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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26) 달팽이와 유목전사 /하승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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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8,018회 작성일 2020-10-0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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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26 >
 
달팽이와 유목전사
 
하승창 / 제4회 적도문학상(수필부문)- 최우수상 수상자
 
 
나는 아침마다 약 40분간 동네를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첫 30분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땀을 내고, 이후 10여 분은 천천히 걸으며 땀을 식힌다. 아침 산책길에는 매번 마주치는 존재들이 있다. 밤새 길가에 쌓인 낙엽과 낙화들을 쓸어담는 청소부들, 항상 씩씩하게 걷는 이웃집 할아버지, 불편한 한쪽 다리를 끌고 도우미와 함께 산책하는 할머니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울창한 나무들과 야자수, 짹짹대는 새들을 마주치며 걷다 보면 내가 '꽃길'이라고 부르는 길이 나온다. 흰색, 분홍색, 빨강색, 노랑색 등 형형색색의 다섯 잎 예쁜 꽃들 그 이름이 깜보자 꽃임을 바로 며칠 전에야 알았다- 이 핀 나무들이 늘어선 그 길을 지날 때면 상쾌하고 그윽한 꽃향기에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감사와 행복을 느낀다.
 
 
 
몇 달 전만 해도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걷다 보면 장엄한 일출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의 남반구는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는 까닭에 집을 나서는 순간 이미 태양은 솟아 있다. 계절의 변화는 새로운 존재를 세상에 내보낸다. 지난주에는 쌀겨처럼 작고 개나리꽃처럼 샛노란, 이름 모를 꽃잎들이 나의 아침 산책길을 반겨 주었다. 큰 나무에서 눈발처럼 우수수 떨어져 길에 흩뿌려 쌓인 모양새가 마치 금싸라기를 깔아 놓은 듯하여 청소부들에게 이 꽃들만은 쓸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우기가 다가오면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존재가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달팽이다. 한국에서 흔히 보는 작은 달팽이가 아니라 소라고둥 모양의 집을 짋어진 거대한 열대 달팽이로, 비가 내린 후면 어디에선가 나타나 남의 집 담장을 기어오르거나 축축한 아스팔트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일본 전국시대에 ‘오다노부히데’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이란 모름지기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움직이는 법이야. 물속의 조개처럼, 나무 위의 달팽이처럼 말이지.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 한눈을 팔면 행방을 모르게 돼." 노부히데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오다노부나가’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관습을 무시한 자유분방함과 기행으로 가신들과 타국 영주들로부터 '오와리의 멍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 사후, ‘노부나가’는 신분과 배경이 아닌 오직 실력 위주의 파격적인 인재 등용과, 포르투갈로부터 전래된 신기술인 조총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해 일개 지방 영주에서 전국구 영주로 부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구식의 전술을 답습한 다케다 가문을 분쇄함으로써, 100년이 넘게 이어진 전란의 시대를 종식시키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아버지 ‘노부히데’로부터 시대의 향방을 읽고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던 것이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택시를 결제하는 세상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혁명이 시작된 지 불과 20~30년, 폭발적인 기술 가속의 법칙은 이미 인류를 인공지능 기반의 4차 산업 혁명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몸에 칩을 이식해 컴퓨터와 연동하는 기술은 이미 실용화를 앞두고 있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을 보자. 우리 몸에 접착되어 있지만 않을 뿐, 스마트폰이 없이는 일을 하지도 여가를 즐기지도 못 할 정도로 이미 컴퓨터는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어 있지 않은가.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 몇 년간은 핸드폰을 사주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은 이미 물거품이 된 지 오래다. 양질의 교육용 어플리케이션과 게임들, 창의력을 자극하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 아이들에게서 스마트폰을 박탈한다는 것은 그들을 도태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는 교육과 직업 뿐 아니라, 인간관계와 사회 구조의 모든 영역에서 기존의 법칙과 관념이 송두리째 재편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집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 일을 하며 집에서 쇼핑을 하는 시대를 말이다. 생산의 공간과 소비의 공간이 한 곳에 구현되는, 앨빈 토플러가 [제 3의 물결] 에서 예견했던 직주일치(직장과 주거지의 통합)의 세상은 벌써 도래한 것이다.
 
며칠 전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보았는데, 그것은 시베리아에서 2,500년 전 매장된 스키타이 전사 부부의 무덤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8세기부터 약 600여 년간, 우크라이나에서 한반도 인근에 이르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 역사에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농업 국가의 정주민들에게 대단히 두렵고도 위협적인 존재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배운 기마술과 궁술로 남녀불문 모든 구성원이 높은 전투력을 갖춘 데다가 적진의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출몰하는 기동성과 뭉쳤다 흩어졌다 를 반복하는 유연한 전략은 그들을 대륙 최강의 정복자로 만들었다.
 
이 뉴스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번에 발굴된 여성 전사가 남성용의 긴 칼과 도끼, 망치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목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의 그것과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높다. 왜냐하면 농경 사회와 달리 유목 사회의 여성은 인구 생산과 식량 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그대로 병력으로 투입 가능한 소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발굴된 여 전사의 무덤들에서는 활과 화살만이 부장되어 있었기에 이들은 활을 쏘는 경기병의 역할만을 했으리라는 것이 통념이었으나, 이번의 발굴로 인해 여성 또한 근접 전투 무기를 갖추고 적군에 돌격하는 중기병의 역할도 수행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 사실은 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는 것 같다. 이미 긱 이코노미 (Gig Economy)라 하는, 기존의 경직된 고용 형태가 아닌 프로젝트에 따라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임시 계약을 맺는 유연한 고용 제도가 새로운 경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플랫폼 기반의 경제 형태는 마치 유목 전사들이 신속한 기동력으로 뭉치고 흩어짐을 반복하는 전투 양상을 보는 듯하다. 유목 전사들은 빠르다. 빠르기 때문에 유연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강하다. 비 대면과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남녀의 구분 또한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오직 능력과 성과만이 개인의 생산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것이며,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지위를 누렸던 스키타이 여 전사들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시대의 전환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렵고 불안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 화성 식민지 개척을 꿈꾸는 '캘리포니아의 멍청이' 일론 머스크가 2025년까지 저궤도 위성 1만 2천 대 설치를 목표로 쏘아 올리고 있는 스타링크 위성 인터넷은, 이미 북미에서 베타 테스트를 마치고 연내 상용 서비스를 앞두고 있다. 밤하늘을 그물처럼 수놓을 빛나는 위성들의 별자리는 지상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것이다.
 
달팽이는 느리다. 한참을 지켜보고 있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잠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다시 보면 어느 사이 사라져 버리고 없다. 세상이 변하는 모양이 달팽이와 같다. '오와리의 멍청이' 아들에게 아버지 ‘노부히데’는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 "살아남으려면 달팽이의 행방을 파악해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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