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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91) 비와 고독 / 이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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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070회 작성일 2020-01-3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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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91 >
 
비와 고독
 
이태복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인도네시아의 계절은 두 계절,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우리네 하계가 인도네시아의 건기, 동계가 우기, 건기의 절정은 7월, 우기의 절정은 1월이다. 이것은 어떤 자료가 아니라 이곳에 사반세기를 살아오며 몸으로 경험하며 얻은 자료다. 1월 중순 어느 날의 늦은 오후, 살라띠가의 일기 중 일 년에 몇 번 있을 여느 날과 다른 기분이 다운되는 날씨다. 
 
"비 오려나 보다 빨래 걷어라."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며 관절염 통증을 호소하던 옛 어른들이 생각난다. '비가 오려나 보다' 나에게 살라띠가의 기상예보는 찌뿌둥한 감정으로 보도된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은 해발 3,142미터 머르바브산 능선으로 불타는 석양과 함께 내 마음도 기분 찢어지도록 불타야 할 시간에 하늘이 잔뜩 찌푸리자 우울증세가 나타났다. 어르신들이 관절염으로 기상예보를 한다지만 나는 우울한 분위기로 기상예보를 했다.
 
 
세월이 명의를 만들듯 이제 신체도 기상통증 예보를 하는 센스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때의 세월을 보내며 천기를 터득해 가고 있나보다. 기상을 감지하는 건 나이 들면 예민해지는 육신의 센서(sensor)라고 한다. 특히 기후통증은 의학적으로는 열대성 저기압이 몰려오는 장마철에 심하다고 하는데 주변 기압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몸 안의 관절 압력이 높아진다고 한다. 즉 기압 변화로 인해 관절이 미세하게 부어올라 척추 디스크나 류마티스 관절염, 강직성 척추염 등의 각종 만성 척추관절 질환을 앓아 온 사람에게 통증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비행기를 탔을 때도 일어나는데, 평소 관절염을 앓고 있던 환자들은 관절의 윤활유인 관절 액이 적고 붓기로 통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작은 기압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저기압뿐만 아니라 관절 주변 기온이 낮을 경우, 혈관 수축으로 인해 관절에 가는 혈액량이 감소하여 통증이 유발 될 수 있다. 따라서 비가 오는 날은 평소보다 기압과 온도가 낮기 때문에 관절 통증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내리기 전, 무릎이나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놀랍게도 통증을 호소한 뒤 실제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것을 ’기후통증‘ 이라고 한단다. 기후통증은 기원전 400년 전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기술된 것으로, 기상예보보다 관절염이나 허리통증 환자가 날씨를 잘 예측한다고 하여 현재까지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기후통증은 인간이 나이 들어 신체가 온전치 못할 때 더 잘 느껴지는 신체적 반응이다. 내게는 기후통증 대신 되는 기후우울증이 더 잘 반응 되나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비가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분이 다소 쳐지는 느낌과 함께 감정적으로 '멜랑꼴리' 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우울하다는 의미의 멜랑꼴리는 어원적으로는 그리스어 멜랑꼴리아(melankholla)다. 이 용어는 히포크라테스가 우울증의 원인으로 꼽는 흑색 담즙을 말한다. 히포크라테스는 피, 림프액, 황색담즙,  흑색담즙의 4가지 체액이 신체 구성요소라고 말하고 지배적인 체액에 따라서 사람의 성향이 결정된다고 한다. 특히 흑색담즙은 우수, 비애, 우울의 성향을 보이게 만든다. 비가 오면 외부기온이 낮아져 체감온도가 내려간다. 기분도 가라앉고 서늘한 기운도 느껴지는 만큼 정신을 깨워주는 카페인이 든 따뜻한 커피 한잔이 적절한 위로가 될 수 있다. 
 
지금 살라띠가는 장마철이다. 밤만 되면 어김없이 비가 쏟아진다. 비 오는 날은 나에게도 우울감이 증폭되었다. 나이 들면 쓸개 없이 살아야 하는데 오늘 기분이 꿀꿀한걸 보면 오늘따라 담즙이 많이 생산되었나보다. 이런 날에는 기다렸다는 듯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앞으로 점점 더 자주 찾아올지 모르니 대비 좀 해야겠다. 나이 들면 더 자주 찾아 올 것이다. 저녁 7시, 비가 후들 후들 오고 자주 놀러오던 이웃도 비 오는 날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우중에 비옷 입고 청승맞게 마실을 가기도 그렇다. 사실 비가 오면 ’농끄롱 농끄롱(자바어로 정담의 뜻을 지닌 노닥거리다)‘ 정담이 더 간절한데 말이다. 이때, 불쑥 불청객이 찾아왔다. 고독이란 자가 우울을 가득안고 찾아왔다. 잠시 그를 맞아 고독에 젖어 비위까지 맞추며 놀다보니 나도 모르게 고독에 젖어갔고 거저 주는 거라는 우울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우울의 백 그라운드는 어둠이었다. 그때, 문득 얼마 전 문협 사무국장 김재구 시인의 수필 "빛은 사랑이다" 를 읽고 댓글에 보냈던 살라띠가의 선샤인 사진이 머릿속에 강하게 떠올랐다. 아차! 정신이 들었다. 불청객을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마귀가 보낸걸 알았다.
 
고독이란 초면에 거절 할 손님이지만 내 오지랍과 우유부단함이 그런 걸 어쩌랴. 잠시 불청객과 짝짜꿍이 되어 정신없이 놀다보니 나도 모르게 고독하고 우울했다. 아니 이제 점점 슬퍼졌다. 쓸데없는 눈물파티가 열릴 판이다. 이럴 땐 노래가 제일이야. 갑자기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이 생각났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 주던 막연한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문득 "내가 왜 이러지?" 란 생각이 들었다. 불청객을 버려두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빗속을 달렸다. 잠시의 방황 중에 불청객과 함께 흘릴 뻔 했던 쓸데없는 눈시울에 비를 맞닥뜨리며 달렸다. 집을 나선 것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게 그런 사람은 애시 당초 없었다. 고독과 우울에 오염된 기분전환을 위함이었다. 이럴 때 갈 곳이 있다. 가게에 들렀다.
 
비가 오면 한국에서는 부침개를 해 먹는다. 연구원에 그 정도 재료는 있어 부침개를 해 먹고 싶지만 부침개 해 놓으면 막걸리가 생각나고 막걸리 생각에 혼자 있다고 불청객이 친구 해준다고 눌러 앉을지도 모른다. 인니 인들의 주전부리 ‘볼로 꾸꾸스(bolo kukus)’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불청객을 쫓아버리고 만든 것을 이웃과 나누기로 했다.
 
 
 
‘볼로 꾸꾸스’는 인니인들이 즐겨먹는 우리네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비교적 만들기 쉽고 실패율이 적은 간식 만들기다. 볼로 꾸꾸스 재료를 샀다. ‘밀가루, 설탕, 계란, 효소인 SP와 fermipan, 그리고 식용색소’를 샀다. 우유는 함께 사는 수마디 할아버지의 젖소에게서 바로 짠 생젖을 쓰기로 했다. 조금의 방황, 오토바이 드라이브가 끝나고 돌아오자 어느새 불한당 불청객은 내 마음을 조금 훔쳐 달아나고 없었다. 볼로 꾸꾸스를 만들었다. 평범한 건 싫다. 이왕 만드는 거 나의 끼를 발휘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컨셉은 수박 모양이었다. 그러는 두 시간 동안 비가 완전히 멎었다. 비 개인 뒤의 밤하늘엔 구름이 정신없이 밀려가고 높다란 두리안 나무 위로 별들이 초롱초롱했다. 만들어진 ‘볼로 꾸꾸스’를 수마디 할아버지 집에 자랑삼아 가지고 갔다. "와아! 짝짝짝!" 모두들 박수를 쳐 주었다.
 
자바인들은 부족해도 기분 좋도록 칭찬해 주는걸 알지만 그 박수 소리에 기분 업그레이드하고 스스로 맛은 물론 그 작품성에 대한 찬사라 생각하며 내 자신을 위로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제까지 내가 본 ‘볼로 꾸꾸스’ 중에 가장 멋있었다. 무엇보다 먹음직스러웠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는 우리네 속담이 생각났다. 비 오는 날 고독 좇아내기는 성공이었다. 고독은 창작으로 가기위해 즐기는 ‘조용한 호수’ 같다는 생각을 한다. 호수는 빠지면 늪이지만 즐기면 아름답다. 고로 고독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라는 것을 깨달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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