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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61)와이파이 좀 나눠쓰시죠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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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128회 작성일 2021-06-04 11:29

본문

<수필산책 161>
 
와이파이 좀 나눠쓰시죠
 
이재민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친한 친구의 선배라고 소개받은 P가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항상 허리를 깊게 굽혀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서 사람이 참 단정하고 공손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 3년 전부터 P는 내가 일하는 곳의 옆 칸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다. 내 일터에서 다섯 걸음 정도면 닿는 곳에 P의 사무실로 들어설 수 있는 문이 있지만 한 번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일이 없었다.
 
그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일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사실인즉 알 수 없었다기보다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P와 나는 어떠한 이해관계도 얽혀 있지 않기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인사만 나누는 것이 오히려 더 편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오랜 해외생활에서 깨달은 너무 당연한, 사람에 대한 관성의 법칙이기도 했다. 헌데 이 메마른 법칙이 깨어져 버렸다.
 
바이러스 폭우에 온통 젖어버린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빵빵 터지는 와이파이가 내게도 필요했다. 대부분의 일을 온라인으로 처리하게 되면서, 와이파이 공유기의 빨간등은 신호등 빨간등의 경고보다 훨씬 또렷한 경고등으로 다가왔다. 하루 종일 이 전파의 숨결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녀야 했다. 너무 잦은 경고등이 켜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비싼 비용을 치르더라도 품질을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심했다. 업체에 연락을 하여 기존 가격보다 몇 배가 비싼 사양으로 업그레이드를 부탁했다. 헌데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서류 진행을 하고 기사가 나와서 설치를 하기까지 기약 없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벽 너머에 있는 아주 힘찬 와이파이 신호가 내게 손짓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 손짓이 너무 달콤해서 나는 드디어 다섯 걸음 앞에 놓여 있는 P의 사무실 문을 넘기로 결심했다. 양손에는 향기 좋은 커피를 들고, 얼굴에는 상냥한 장식을 하고. “안녕하세요. 어려운 때 잘 계신지 인사드리러 왔습니다.”라는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P는 정중히 커피를 받아들며, 답답한 상황을 화제 삼아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뒤 나는 내가 준비해 온 진짜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름이 아니라 실례인 줄 알지만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 합니다.” P가 웃으며 용건을 말씀해 보라는 여유 있는 제스처에 용기를 얻어 “와이파이를 나눠 쓸 수 없는지요. 물론 지금 지불하고 계신 이용 요금의 반은 제가 내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나름의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을 하였다. 쓰면 닳아서 티가 나는 것도 아니요. 둥둥 떠다니는 전파를 나눠 쓰는 것이니,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꽤 괜찮은 제안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하지만, “안 됩니다.” “그냥 설치하고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고 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 방을 뛰쳐나오다시피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참 야박한 인간이라고. 그깟 전파 하나 나눠쓰자는 것인데…’ 그 이후 P의 그림자라도 보이면 소스라치게 놀라 벽에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선인장 가시보다 따가운 그의 거절을 반복해서 기억해 냈다.
 
 
이제사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전파 따위에 혹은 P의 냉담한 거절에 마음 속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내 치졸함과 저열함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 듯 싶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전파일망정 그 사용에 대한 정당한 지분은 있게 마련이다. 나는 전파를 동냥하고 도둑질하려 했던 것이다.
 
나의 인간됨은 합리적 편안함이라는 방패연이 되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급기야 보기 좋게 추락해 버렸다. 딱 거기까지가 20년간 해외에서 살아온 ‘나’의 민낯이었던 것이다. 한 달이 지난 오늘에서야 기사가 방문하여 건강한 공유기를 설치해 놓고 갔다. 드디어 삶에 파란등이 켜졌다. 이 파란등은 내 양심과 타인과의 관계를 밝히는 불이 되었으면 싶다. 적어도 전파를 훔치거나 관계를 훔쳐 빨간등이 켜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후에 P가 커피를 들고 멋쩍은 웃음기를 띠고 내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지난 번에 제가 너무 야멸차게 거절한 것 같아 마음이 쓰여서요.”
“요금을 반반씩 내는 것이 편하시면 그렇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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