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95) ‘내로 남불’에 대하여 /김준규
페이지 정보
수필산책
본문
< 수필산책 95>
‘내로 남불’에 대하여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내로 남불’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 태생의 비밀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국적이고 기형적이다. ‘내’는 나를 지칭하는 일인칭이고 ‘로’는 영문의 Romance 한글표기이며 ‘남’은 우리말에서 상대방을 지칭하고 ‘불’은 한자의 불륜에서 파생된 언어구조를 이루고 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도 불륜을 법적으로 제재 받는 종전의 규정을 개정하여 각계의 찬반여론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던 사례가 있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불륜이 단순히 부정적인 범죄로만 취급되어야 하는가는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신은 인간에게 에스트로겐 (estrogen)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질을 선사하였다. 이 신기한 원시물질은 여성의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사랑의 단초를 제공하여 생식과 행복의 영속성을 이끌어 낸다. 따라서 불륜의 오류와 역사가 근대문명의 산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구약성경의 십계명에 "간음을 하지 말라" 고 되어 있는 걸 보면 불륜의 역사가 초기인류의 발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중국의 고전이나 조선시대에도 불륜으로 인한 사건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륜은 지탄받아야 할 반인륜적 행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지구상에 남녀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기우가 아닐까. 신라시대의 처용가를 읽다보면 불륜의 원조를 보는 것 같다. 현실수긍과 해학으로 용서의 미덕까지 감지된다. 처용가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 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 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이 시에 나타나는 주인공 남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시와 술에 빠져 사는 풍류객 일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가 밖으로만 나돌며 아내를 소홀이 대하면 외로운 아내를 위로해줄 사내가 물이 고이듯 모여들게 마련이다. 아마 그날도 서라벌의 주막에서 친구들과 몇 순배 (1차, 2차, 3차)까지 즐기다가 팔자걸음으로 집을 찾아오니 어렴풋이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시에서 주목할 만한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불륜의 현장에서 우리가 통상적 개념으로 유추되는 혼란한 상황의 극열한 복수심, 심한 경우 참극의 장면까지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쩌면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의 보상으로 용서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이시의 끝맺음이 참극으로 마무리 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외도를 해학의 메시지로 승화시키는 이시의 매력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풍류객답게 너털웃음을 흘리며 수긍과 용서의 결단을 내리는 모습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처용가는 신라시대 헌강왕 때 처용이 지은 향가 중의 일부이다. 문학사적 의미에서 볼 때 향가의 배경이당시 시대상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옛날이라고 해서 남녀의 애정관계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속성상 익숙한 것에 무관심하고 쉽게 피로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과분함은 타성의 빌미가 되어 현실 탈피라는 짜릿한 무리수에 유혹 당한다. 기혼의 남녀가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인 로맨스(Romance)를 스스로 불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내의 한계에서 벌어진 어설픈 시나리오가 타인에게 감지되었을 때 받는 반감의 표현을 ‘내로남불’ 이라고 한다.
불륜은 이성적인 (reason)것과 비이성적인 윤리의 경계에서 꾸며지는 음모의 이중적 잣대를 서로 공유하려는 마성의 합작품이 아니겠는가. 시대가 발전해도 남녀는 끊임없이 합체의 원시적 욕구에 젖어있다. 그러나 불륜은 넘치는 에스트로겐의 남용이며 윤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도둑놈이 오십보 앞에 가는 사람을 보고 저놈이 도둑놈이라 하고 하지만, 자신이 도둑놈이라고 밝히지는 않는다. 도둑의 누명은 일단 남한테 떠넘기고 보자는 속성이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이곳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활동하는 일만을 대단하게 홍보하고, 다른 단체나 개인이 열정을 쏟으며 역사를 이루어온 일들을 폄하하는데 일조하는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있다. 특히 그런 사람들에게 ‘내로 남불’이라는 용어가 이 시대에 크게 회자되는 이유 중에 하나다. 또 하나는 정치의 비도덕성이다. 나라를 이끄는 정치권력은 중립적이며 이성적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즉. 국가는 너 이거나 내가 아니고 우리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서로 ‘내로 남불’이라고 부르짖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가 정의에 입각한 정치실천을 외면하고 내 편에 선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입장에 서고 자기편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도덕의 불감증에 편중되어 있다. 어떤 이는 이를 이념의 횡포라고 규정 짖는다. 정치에서 이념은 각자가 공유할 수 있는 자율적 정치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법률적 장치조차도 이념의 끄나풀이 되게 하려는 무리수가 지금의 정치상황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자녀의 학위문서를 위조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한 정치인의 행태를 들여다보면 단면이 드러난다. 초등학생 수준의 지적능력이면 인지가 가능할 정도로 비도덕적 가면으로 겹겹이 쌓인 그의 이중성과 범죄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내로 남불’ 적 도덕이 해체된 현실 앞에 많은 지식인들이 침묵한다는 사실이다. 이념의 다양성이라고 치부하기에 너무 난해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길거리에서 멱살 잡고 싸우던 시대는 지났다.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 라는 오류의 시대도 지났고, 이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선진문명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성적 판단의 실행에 서툴기만 하다. 이기주의와 편향적 사고에서 방황하고 있다. 요즘 정치를 보면 21세기 문명국가 맞는가? 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 ‘내로 남불’을 외치는 것이 무슨 죄인가.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성과 정의를 외면하는 더 이상의 정치 논리는 이 땅에서 하루빨리 사라져야할 시대적 과제가 아니겠는가.
- 이전글(96) 3.1운동이 맺어준 선린 관계 /우병기 20.03.04
- 다음글(94) 건망증, 그 당혹스러운 손님 / 서미숙 20.02.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