풍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열심히 자라나고 있는 가지 끝에 때 묻지 않은 아이 손 같은 단풍잎 새순이 참 예쁘다. 차 밭을 올려보고 내려 보고 하느라 고마운 그늘을 만들어준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앞만 보고가면 볼 수 없는 멈춰서 돌아봐야하는 그 순간, 일상을 살면서 가끔은 오늘처럼 가는 길을 멈춰도 봐야한다. 또한 주변의 사소한 것에도 다 고마워해야겠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좋은 생각들로 행복감이 가득하다. 살랑이던 바람이 햇빛에 기운을 더 해주어서일까? 짙은 녹음이 살짝 가시고 이곳을 향해 올라오는 사람 수도 늘어났다. 이젠 내려가야 하고 서울로 도심 속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준비 없이 집으로 가다가 하루 더 쉬었다 갈 걸 하는 미련이 이끌었던 곳, 하지만 늘 한번 가봐야지 했던 곳이 녹차 밭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에 차밭을 걸어보고 싶었고 차밭 한가운데서 산 아래를 향해 두 팔 벌려 소리쳐 보고 싶었다. 살다보니 마음먹은 대로 다 되지도 않았고 때론 뜻하지 않은 좋은 일도 생겼다.
 
아쉬움에 이런저런 상념을 끄집어 내어보는데 익숙한 노래가 들린다. 남편이 양희은의 ‘한계령’을 켠 핸드폰을 귀에 대어준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게 하는 곡이다. 한계령, 저 산은 내게 오지마라, 오지 마라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푸름이 우거진 차 밭에서 음악은 힐링, 그 자체다. 맑고 힘 있는 목소리도 좋고 노래 가사처럼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 싶다. “순리대로 살아라.” 힘들거나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하면 부모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다. 나이 들고 부모님이 다 떠나시고 나니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내려가는 길에 오를 때 무심히 지나온 좁은 계곡물에 다다랐다. 맑은 물이 좁은 길 따라 흐르고 그 옆 아름드리 나무근처에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산을 가든 크게 작게 쌓은
게 소심한 소규모의 돌탑은 처음인 듯했다.
 
 
그냥 돌아갈 수 없어 나의 소심함도 더하기로 했다. 그런데 도무지 쌓을만한 돌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돌탑이 작은 이유를 알았다. 탑을 쌓을 수 있는 바닥은 넓어서 얼마든지 높게 수십 개는 쌓을 수 있어 보였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 계곡물에 손을 넣어 돌을 꺼냈다. 아직은 물이 많이 찼다. 되는대로 몇 개 꺼내 놓으니 너무 제 각각이라 몇 걸음 옮겨 다른 나무아래서 가져왔다. 하나하나 모양을 보며 튼튼하게 나만의 탑을 쌓으며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겨우 5층으로 쌓은 탑에 두 손을 모으고 돌아서며 뿌듯함에 미소가 지어진다. 예쁜 화분을 계단마다 올려놓은 카페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다기에 여유롭게 우려진 차는 아니었으나 차 밭 근처라 그런지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집에 가면 묵혀 둔 다기를 꺼내 차를 우려 볼 참이다. 주차장 가는 길에 삼나무의 호위를 받으면서 걷는 내내 흐뭇했다. 계획 없던 몇 시간의 나들이, 이처럼 작은 여유에서 자연이 주는 선물을 듬뿍 받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들에게서 지금의 이 힘든 시기를 살아내야 하는 인내의 삶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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