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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10) 그 벽에서 멈추다 / 하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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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844회 작성일 2020-06-11 15:32

본문

< 수필산책 110 >
 
그 벽에서 멈추다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보로부두르 벽 앞에 선다. 단호한 벽이 여기저기서 숨길을 조이면 나는 그저 신음소리로 무너진다. 내 안의 반란이 인다. 그 벽 앞에 서면 전율과도 같은 쾌감이 세포신경을 자극한다.
 
아마 8~9세기 고대 중부 자와 조각가들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신의 손을 가진 예술가들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들은 칠팔십 년 동안 할아버지, 아들 그리고 손자들까지 대를 이어가며 보로부두르 벽에 수많은 이야기와 의미 있는 장식들을 담아 놓았다. 석탑의 바닥 숨겨진 기단에서 9층까지 보로부두르 온몸 전체가 보물창고다.
 
천사백육십 면 조각패널, 오백사 구의 불상 그리고 수많은 장식 깔라(Kala), 마카라(Makara) 등, 어디를 툭 건드려도 깊은 산 계곡 돌 사이 샘물처럼 이야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끊임없이 졸졸 흘러나오는 곳이 바로 보로부두르다. 각 회랑 조각과 조각 사이에 탐정, 추리소설 구성처럼 이야기들을 빈틈없이 장치해 놓은 것을 보면 조각가들은 천 년을 넘나드는 천재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마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소설을 읽어보는 만큼이나 탐색의 재미들이 숨겨져 있다. 가끔 사람들은 제2회랑 화엄경 삼십구품 간다뷰하 선재동자 구도 순례기만 보고 대충 다 보았다며 돌아간다. 그러나 보로부두르에는 경전 이외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는데 이것을 보지 않고 간다면 참 재미없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고대 중부 자와 조각가들은 후세 사람들이 석벽 조각 이야기들을 아무 노력도 없이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놓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 흥미진진한 보로부두르 조각 추리 소설 석벽 조각패널을 해석하려면 보로부두르 코드, 암호 해독 코드인 난수표를 가지고 풀어 나가게 만들어 놓았다. 바로 보로부두르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말, 산스크리트 영어 음역을 비롯한 전문용어들이다. 역사학자들, 안내원들은 모두 이 말로 안내를 하는데 대부분 한국인들은 이들이 사용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이 원어음역인 말들을 그대로 사용하려고 한다. 이렇게 원어음역을 미리 공부한 사람들만이 이 비밀의 화원 같은 보로부두르의 숨은 스토리를 추리하고 즐길 수 있게 장치를 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 미로를 여는 난수표 암호 해독 같은 열쇄인 보로부두르 공통사용 전문용어들을 표조차 없이 오는 사람들은 앞 사람 뒤통수만 보고 따라다니다 돌아가는 수학여행이 되어 버린다.
 
천사백 육십 면(面) 조각 속에는 주인공 이야기뿐만 아니라 배경이 되는 존재들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셜록 홈즈에서 안개, 강, 런던거리, 자전거, 마차, 검은 개, 묘지, 파이프 담배, 궐련, 시가, 사냥모자, 돋보기, 망토, 가로등, 책 등 수많은 배경들이 없다면 재미도 없고 삭막해 지듯이 보로부두르 조각들에도 수많은 배경들이 등장한다.
 
2층 제일회랑 주벽 백이십 면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시절 이야기, 외벽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이야기 본생담 자타카, 부처 이외 사람들의 비유담 아바다나, 그 중 선녀 마노하라 공주와 수다나 왕자 이야기, 3층 제이회랑 주벽부터 이 보로부두르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화엄경 입법계품 간다뷰하 오십 삼 선지식 이야기들이다.
 
또한 4층 제삼회랑 5층으로 올라가는 통문 위 턱 없는 깔라 두상, 그 아래 선지자들이 깨달음으로 단계인 오층으로 가는 순례자들에게 꽃비를 뿌려주고 있다. 사람들은 깔라를 단순하게 악귀를 쫓아주는 귀신 얼굴이라고 하지만 코믹스럽고 장난기 많은 도깨비의 얼굴로 보인다. 제사 회랑 외벽, 주벽 오십삼 선지식 이야기가 사백육십 면 패널이 석벽 가득 새겨져 있다.
 
 
전 회랑 조각배경으로 보면 구석구석에 통적으로 천신, 하늘에서 날아오는 천인, 먹을 것 나누어 주는 착한 사람, 턱수염 기른 브라만, 신분이 높은 사람과 그 아래 무릎 꿇은 낮은 사람, 군인, 감옥을 지키는 간수, 경비원, 근엄한 재판관, 두려운 눈의 죄인, 농사짓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난봉꾼, 싸우는 건달, 술주정꾼, 도박하는 사람, 춤추는 남녀, 성희롱하는 남자, 술병이 들어 치료 받는 사람, 새의 모습을 한 킨나리 킨나라 반인반조, 사람도 잡아먹는 도깨비들, 왕, 세무공무원 그리고 원숭이, 말, 코끼리, 공작새, 사자, 용 그리고 궁전, 호화주택, 동굴 집, 악기, 무기 등등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 식물들이 주인공들 못지않게 새겨져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대단한 감동을 주는 보로부두르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렇게 상징물을 주인공 주변에 쉽게 띄지 않게 배치해 놓고는 천수백 년 동안 순례자들로 하여금 찾는지 못 찾는지를 돌 벽 위 공간에서 내려다보며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장난 섞인 고대 조각가들이 마치 내 곁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느껴지니 말이다.
 
적도 햇볕이 이 거대한 돌들을 후끈후끈 달구는데도 나는 금 찾기에 미친 사람이 되어 보로부두르의 조각들을 찾아 다녔다. 처음부터 다시 조각과 음역 산스크리트 음역, 영어전문 용어들 그리고 배경 이야기 하나하나 점검을 하며 올라가서 4층 회랑에서 확인 작업을 마쳤다.
 
지친 H선생이 나 혼자 4층 회랑에 남겨두고 내려갔다. 뜨거워진 돌바닥 위에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높은 주벽과 난간 벽 위로 손바닥만 한 좁은 공간에 푸른 하늘이 열려 있었다. 나는 순간 그 벽 앞에서 정지되듯 멈추어 인간도 이렇게 신들의 경지에 근접하는 보로부두르라는 위대한 걸작을 만들어 낼 수도 있구나! 전율이 오도록 감탄을 거듭하며 천 수백 년 전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공감이 되면서 내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이 가빠져왔다. 세 번째 보로부두르 답사 여행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가슴 떨리는 감동적 경험이었다.
 
 
그 후 더 많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서 만든 나만의 보로부두르 암호 해독용 공통사용언어와 한글 대조표를 들고 다시 답사를 떠났다. 한 순간이나마 온전한 나 지신이 되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층층이 올라가고 내려오며 적도 햇볕이 이 거대한 돌들을 후끈후끈 달구는데도 나는 금 찾기에 미친 사람이 되어 보로부두르의 조각들을 찾아 다녔다. 처음부터 다시 조각과 음역 산스크리트 음역 영어 전문 용어들 그리고 배경 이야기 하나하나 점검을 하며 올라가서 4층 회랑에서 확인 작업을 마쳤다.
 
지친 H선생이 떠나고 나 혼자 4층 회랑에 남겨졌다. 뜨거워진 돌 바닥 위에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높은 주벽과 난간 벽 위로 손바닥만 한 좁은 공간에 푸른 하늘이 열려 있었다. 눈을 내려 둘러보면 신들의 경지에 근접하는 보로부두르라는 위대한 걸작이 내 앞에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보로부두르 석탑 서쪽 하늘 검은 구름 사이로 거대한 투명 공간이 나를 향해 이동해 왔다. 영하 50도 공간이 나를 감싸고 지나가는 순간 나는 급 냉동 참치가 되어버렸다. 천 수백 년 전 위대한 예술가들과 공감이 되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이 무슨 의미의 영적 체험인지 나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나를 돌벽 앞에 다시 서게 했다.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현재의 나는 돌벽 앞에서 넘치는 에너지로 충전된다. 포박을 푼다. 비로소 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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