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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55) 타임머신 /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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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769회 작성일 2021-04-23 23:24

본문

<수필산책 155>
 
타임머신
 
이재민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거실 시계의 배터리가 다하여 멈추어 버렸다. 말끔한 건전지를 찾아 교체해 주었더니 다시금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거꾸로 바늘을 돌렸더니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순간 타임머신이 별건가 하는 생각이 반짝 머릿속을 스쳐 갔다. 시간이 흘러가는 반대 방향으로 원을 일곱 번 그었으니 나는 일주일 전의 나이겠구나. 그럼 만 천 번 정도를 되감으면 박박 머리 꿈 많던 학창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남고에 다녔던 나와 3년 내내 같은 반에서 짝을 했던 오만상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둘이 키가 작아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1번 2번이 고정이었기에 해마다 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게 만상은 여러 모로 위로가 되는 친구였다. 우선 나보다 키가 작아서 70명 내외의 학급 친구들 중 키가 가장 작은 학생이라는 오명을 씻겨 준 일등 공신이었다. 늘 꼬질꼬질하고 말도 어눌하고 웃는 낯이었던  만상은 내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일례로 내가 도시락 수저를 가져오지 않은 날이면 으레 만상은 지 수저를 내게 주고, 다른 친구들에게 포크나 젓가락을 구걸하러 다녔다. 주번 일을 할 때도 매시간 칠판 청소를 하고, 주전자에 물을 떠 오는 것은 오만상의 몫이었다. 반에서 꼴찌를 독차지했던 오만상은 공부에 참 관심이 없었다. 오만상은 앞자리에서 졸기가 일쑤라 선생님들에게 혼날 때가 많았다. 무서운 선생님들의 매질에 휘청휘청 하면서 희죽 희죽 삐죽삐죽 웃고 우는 모습은 흡사 찰리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러웠다. 때문에 내가 속한 반에서는 학생들이 잠을 덜 잤고,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실 학교 안에서 만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 애가 배다른 7남매의 막내이며, 한 명의 아버지와 세 명의 어머니를 두고 있다는 사실, 공납금을 못 내서 선생님들이 대신 내주고 있다는 사실, 가끔 아버지에게 골병이 들도록 매를 맞는다는 사실. 가족과 함께 놀러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 등. 오만상과 관련된 일들은 하나같이 우울한 것들이었다. 그 애가 이처럼 세세한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기 시작한 것은 함께 어린이 대공원에 다녀오고부터였다. 고등학교 1학년 봄날 평소 내 글 솜씨를 좋아하셨던 국어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오늘은 선생님이 수업을 모두 빼줄 테니 학교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셨다. 소설가이셨던 선생님은 어깨를 툭툭 치시며, 괜히 대단한 척 쓰지 말거라. 힘 빼고 펜 지나가는 대로 쓱쓱 쓰거라. 하시며 글 쓰는 요령도 말씀해 주셨다.
 
 
내가 모든 반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가방을 싸서 학교 교문을 나오는데, 만상이 따라 나왔다. 왜 따라 오냐고 했더니, 짝꿍이 가는 곳이 자기가 갈 곳이라며 소매로 코를 한번 훔치고는 헤벌레 웃고는 뒤를 졸졸 따라왔다. 만상이 땡땡이 친 것에 대한 벌은 나 몰라라 하고, 그 애와 동행을 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어린이 대공원에 도착했을 때 벚꽃이 장관이었다. 겨우내 뭉쳐두었던 솜이불의 솔기가 풀어져 그 사이로 비집고 나온 솜 뭉텅이가 지천으로 흩어져 있었다. 만상이 곁에서 조잘대니 쉽게 글이 써지지 않았다. 사실 별로 쓰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주워들은 문장을 모아 조화처럼 꾸미기도 싫었고, 국어 선생님의 말씀처럼 힘을 빼고 쓸 재주도 자신도 없었다. 내가 풀이 죽어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만상은 꽃이 이리 좋은데 뭔 땅 꺼지는 한숨이냐며, 네 한숨에 예쁜 꽃들 다 떨어진다고 타박을 하였다. 만상은 알을 품던 에디슨도 커서 유명한 과학자가 되지 않았느냐며, 세상 벚꽃도 처음에는 한 마리 두 마리라 볼품이 없었는데 이제 수백 수천 수 만 마리가 되니까 그럴싸하지 않느냐며, 커서 잘 쓰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였다. 집으로 돌아갈 무렵 만상은 갑자기 벚꽃 위에 흰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을까 하고 물어보았다. 나는 웃으며 한창 따뜻하니 벚꽃이 피는 거야. 그런 경우가 있을 리가 있나. 그래도 있으면 좋겠다. 그도 장관이겠다. 특별한 날이겠다. 고 대꾸를 하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오만상, 글, 벚꽃 위에 눈이 내리는 날, 만상은 너무 만만해서 학급 친구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놀림과 괴롭힘을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만상은 오만상을 짓고 힘들어 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오만상이 오만상을 짓는다고 더 열심히 놀리고 괴롭혔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국어 선생님께서 각자가 품고 있는 미래의 꿈을 쪽지에 적어보라고 하셨다. 의사, 판사, 외교관, 사업가, 화가, 작가, 우리들은 모두 그럴싸한 꿈을 적어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한명 한명의 꿈을 읽어주셨다. 그리고 만상의 꿈도 잃어주셨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모두들 만상의 꿈을 듣고 와하하 깔깔깔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었다. 오만상이 오만상다운 꿈을 꾼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내 나이 이제 쉰 하고 하나. 세상 살며 온갖 쓴맛 단맛 다 경험하고 보니 나 역시 별것 아닌 오만상이 되어버렸다. 일을 하는 것도, 가정을 돌보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늘 부족하고 못난 나는, 늘 오만상을 짓고, 어제를 괴로워하고, 오늘과 내일을 두려워한다. 어쩌면 만상은 정말 자신의 꿈처럼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 이제는 오만상을 펴고 웃는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시계를 만 천 번 정도 돌려 그때로 돌아가 만상을 마주한다면, 너나 내나 같은 처지였는데 그걸 몰랐구나. 삶에서 어찌 벚꽃 위에 눈꽃 내리는 날이 하루쯤은 없겠느냐. 힘 빼고 내가 쓴 글 어디에 있던 독자가 되어 네가 만나주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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