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에센스 아파트와 단풍나무들 / 엄재석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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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32) 에센스 아파트와 단풍나무들 / 엄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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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162회 작성일 2018-12-0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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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32 >

에센스 아파트와 단풍나무들

엄재석/한국문인협회 인니지부 회원
 
 
간밤에 내린 비 탓인지 베란다 창문 밖으로 멀리 살락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난 몇 달 동안 흐린 시계 탓으로 자취를 감추더니 이제야 그 자태를 보여준다. 이 얼마만인가? 간만의 살락산이 반갑기만 하다. 해발 2,700미터의 높이의 휴화산으로 자카르타 시민들에게 어머님의 품 같이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산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 19층에서 멀리는 살락산을 가까이는 남부 자카르타의 풍경을 바라본다. 눈 아래에 펼쳐진 단층집의 붉은색 기와 지붕과 틈틈이 있는 열대야자수 푸른색의 나뭇잎이 조화를 이룬다. 아파트 숲으로 이뤄진 서울의 삭막함과 대조되어 이곳의 단층집들은 넉넉한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인도양의 석양이 만들어 줄 황홀한 적도의 노을을 내심 기대하면서 출근길을 나선다.
 
토요일 아침의 아파트 로비는 한적하기만 하다. 평일의 출근시간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차량들이 로비 앞에 가득한데 이곳도 주 5일제 근무를 하는 직장들이 많은지 오늘은 조용하다. 나 홀로 로비를 나서다 보니 억울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곧 바로 ‘이 시대 이 나이에 토요일에 출근하는 것도 복이야’ 하며 자위한다. 얼마 가지 않아서 묶어 놓은 배추 형상의 호수가 있고 그 옆의 잔디밭에는 유모차 아기들이 따스한 남국의 풍광을 즐기고 있다. 아기들을 돌보는 유모들에게 물어보니 한국, 인도네시아, 일본, 서양 아기들로 구성된 다국적 아기 군단이란다. 이들을 따라다니며 먹이를 찾는 새끼 고양이들을 뒤로 하니 호수의 북쪽 끝자락에는 단풍나무(?)가 나를 기다린다.
 
 
상하의 열대 나라인 인도네시아에 무슨 단풍나무가 있으랴 마는 우리 아파트만은 예외다. 호숫가에 2그루의 나무가 건기에는 잎사귀도 별로 없더니 우기가 시작되자 단풍 색을 드러낸다.오랫동안 단풍을 보지 못한 내 마음을 어찌 알았을까 할 정도로 순간 착각을 하였다. 다른 야자수와 달리 이들에게만 푸른 나뭇잎과 함께 붉은 색의 선혈 같은 꽃들이 만개하였다. 멀리서 보면 완전히 우리나라의 단풍나무다. 만일 푸른 잎사귀만 없다면 붉은 색 단풍과 닮은 꽃 무리다. 

매일 떨어지는 꽃잎을 치우는 청소부에게 물어 보아도 나무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내 스스로 작명하였다. 인도네시아 단풍나무라고……열대지방인 인도네시아에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겨울 들판에 내리는 흰 눈과 가을 산자락을 불태우는 단풍이다. 우리나라 서정시인 김영랑의 대표작인 ‘오 메 단풍 들겠네’ 라는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풍은 계절변화의 전령사이다. 열정의 여름 더위를 지나고 이제 겨울을 준비하기 위하여 푸른 나뭇잎이 각양각색으로 바뀌면서 온 산하가 마치 불타는 향연을 연출한다. 꽃 소식은 남쪽에서 북으로 올라오지만 단풍은 북에서 남으로, 산 정상에서 아래로 시차를 두고 내려온다.
 
단풍에 대한 느낌은 세대마다 다르다. 어린 소녀에게 단풍잎은 백마를 타고 올 미래의 왕자님이지만 나이든 처녀에게는 한 해가 그냥 가는데 따른 외로움을 더하게 만든다. 장년의 남자들 특히나 퇴직자들은 자신을 단풍잎에 비유하곤 한다.  아내의 신발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낙엽과 같은 신세라고……게다가 쓰레기 통 속에 버려진 낙엽은 노년에게는 인생종말의 서글픔을 맛보게 만든다. 
 
 
추운 겨울에 생존을 위하여 함께 하던 잎을 떨쳐내기 위한 준비작업이 바로 단풍이다. 혹독한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에 새잎을 내기 위한 나무들이 선택한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낙엽으로 떨어지기 위한 몸부림인 단풍이 되어 우리나라의 산하를 금수강산으로 만든다. 금강산과 설악산도 유명하지만 내장산의 낙엽은 고운 색상으로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서울에 있는 우리 아파트에도 가을이 깊어지면 은행나무에 단풍이 만개한다. 온통 노란색 물결이 아파트를 감싸고 있다 끝내 보도 블록 위로 떨어진다.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시심에 빠져 보지만 이를 치우는 청소부를 보면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나오기 직전 만추에 걸어본 남산 길에 단풍이 만든 형형색색의 수채화는 지금도 아련히 남아 있다. 그 때의 남산 길 단풍을 연상케 하는 에센스 아파트 단지 내에 단풍나무(?)들이 반가웠다. 실제로는 나무 위에 핀 빨간색 꽃들의 군집이지만 내 눈에는 단풍으로 보인다. 겨울이 없는 인도네시아 나무들은 월동준비가 필요 없으니 항상 푸르름만 유지하고 있다. 유독 내가 사는 에센스 아파트에만 단풍나무가 있다니…. 아쉽다면 파란색의 나뭇잎이 붉은색 꽃들과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어찌하랴, 이곳 인도네시아에는 파란색 단풍도 있다고 이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빨간 꽃잎들도 낙엽처럼 떨어지기에 여러 위치와 각도에서 핸드폰 사진으로 담으며 아파트 정문으로 향한다.
 
 
고대 로마의 성문 입구처럼 조형물을 만든 아파트 정문을 나서며 아파트를 뒤돌아본다. 도심이지만 자연녹지 속에 30여 층 높이의 건물 3개 동이 평온하게 자리 잡고 있다. 비록 월세지만 그동안 살다 보니 이제는 한국의 본가 보다 더 정이 가는 아파트다. 방 2개의 작은 평수로써 아이들이 없는 부부 둘이서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다만 인근 회교 사원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새벽에 들리는 기도 소리 때문에 베란다 창문을 꼭 닫고 자야 하지만……

2년 전 아내가 인도네시아로 나올 때 아파트를 찾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쥐와 바퀴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내는 단독주택보다는 아파트를 원했다. 직장 인근에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가 몇 개 있었다. 우선 쇼핑몰과 함께 있는 끄망빌리지와 발리풍의 건축양식으로 설계된 낀따마니 아파트가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에센스 아파트를 주저 없이 보금자리로 정했다. 풍부한 자연녹지와 단지 내에 호수와 조용한 산책로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직장도 가까워서 아침 출근에는 차량을 타기 보다는 걸어서 출근한다. 주위에 한인마트와 몰이 있어서 쇼핑도 쉽고 주일마다 다니는 교회도 지근 거리에 있다. 운동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 여가시간에 함께 걷기가 즐거움 중에 즐거움이다. 물론 수영장과 Gym이 있지만 호수를 끼고 있는 잔디밭과 산책로를 주로 걷는다. 입주한 다음 날부터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저녁 호숫가를 돌고 돌았다. 아내도 다른 건 몰라도 아파트 하나는 잘 구했다며 임차연장 계약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정문 옆에 있는 공터에 골프 연습장이라도 세우면 금상첨화인데 하는 나만의 몽상을 하면서 위자야 센터 사무실로 향한다. 오늘도 퇴근하면 아내랑 호숫가를 돌며 단풍을 노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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