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알려지지 않은 땅 / 신정근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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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79) 알려지지 않은 땅 /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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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553회 작성일 2019-11-07 11:18

본문

< 수필산책 79>
 
알려지지 않은 땅
 
신정근 / 수필가 (제1회 적도문학상 대상, 한국문협 인니지부 명예회원)
 
 
그곳은 나름 괜찮은 매력을 지닌 땅이다. 단순히 토지가격이나 시장가치로서의 의미보다는 그 땅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나무와 식물들, 매순간 아픈 역사를 환기시켜 주는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의 건축물들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그 안에서 무리 지어 도시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녹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일상이 과도한 지루함과 현실을 벗어나고픈 갈증을 유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땅’이라는 외마디 음절로는 모두 포괄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색깔과 이유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는 그들의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지켜온 ‘땅’이라는 글자가 가진 무게를 가슴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땅에 도착한 이방인이었다. 외진 섬, 적도 주변으로 흐르는 플로레스 해협의 귀퉁이에 자리한 곳에 온 왜소한 동양인에 불과했다. 곧 그곳의 바람과 태양, 비와 땀이 뒤섞인 공기는 나에게 안락한 대도시의 편리를 잊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땅은 마음속에서 뱉어내지 못하고 그만 썩혀버린 응어리와 흉내 내기에 급급했던 물질적 소유에 대한 욕망들을 바닷가에서 풍겨오는 비린내 안으로 던져버리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특히 해변의 바닷바람은 얼마나 좋은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맥주 맛처럼 일품이요, 그래서 테이블에 놓인 빈 병이 한없이 늘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모든 것이 이질적인 그 땅은 이십대를 휩쓸고 지나갔던 철부지 사랑처럼 내 감정의 끓는점을 가감 없이 빠르게 끌어올렸다. 도시가 주는 첫 모습은 녹색의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에 덧대어진 바다빛깔을 닮은 코발트 블루의 창연한 하늘이었다.
 
아잔(Ajan)소리가 도시를 에워싸며 요란하게 울려 퍼질 때에도 자연은 그대로였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의심과 호기심 어린 눈빛들은 이내 그들의 집, 아니 땅에 잠시 방문한 손님에 대한 선량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새로운 학기가 시작한 학교에 막 전학 온 동급생에게 먼저 다가와 준 마음씨 좋은 친구 같았다. 나는 금세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융화되었으며 덕분에 낯선 타지에서의 모든 적응을 마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달랐지만 다르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매번 똑같은 합의와 생각의 동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나는 그렇게 인도네시아의 항구도시 마카사르와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정확히 857일의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다는 속담은 허투루 생긴 말이 아니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나는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떠나 온 땅이 나의 고향인지, 지금 떠나야 할 땅이 나의 고향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입대하기 전 헤어지기 싫은 애인과의 마지막 하룻밤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 밤, 마카사르의 모든 길, 건물, 나무와 사람들에게 검은 도시를 밝히는 천개 혹은 그 이상의 별들과 형광전구의 숫자만큼 사랑한다고 말해도 부족할 것만 같았다. 그것이 ‘장소에 대한 사랑’ 즉, 토포필리아(Topophilia)였을까.
 
 
하나의 장소가 그토록 큰 망설임과 그리움을 동반하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어떤 장소나 공간과도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마카사르는 이미 내가 정의한 마음속 또 다른 고향이었으며,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여행자의 방황하는 발걸음에 선명한 마침표를 찍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에 불과했지만 기실 지구를 통틀어 물 위에 떠 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오랜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한 나에게 마카사르는 아마도 이방인이 심은 얕은 감정의 씨앗까지도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고마운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혹시 또 세월이 흘러 다시 그 땅을 밟게 된다면 그때 가서 우리의 새로운 이야기도 적도 빛 노을 아래 함께 쓰여 지리라. 그때까지 부디 여행자의 가슴속 지워지지 않는 낭만의 섬으로 남길 바라며, 잠시만 안녕을 고한다. “다다(D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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