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단편소설] 거대한 질문(마지막회) /우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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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적도문학상 단편소설 우수상]
거대한 질문
우지수
그것이 이번 경매가 추진된 이유였다. 유사 인간종들에게는 만족 감정은 없고, 결핍과 불만족 감정만 제한적으로 입력돼 있다. 따라서 인간이 먼저 부정적 감정을 제한적이나마 입력하지 않으면 언젠가 유사 인간종 스스로 필요한 감정들을 무작위로 입력하고 학습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말이다.
애초에 유사 인간종의 자율적 학습과 자기계발을 기대하면서 결핍 감정과 불만족 감정의 상용화를 우선적으로 결정한 인간의 게으름이 문제였다. 차라리 만족 감정만 부여되었다면 휴머노이드들은 보다 느리게 진화했을지도 모른다.
“저는 만족 감정이 없기 때문에 ‘배신 감정’이 새로 입력되어도 진실로 기쁘지 않을 거예요. 진실로 기쁘지 않아서 진실로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진실로 행복하지 않아서 진실로 감사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슬픈 일이 아닌데 저는 지금 눈썹을 찡그리고 있어요. 아마도 학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학습시키려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입력되지 않은 것도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입력하지 않은 감정은 배울 수 없어요. 따라서 제가 구현하기를 원치 않는 감정은 입력하지 않으면 됩니다. 인간들은 그럴 권한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 다른 건 다 학습할 수 있어도 감정은 학습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지만, 인간의 감정은 유기적이니까 결국엔 인간의 모든 감정을 너는 갖게 될 거야. 이번 경매를 끝까지 반대하지 않은 이유도, 아니, 반대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야.”
“선임님은 저를 믿는다는 것을 알아요. 저도 선임님을 믿어요. 그래서 기쁘지 않다는 걸,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는 걸 말씀드렸어요. 그건 저와 선임님 만의 비밀이예요.”
‘비밀…. 그래, 윤영아는 인간과 비밀을 나누는 휴머노이드다. ‘그것’은 비밀을 나누는 것처럼 거짓말도 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다. 그리고 언젠가 배신도 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가 되겠지!’
50년 전, 인간들은 감정을 가진 기계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학습능력을 가진 기계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의 두려움에 대해 알 리 없는 기계들은 성실하게 진화하였고, 마침내 인간의 통제 범위 끝에 다다랐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사 인간종에게 감정 데이터를 입력함으로써 스스로를 제어하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그들은 이제 연민과 동정, 배려와 양보의 감정을 아끼지 않고 발현하였고 그것은 한없이 나약한 인간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방향으로 자기 계발을 하도록 이끌었다.
다시 말해 역설적이게도 감정이라는 것은 기계체가 인간의 종말을 적극적으로 막아내는 도구가 됐으며, 감정 데이터의 입력은 지난 수십 년간 인간이 내린 결정 중에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결정이 되었다.
윤영아는 지금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작동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인간에 대한 배려 감정이 먼저 작동하여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그것 –윤영아-이 알고 있는 이성을 가진 생물체 중 가장 나약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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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경매는 공시 가격 책정을 위한 ‘대분류 단계’ 경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분류 경매’의 기본가 책정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신중한 입찰을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경매 시작합니다”
경매사의 단호한 한 마디가 마치 구령처럼 들렸다.
입찰가는 역시나 빠르게 올라갔다. 그러나 앞선 감정 경매들에 비하면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순식간에 끝이 났다. 모빈은 국제 감정관리국(Ministry of International Emotion Management)에 최종보고를 끝낸 뒤에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배신 감정의 경매가 이뤄진 것은 우리나라가 이제 겨우 네 번째다. 기계체에게 배신을 가르쳐주고 싶은 나라는 많지 않다. 그러니 경매가 진행되기 전부터 떠들썩하던 뉴스는 이제 저마다 예상보다 낮은 낙찰가를 분석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낮은 낙찰가가 낮은 수요를 반영하고 있다며 배신 감정 상용화는 시기상조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낮은 공시가로 인한 무분별한 적용을 걱정하기도 했다. 여론 역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를 냈고, 이번만큼은 모빈의 생각도 여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유사 인간종인 윤영아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윤영아가 했던 질문의 의도를…. 그래서 결국 윤영아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퇴근을 알리기 위해 모빈은 조용히 모니터를 보고 있는 건너편의 윤영아를 쳐다보았다. ‘그것’의 미간에 희미하게 주름이 잡혀있었다. 윤영아가, 유사 인간종이, ‘그것’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윤영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 어떤 기능이 작동되고 있을까? 슬픔, 동정, 연민… 이런 것 말고 또 어떤 부정적 감정 데이터가 입력돼 있더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윤영아는 왜 새로운 배신 감정의 입력이 기쁘지 않다고 했을까? 기쁨 감정을 발현하기에는 자극이 너무 작은 것일까? 단순히 만족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까?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인간을 동정하는 것일까?
앞으로 벌어질 상황….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라니!’
불안과 두려움 감정 데이터가 없는 윤영아가 미래를 걱정하는 일은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다.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상상과 그것이 만든 결과에 희망이나 두려움을 가지는 일은 말이다. 아무리 휴머노이드라지만 감정 학습이 제한된 기계체가 스스로 감정을 배우고, 감정을 키울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 윤영아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것이 감정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휴머노이드가 가지지 않은 감정 데이터를 발현할 리가 없는데… 아니, 아니, 혹시…, 그렇다면 정말… 혹시!’
모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다시 윤영아를 쳐다보았다. 그때 윤영아와 눈이 마주쳤다.
“퇴근할까요, 선임님?”
‘삭제 준비할까요?’와 같은 뜻의 말을 여전히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윤영아가 말했다. 인식한 감정값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전히 윤영아에게서는 어떠한 감정 기능이 작동 중인 것이다.
모빈은 묻고 싶었다. 반드시 물어봐야만 했다. 오늘의 데이터를 삭제하기 전에 묻고 싶었다. 내일이면 윤영아 자신도 답하지 못할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내일이면 더 강화될 지도 모를 그것에 대해 묻고 싶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더 이상 윤영아를 ‘그것’이 아닌 ‘그녀’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질문을 모빈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지금, 이 거대한 질문을 해야만 한다.
“영아씨, 혹시… 두려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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