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85) 맑은 슬픔 / 공광규 시인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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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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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85 (한국문단 특별 기고) >
맑은 슬픔
공광규 / 시인
맑은 슬픔이라는 말이 가능할까?
시골에 혼자 사시던 어머니가 지금은 내가 사는 일산에 올라와 병원에 다니고 있다. 어머니는 아프신 이후로 음식을 많이 드시지 못하기 때문에 몸이 마르고 기운이 없다.
며칠 전 어머니께 운동을 겸해, 가까운 상가에 큰 식료품점이 문을 열었으니 먹을 것이 있는지 가 보자고 제안을 했다. 어머니는 얼른 따라나섰다. 인도를 걸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함께 걸어 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아서인지 보폭과 보행 속도가 맞지 않았다. 나는 몇 발짝 앞서 가다가 어머니와의 사이가 많이 벌어지면 서서 기다리고, 또 앞서 가다가 기다렸다. 어머니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힘겹게 따라왔다.
어머니는 야채, 과일, 과자, 고기, 생선 등 다양하고 싱싱한 식료품 잔뜩 쌓여 있는 매장 안을 몇 바퀴나 둘러보기만 했다. 왜 안 사느냐고 했더니,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큰 식품점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어머니는 막과자가 안 보인다고 했다. 종업원에게 물으니 막과자 같은 것은 안 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다른 것을 사려고 이곳저곳 식품 진열장 앞에 쪼그려 앉아 물건을 집었다 놨다 하며 한참 고민을 하셨다. 그러더니 식료품점을 나오기 직전 칼국수 사리 한 봉지와 알사탕 한 봉지를 얼른 집어 들었다. 그 큰 매장에서 한참 동안 고민하다 산 것이 겨우 칼국수 사리와 알사탕인 것이다. 식료품점을 나오자마자 어머니는 떡 파는 곳을 찾았다. 길가에 있는 떡집은 문이 닫혀 있었다. 큰 가게에 딸린 다른 떡집에 갔더니 거기도 문이 닫혀 있었다. 다행히 그 큰 가게에서는 막과자를 팔고 있었는데, 찾는 사람이 없어 과자봉지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떡을 사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막과자 봉지를 들고, 나는 칼국수 사리와 알사탕 봉지를 들고 신호등 하나를 건너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막과자를 산 가게 승강기 앞에서, 신호등 앞에서, 그리고 인도에서 막과자 봉지를 들고 쪼그려 앉아 쉬었다. 기운이 없다고만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일어날 때까지 우두커니 옆에 서서 기다렸다. 괜찮으시냐고 묻기도 하고. 어머니가 겨우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하면 나는 옆에서 보폭을 맞추어가며 걸음을 옮겼다. 같이 보폭을 맞추며 걸으니 어머니와 처음으로 일체가 된 느낌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겨울 하늘 별들이 찬바람에 맑게 닦여 빛나고 있었다.
나의 「별국」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가난한 시절을 회상하며 쓴 어머니와 나의 추억이 지극히 서로 섞여 든 이야기이다.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졸시, 「별국」전문
‘멀덕국’은 내 고향인 충청도 청양 지역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건더기가 없는 멀건 국을 말한다.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건더기(고기)를 많이 넣고 국을 끓일 수 있었겠는가.
중학교 때였다. 학교 도서실에서 늦게 돌아오면 한밤중에 마루에서 어머니의 밥상을 받아먹기 일쑤였다. 국이 나오는데, 건더기보다 국물이 풍덩거릴 정도로 많으니 국그릇 속에 별이 비치는 것은 당연하다. 숟가락으로 맑은 국물을 뜨면, 별 수제비처럼 숟가락 위에도 얹힌다. 달이 뜨는 날 밤이면 국그릇 속에도 달이 뜬다. 그 큰 달을 건져 먹으면 정말 배가 부를 것 같았다. 건더기를 찾아 숟가락을 부지런히 휘젓다 보면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면서 맑은 소리를 낸다. 건더기가 적을수록 더 맑게 들리는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어머니는 고깃덩이를 찾느라 자식 놈이 휘젓는 국그릇에서 맑은 소리가 날수록 더 슬펐을 것이다. 어머니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마침 별빛을 반사하여 또 얼마나 맑은 슬픔을 주었겠는가. 내가 어렸을 때, 5일장이 서면 어머니는 걸음이 느린 나를 앞세우고 시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막과자를 사 주셨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아파서 걸음이 느린 어머니에게 막과자 봉지를 사서 들리고 집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에 슬픔이 밀려왔다.
눈물 글썽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눈물에 굴절되어 들어오는 겨울 별빛을 바라보다가, 맑은 슬픔이라는 말을 생각해냈다. (공광규 산문집 『맑은 슬픔』 중에서)*
*공광규 / 시인
1960년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충남 청양에서 성장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문학박사)
1986년 월간《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말똥 한 덩이』『담장을 허물다』『파주에게』와 시선집 『얼굴반찬』, 인도네시아어 번역시집 『Pesan Sang Mentari 햇살의 말씀』이 있음. 윤동주상문학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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