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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54) 가을과 남자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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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1,497회 작성일 2021-04-16 11:02

본문

<수필산책 154>
 
가을과 남자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꽃이 피는 화창한 날씨의 봄을 일컬어 여성의 계절이라고 한다. 봄은 골짜기에서 얼어붙은 눈과 얼음이 녹아 낮은 지대로흐르며 물기를 머금은 대지가 만물을 품어 꽃과 열매를 풀어내듯, 희망의 봄이 여성으로 비유되는 것은 여성이 사랑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아름다움의 상징이기 때문이리라. 그런가 하면 잎이 떨어지는 서늘한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남자는 거칠고 황량한 야생의 둔덕에서 억새풀처럼 질긴 의지로 살아남아야 하는 전사로 비교 되기도 한다. 강 하류의 벌판은 전쟁터처럼 늘 바람소리로 윙윙거린다. 억새풀의 서슬한 톱니가 밖을 향하고 있다. 꼿꼿한 대궁을 앞세우고 날선 잎 새는 바람을 베며 칼춤을 춘다. 남자는 자갈과 모래들로 뒤엉킨 뙈기밭에 질긴 촉수를 내리고 목숨을 지켜내는 억새풀의 운명과도 같다. 허리를 휘어잡는 억수 같은 장마의 횡포에 넋을 잃는 순간에 고개를 떨구고 구름 빗겨간 달밤의 처연한 시냇물 소리에 외로움을 삭히는 순간도 혼자 감내해야한다.
 
아우성치는 빗발에도 살을 도려내듯 아린 눈보라에 주눅 들지 않던 열정, 그래서 가을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의 험준했던 여정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장으로 한 가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서면 엄동설한을 예고하는 듯 한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가올 겨울에 식량부족과 추위로부터 가족을 지켜내기 위한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먹구름으로 점철된 지난여름의 열기를 벗고 환하게 웃는 맑은 하늘의 모습을 보고 남자는 멋없이 "씩" 웃으며 묵묵히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로 부터 멋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남자는 감정을 표현하고 수다 떠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어눌하다.  그러나 낭만과 꿈이 넘치는 세상을 어찌 감성어린 여자들만의 영역이라 할 수 있으리. 남자도 어린 시절의 창호지처럼 깨끗한 영혼은 넘치는 감성을 흡입한다. 봄이 오는 들녘에 한 떨기 붉은 꽃잎을 보며 가슴 설레는 아릿한 이성의 존재를 그리워 하기도 하고, 마술사 같은 물질문명의 현란한 유혹에 맥없이 빠져 들기도 한다.
 
청춘 시절의 이 세상은 끝없이 판타스틱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남자는 낙오자의 길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행복을 지키기 위한 파수꾼이 되기를 자처하고 말없이 묵묵히 일에 파묻혀 사는 동물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자 아이가 어떤 일로 울고 있을 때 우리의 어머니들은 "사내가 울면 못 쓴다" 고 야단 치셨다. 장차 사회에 나가 남자로 사는 일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는 표현이다. 안으로는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지켜야하고 경쟁사회에 나가면 넘어야 할 시련과 역경이 기다린다.  산처럼 쌓인 희로애락의 명제 앞에 눈물 따위의 사소한 감성은 가슴 속에 꾹꾹 누르고 살아야 하는 것이 남자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도 가끔은 짐승처럼 울 때가 있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술이 취하면 곧잘 지난날의 험난했던 역정을 떠 올리며 질질 우는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랑으로 구멍 뚫린 가슴을 틀어쥐고 엉엉 우는 사람도 있다. 주현미의 노래 속에 "남자가 울 때는 깊은 밤, 불을 끄고 운다" 고 한다.
 
 
여자가 울 때는 환한 대낮에 남자의 얼굴을 보며 애원하듯 울지만, 남자는 깊은 밤 혼자서 멋없이 운다. 신록이 우거진 숲은 어느덧 서늘한 바람 앞에 훈장처럼 매달린 푸른 잎을 떨구며 동면의 순간을 기다린다. 누구에게나 눈부시게 빛을 발하던 지날 날의 화려한 이력 하나쯤은 갖고 있다. 종잇장의 말미에 깨알같이 기록된 인생의 기록은 어느 순간 명멸하는 기억의 언덕에 한줌 초라한 무덤으로 남을 것이다. 새봄에 피어날 꽃 몽우리는 끈임 없는 기다림과 설레임으로 꿈을 부풀게 하지만 가을 날 떨어지는 낙엽처럼 파란으로 얼룩져 퇴색한 지난날의 영광은 쉽게 잊혀 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젊은 시절과의 이별을 슬퍼하듯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소리는 서럽고 안타깝다. 가을이 저물고 곧 겨울이 시작되는 강 하류의 둔덕엔 아직도 바람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무수히 많은 풀잎들이 겨울이 되면 병들고 시들어 사라지지만 억새풀은 전사처럼 꼿꼿한 줄기와 잎을 흔들며 겨울의 하얀 숲으로 남아 황량한 벌판을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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