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80) ‘쟁이’ 예찬론 / 엄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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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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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80 >
‘쟁이’ 예찬론
엄재석 /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쟁이’라는 말은 기술이나 기능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곧잘 쓰이는데 국어사전에는 2개의 뜻이 있다. 하나는 사람의 성질이나 특성, 행동 등을 나타내는 일부 어근 뒤에 붙어, 그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을 얕잡는 말로서 쓰인다. 예를 들면 욕심쟁이, 욕쟁이, 빚쟁이, 깍쟁이, 심술쟁이, 겁쟁이, 난쟁이, 뻥쟁이, 거짓말쟁이, 영감쟁이 등이 있다. 다른 하나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것과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얕잡는 말로서 쓰이는데 글쟁이, 점쟁이, 뚜쟁이, 땜장이 등이 있다.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개구쟁이, 멋쟁이가 있다. 이 쟁이는 한 분야의 전문가인 장인(匠人)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걸로 추정된다.
건설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특히 쟁이라는 말을 잘 사용했다.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치는 등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자신의 직업을 비하하며 쉽게 쓰였나 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내가 처음 공사현장에 나섰을 때는 자주 들었다. 목수 쟁이는 목수 일을 하는 직업으로 지금은 목공으로 불린다. 철근 쟁이는 콘크리트에 들어가는 철근을 가공, 조립하는 철근 공을 지칭한다. 땜장이는 쇠를 접합하거나 구멍을 메우는 용접 일을 하는 직업을 비하하는 용어이다. 미장이는 벽돌이나 콘크리트의 거친 벽면을 모르타르로 매끄럽게 하는 미장공의 별칭이다. 본인의 전공인 토목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토장이”라고 불렀는데 공대생을 비하하는 공돌이 보다 더 듣기 싫었던 용어가 바로 “쟁이”였다. 나의 기질은 아무리 보아도 이과보다는 문과 쪽이었다. 고교 때 국어, 역사나 사화 과목을 수학 물리, 화학보다 좋아했고 성적도 훨씬 나았다. 지금도 책 읽기와 글쓰기를 전문 분야보다 좋아하니 문과가 나의 천성인가 보다.
그래도 이과를 선정했고 대학을 지원할 때 졸업하면 취업이 잘된다는 속설만 믿고 공대를 갔다. 공대 중에서도 가장 “쟁이”다운 토목과를 입학했다, 막상 들어가 보니 적성을 무시한 전공이라 공부도 흥미가 없어 무늬만 학생인 대학시절을 보냈다.
공대보다는 남들처럼 경영학과, 정치외교학과, 법학과 등 인문계 학생들이 부러웠다. 고등학교 때 좀 더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되었지만 끝난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다시 재수라도 하여 화려한 전공으로 옮기는 화끈한 용기도 없었다. 그래도 학교를 마치니 어찌하여 취업이 되어서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쟁이’의 길을 출발했다. 사우디에서 시작하여 인도, 방글라데시, 고국인 한국을 거쳐 이제는 인도네시아까지 왔다. 오직 건설의 길 40년에 도로공사에서 시작하여 발전소, 택지조성, 지하철 공사, 환경개선공사에다 지금의 건축공사 현장까지 두루 섭렵한다. 이제는 토목을 넘어 건축까지 하게 되다니 내 자신이 보아도 경이롭다. 분야로는 시공에서 수주영업까지 분야별로 다양하게 경험하였다.
학교 시절에는 제대로 못했지만 직장인으로 주경야독하다 보니 기술 분야의 꽃이라는 기술사 자격까지 취득하였다. 은퇴시기에 제2의 인생으로 시작하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한다.
좋은 대학에 멋진 전공으로 직장생활도 화려했지만 퇴직 후에는 막 일을 하는 뉴스를 자주 본다. 대학 랭킹도 몇째 안에 들어가고 모두가 부러워하던 전공이지만 퇴직 후 백수로 지내는 인문계 출신들이 많다고 한다. 퇴직 후의 모습은 전공별로 차이가 크다. 기술 분야 전문가가 대접받는 시대인지 지금도 같이 졸업한 학과 동기들은 대부분이 현역에서 일하고 있다. 비록 보수는 전성기와 같지 않지만 그래도 자기 분야를 지키기에 공대 출신은 취업도 잘 되고 롱런한다는 속설이 이제는 정설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근무 하다가 우연찮게 미장 공사를 수주하였다. 자카르타 중심부에 건설되는 고급 아파트 공사로 나로서는 본업의 이탈이다. 토목 전공으로 도로나 철도 공사를 주로 해온 나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무엇보다 토목공사는 야외에서 일하다 보니 우천에 취약했다. 일하다 말고 비가 와서 작업이 중단되고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강수량이 많은 인도네시아는 우기철이 시작되면 몇 달간 비가 내린다. 그러니 공기는 지연되고 투입 비용은 실행 예산을 초과하게 되어 문제현장이 되곤 하였다. 하여 비가와도 지장이 없는 건물 내 공사가 부러웠다. 이런 와중에 수주한 미장 공사는 실내에서 시멘트와 모래에 물을 타서 벽에 바르면 되는 단순 공정으로 쉽게 생각했다.
막상 해보니 나만의 착각이었고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상황이 돌출하여 괜히 수주했다는 후회와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고품질을 요구하는 발주처의 완강한 주장에 시공이 끝난 부분을 깨내고 다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기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면한 문제에서 대안을 찾아 가는 것이 ‘쟁이’의 숙명이다. 장마 속에 험난한 토목공사도 했는데 이런 미장 일 하나 해결 못해서 어찌 쟁이라 할 수 있을까? 후일에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데 기여했다고 평가 받아야 한다. 기술입국(技術立國) 사업보국(事業保國)이란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직업이 바로 기술자이다. 물론 기업의 책임자로 경영자들도 있지만 일부 소수이고 현장에서 피땀을 흘리면 일한 산업역군이 바로 우리 쟁이고 공돌이다. 한강의 기적과 굴지의 삼성전자를 만들고 최빈국에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게 하였다. ‘쟁이’들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안되면 되게 하는 도전정신이 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쌓은 노하우와 불굴의 정신력이 있기에 지금 인도네시아는 ‘쟁이’를 필요로 하는가 보다. 조기 은퇴가 대세인 요즘 적도의 땅에서 인생 2막을 펼치도록 만든 나의 전공을 어찌 아니 예찬할까? 오늘 아침도 아내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며 “쟁이”의 축복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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