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단편소설] 나의 하얀 들창코(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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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얀 들창코
전현진(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2부]
그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이미 고모부의 질문 세례에서 벗어난 지 한참 뒤였다. 어린 시절이 지나가자 나는 고모부와 대화할 겨를도 없었다. 학교와 독서실을 오가느라 마주칠 일도 흔치 않았다. 그런데도 왜 그런 말에 흔들렸을까?
코가 예쁘다는 말에 그에게 반해 연애를 시작했다. 그가 정확히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너와 말할 때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아. 네게서 나는 향기가 좋아. 너는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는 남자의 진심 어린 말이었든, 꼬셔보려는 수작질이었든 상관없었다. 눈을 깜박이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씩 힘주어 말하던 그의 순간이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말 만은 또렷하다.
“코.가.예.뻐.”
그 뒤로 그와 비슷한 말이 없었던 걸 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 번 더 듣고 싶었지만, 아니었다고 대답할까 봐 묻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얼마 후 그와 헤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였는지 확인할 방법을 영영 잃었다.
이별을 추스를 새도 없이 새로운 프로젝트와 워크숍 준비에 투입됐다. 긴 프로젝트 기간이 끝나가며 진행된 2박 3일 일정의 워크숍은 순조로웠고, 다음 날 아침 해산식만 마무리하면 끝이었다. 선임 파트너와 몇몇 팀원들이 모닥불 앞에서 맥주 캔을 뜯으며 그간의 수고로움을 격려했다.
모닥불이 장작과 장작 사이를 쉬지 않고 삐져나와 열기를 퍼트렸다. 장작 끝에서 피어오른 파란 불꽃이 노랗게 일어서고, 나무가 진한 주황빛을 내며 빨갛게 익어갔다. 나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빗소리를 내며 장작을 허물어갔다. 반딧불이 같은 작은 불티가 연기를 타고 장작 밖으로 날아갔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포로로 하는 벌레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선임이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벌레를 쫓으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저었다. 목덜미가 드러나게 바르게 자른 뒷머리가 양쪽 볼로 부드럽게 쏟아졌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균형 잡힌 이목구비를 살짝 찡그렸다. 나는 선임이 연예인 L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선임은 후배들을 탓하거나 타인의 말을 옮기지 않았고,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했다. 본인의 개인사로 다른 이들을 귀찮게 하는 일도 없었다. 선임은 공정하고 신임받을 만한 말투와 행동으로 회사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녀의 행동 때문일까, 얼굴 때문일까? 선임은 안경을 벗어 무릎에 올려두고, 모닥불과 맥주로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쌌다. 화장이 거의 지워진 얼굴도 예뻤다.
모닥불 모임은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두서없는 각자의 이야기로 흘렀다. 술을 가져오거나 장작을 옮겨 온다는 핑계를 틈타 팀원들이 하나둘씩 방으로 들어갔다. 이야기는 끊어질 듯 이어졌고, 간간이 벌어졌다.
“선임님, 연예인 L 닮으셨어요.”
누군가의 말이 모닥불을 건너왔다.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네. 고마워.”
대화의 공백 사이에 연예인 얘기가 나왔고, 의미 없는 잡담 속에 성형 얘기도 나왔다. 선임은 그런 것을 안 해도 본인이 예쁘다는 말이 듣고 싶었겠지만, 나는 왠지 그렇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얼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툭 튀어나온 말에 제일 놀란 사람은 바로 나였다.
“저도 눈을 좀 키우고 코도 좀 올리면 어떨까 해요.”
선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선임도, 다른 팀원도 바라보지 못하고 모닥불만 쳐다보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취한 걸까?
“유미 씨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예쁜 얼굴인걸?”
선임이 곧게 뻗은 코를 가볍게 찡긋하며 대답했다. 선임이 듣고 싶어 했을 것이라 짐작했던 대답을 그녀가 나에게 들려주었다. 나의 무의식은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사그라드는 모닥불에서 헤어진 남자친구의 얼굴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뾰족했던 나무 끝이 둥글게 으스러지고 잿빛으로 그을리고 있었다. 용암이 굳어가듯 장작 속이 붉게 열을 내며 검게 탔다. 숯처럼 까만 덩이에서 파란 불꽃이 일기도 했다. 남아 있던 팀원들이 일어섰다. 나와 선임만 남았다.
잦아든 불길에서 빵 굽는 냄새가 났다. 선임이 다듬어진 장작 몇 덩이를 무심히 모닥불에 던졌다. 모닥불이 마른 장작을 달구고 불씨를 옮겨 화력을 높였다. 불길에서 타다닷하고 다시 빗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유미 씨처럼 이쁜 딸이 있었으면 좋겠네.”
그녀가 담담하게 던진 말에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동생도 아니고, 딸이라니.
그러나 곧, 나는 그녀가 젊음을 예뻐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나는 나이 듦이 젊음을 다 좋은 것으로 은폐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오랜만에 하는 술자리다. 그동안 프로젝트하고 워크숍까지 준비하느라 바빴잖아, 우리. 수고 많았어. 잘 따라와 줘서 고마워.”
불길이 번졌고, 밤의 서늘한 기운이 그늘 속으로 물러갔다. 나는 아까 성형 얘기를 할 때, 선임의 비위를 맞춰주지 못한 것이 좀 미안해졌다.
우리는 모닥불 앞에 앉아 불꽃이 올라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맥주가 미지근해졌다. 그녀는 얼음 통에 담겨 있던 새 맥주를 꺼냈다. 새 맥주 캔이 탁 소리를 내며 탄소를 내뿜었다. 나는 맥주를 건네받아 마시고, 목에서 가슴으로 찬 기운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유미 씨, 나 대학원 가려고. 사표 썼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입안의 맥주가 모닥불 안으로 뿜어졌다. 나는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공중으로 날아간 술을 혀로 핥았다.
“십일 년 됐거든, 결혼한 지. 그동안 아이 가지려고 인공수정도 하고 시험관도 했는데 잘 안되더라. 아예 안되더라고. 작년에 십 주년이라 딱 작년까지만 해보고 관두려고 했는데, 포기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올해까지 끌고 왔어. 근데 안 되는 건가 봐.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다 관두고 공부를 더 하기로 했어. 회사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싫어서 얘기 안 했는데 유미 씨한테 얘기하고 있네. 유미 씨, 정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그녀의 정기적인 연차 사용이 생각났다.
“유미 씨, 이쁘다. 일 잘하는 건 물론이고, 참 친절하고 상냥해. 나이도 너무 이쁠 때잖아. 오늘 이렇게 바지 입은 모습도 이쁘다. 매일 치마 입은 것만 보다가 오늘 보니 너무 이뻐.”
나에 대한 그녀의 감상과 맥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녀가 안경을 벗었을 때, 눈 밑에 있는 점을 봤기 때문이다.
그녀는 프로젝트가 끝나고 한 톨의 미련도 없다는 듯 퇴사했다. 나는 문득 그녀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그녀가 회사를 계속 다녔을지 궁금했다. 어쩐지 그녀는 아이를 빈집에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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