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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69) 그리움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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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871회 작성일 2021-07-30 09:54

본문

<수필산책 169>
 
그리움
 
이재민 / 힌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내 나이 여덟일 때, 내 아버지는 형제와 같다던 친구에게 빚보증을 잘못 선 죄로 집에 올 수 없었다. 내 어머니는 5남매 건사를 한다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전전하여 집에 올 수 없었다. 빚이 무언지도 모르고 부모님이 왜 집에 안 오시는지도 몰랐던 나는 학교보다는 들로 산으로 다니며 버즘 꽃과 동무를 했다. 그리고 밤이면 빚쟁이 아줌마와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그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쌀이 떨어져 동네가게에 가서 쌀을 외상하며 돌아오던 누이들의 얼굴은 늘 누런 쌀 봉투처럼 가여웠다. 서울 변두리 연립주택 우리 집 위로 별들은 싸늘했고, 겨울 칼바람은 깨진 창으로 들어와 살을 후벼 팠다. 진눈깨비 날리던 날 리어카에 보따리 몇 개를 싣고 야반도주를 해야 했던, 집 잃은 내 아버지의 서글픈 눈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 나이 오십일 때, 나는 넉넉하지만, 마음이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살고 있다. 2008년 가을, 부모님이 인도네시아로 오셨다. 우리 내외에게 피해를 안준다며 Cibubur에 집 한 채를 따로 얻어 사셨다. 아버지는 세끼 밥 때에 맞춰 매일 자전거를 타고 손주들을 보러 오셨고, 어머니는 매일 김치, 콩나물무침, 고사리, 무채, 오이무침, 된장찌개, 김치찌개, 청국장을 정성으로 만들어 오셨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가다 Antasari 초입에 붙어있던 큰 광고 간판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여보, 저것 좀 봐, 지금 아파트 계약을 하면 38인치 TV를 준대.“ 없이 살아온 생활 때문이었는지, 호들갑스럽게 아내에게 말을 했고, 그날 이후 TV가 눈에 밟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후 아내와 나는 수없이 발품을 팔고, 은행 잔고를 확인하고, 할부로 갚아 나갈 금액을 이리저리 맞춰 본 뒤 TV를 얻기 위해 집을 덜컥 계약해 버렸다. 지금 돌아보면 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계약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다. 차에 싣고 오는 TV는 거대한 짐짝처럼 내 어깨를 짓눌렀다. 3년을 꼬박,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먹고, 보고 싶은 것 안 보고, 꼬질하고 측은한 흥부모양으로 살았다.
 
사람들이 건설사에 대한 말을 할 때, 소유권에 대한 말을 할 때, 올라가지 않는 건설현장을 출, 퇴근길에 바라볼 때,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고 주먹 떡이 목에 걸린 것처럼 아파트 할부금을 붇는 일이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 어릴 때 떠나온 집을 떠올렸다. 우리가족이 많이 상처받았던 집, 하지만 결국 나는 자카르타에서 가장 높고 근사한 떠나온 옛집의 몇 백배 멋있는 집을 갖게 되었다.
 
2010년 8월에서 9월까지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셨다. 크고 작은 병원에 다니며 약도 먹고, 입원도 하고 많이 쇠약해 있었다. 이제 한국에 가서 입원을 하시라 해도, “조금 있으면 너희 내외가 아파트 입주를 하는데, 애비는 그것 보고 한국 가든지 하련다.”
 
그렇게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9월 5일, 그렇게 애태우던 아파트 입주를 하던 날이었다. 몸이 쇠약해진 아버지는 집안을 휘 둘러보시고,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드셨다. 9월 6일, 이른 새벽에 아버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허약한 몸으로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아보셨다. 아침식사로 밥 한 끼를 다 비우고, “장하다!” 한 말씀만 남기시고, 다시 어머니와 Cibubur 댁으로 향하셨다. 그날은 그간 고생을 지켜본 동료와 일이 끝난 후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Cibubur 댁에 가볼까 하다 그냥 귀찮은 마음에 내 그 훌륭한 집으로 돌아왔다.
 
술 한 잔과 기분에 취해 집에 돌아와 TV를 켰다. 가요무대라는 낡은 프로그램에서 늙은 여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너를 보내는 들판에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유행가 가사가 이렇게 슬픈 시가 될 수 있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하며 까닭모를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버지 돌아가시려나 보다....” “아버지 돌아가셨다...”어머니 목소리가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지금 나와 내 아내, 두 아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아보시고, 당신 아들에게 “장하다.... ”말 한 마디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요즘은 그때 많이 흘렸던 눈물 닮은 비가 그치지 않는다. 애꿎은 빗방울 닮은 눈물도 자주 흐른다.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떠나온 집에 무슨 미련이 있기에 끝없이 아련한지... 부끄러움밖에 남지 않은 그곳이 왜 자꾸 그리운지. 도통 모르겠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셨을까. 나는 가난을 물려준 당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자꾸 생각나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일까.
 
2010년 가을. 내 아버지는 인도네시아에서 하루 앓고 돌아가셨다. 무뚝뚝한 성격처럼 임종도 무뚝뚝하셨다. 자식들 걱정 안 시키고 빨리 깨끗하게 가시겠다던 평소 말씀처럼 어머니 손 한 번 잡고, 여전히 미덥지 못한 막내이름 한 번 부르고 돌아가셨다. 그르렁 그르렁 마지막 숨 소리 두 번 삼키시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유골함을 마른 손으로 부여잡고 충북 노은면 선산에 묻어야 한다며 울먹이셨다. 수카르노하타 공항을 떠나던 내 어머니 마른 손은 눈물이었다. “내 죽거든, 화장하고, 그 뼛가루는 네 아버지 옆에 뿌려라.” 어머니는 이듬해 그리운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3년 너와 애미, 애기들과 인도네시아에서 잘 살았다.” 반짝 흔들리던 햇살 하나 마지막으로 움켜쥐고 돌아가셨다.
 
어머니 잃은 모든 이가 그렇듯 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유년의 겨울, 다 부르터지고 갈라졌던 손 위로 뜨거운 물을 붓던 통증으로 다가온다. 내 어머니의 손, 마르고 아팠던 손, 어느 날 고춧가루를 넣고 콩나물 쓱쓱 무치던 어머니를 향해 불쑥 던진 질문이 있었다. “엄마는 왜 세상을 살아? ”잠시 뜸을 들이던 어머니는 “이 엄마는 너 때문에 살았어. 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진즉에 도망가거나 죽었을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그런 대답이 어디 있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산 게 이 엄마가 산 것이고, 너를 키운 거야.” 내 어머니는 유독 살아 있는 것 중 꽃을 좋아했다.
 
 
작은 집에 화분이 늘 빽빽했고, 세간은 없어도 꽃이 넘쳐야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어느 때부턴가 꽃을 닮아갔고, 주변에선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부엌에서 된장국 청국장국을 맛깔스럽게 끓여도 어머니에게선 꽃향기가 났다. 지나가는 길고양이도 어머니 곁에서 꽃향기를 맡았고, 시든 꽃 풀도 물만 주는 그 손에 다시 잎을 피우고 꽃망울을 내밀었다. 내 어머니는 봄날 버들을 따라 시내를 건너 나무 그늘에서 처음 만나는 알싸한 붉은 향으로 만나는 산꽃과 같았다. 손주들에게 내 꽃들...이라는 따뜻한 말로 아이들을 피게 했고, 아이들로 매일 활짝 피었던 인도네시아에서의 마지막 삶을 살았다.
 
누구든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어머니’가 아닌 ‘엄마’가 그리운 하루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끊임 없이 아파하는 일이었다. 아파해야만 사는 것이고, 아픔을 곱씹는 것이 삶인 것처럼 보였다. 하루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며 “이것 봐라. 김치 담그던 손으로 먹이를 주니 먹지를 않아...” 손을 행주로 씻고, 다시 먹이를 주며 “이것 봐라. 이놈이 이제야 음식을 먹는다.”
그제서야 안심하고 웃던 내 어머니, 들 고양이의 의심과 두려움을 아파할 줄 알았던 어머니의 손을 보며 내게도 아파하며 사랑했던 순간이 많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첫사랑에게 버림을 받고, 아침 밥상에서 밥알을 넘기지 못하고 수저 위로 눈물만 쏟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 때 내 어머니는 못난 아들에게 “가여운 것, 불쌍한 것. 그래 울어라. 열 살을 먹어도, 육십을 먹어도 이별은 아픈 거야. ”자신보다 훨씬 커버린 아들의 등판을 쓱쓱 문질러 주며 나보다 더 아파했었다. 머리가 깨져 병원에 가 다섯 바늘을 꿰매던 일곱 살 아들 녀석이 내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아빠 손 꽉 잡으니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 순간 어머니 손이 덩그렇게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따뜻한 손, 그냥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손, 오늘도 여지없이 자카르타에 비가 온다. 곧 설이라 부엌 어딘가에서 달그락 달그락 거리며 김치라도 담그고 있을 것 같은 내 어머니의 손이 한 없이 그리워 빗소리 아래 잠들면 꿈에라도 나타나줄까 소망하지만 나는 불효자라 좀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늘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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