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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단편소설] 나의 하얀 들창코(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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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회 작성일 2024-12-22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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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얀 들창코


전현진(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3부]


가을이 지나고, 겨울바람이 봄바람으로 자랐다가 사그라들기를 두어 번, 다시 봄이었다.


“아니, 유미 씨, 이거 바꿔. 입사한 지가 언젠데 이걸 이렇게 하니? 유미 씨, 내가 한 말 이해를 못 하는 거야?”


“후-.”

한바탕 깨지고 나온 나는 화장실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들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식당으로 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차장은 다 잊어버리고 다른 말을 할 것이었다.


콧속에 스프레이 약을 뿌렸다. 환절기 비염으로 코가 괴로웠다. 차장이 했던 말들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기 전에 털어버렸다. 그런 말들을 사무실에 두고 나오는 법은 진즉에 깨우쳤다.


이제 나는 아이디어를 내고 제법 일의 성과를 보이는 직장인이었고, 동료들과도 괜찮은 관계를 맺고, 가끔 상사의 칭찬이나 질책을 듣는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그래도 이런 날은 선임이 생각났다.


송별회가 언제였더라. 나는 선임의 송별회에서 내가 그녀의 미모를 동경했고, 얼마간 시기했다는 것을 고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소리 내 웃었다. 이어 그런데 사실은 그녀의 예쁜 얼굴보다 그녀의 말투와 행동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음을, 그것이 그녀의 인기 비결이었음을 떨리는 목소리로 전했다. 


나는 완전히 술에 취하기 전에 그녀의 인기에는 미모보다 품행의 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며 주사를 부렸다. 나를 예뻐했다는 선임의 말에 하는 늦은 대답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초년생의 흑역사가 되었지만, 그 고백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녀와 좀 더 친해졌다.


그녀의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에 만났으니 그녀를 본 것도 벌써 반년 전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선임니임!”

“유미 씨, 잘 지내? 하하, 퇴사한 지가 언젠데 맨날 선임이래. 어떻게 지냈어?”

그녀의 포근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채웠다.


“잘 지내요. 선임님은요? 학교도 잘 다니시죠?”

“잘 지내. 그런데 학교는 관뒀어.”

“네? 박사까지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박사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생겨서.” 그녀가 웃음을 섞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나 임신했어. 이제 6개월이야. 조심스러워서 얘기도 못 했어.”

아마 그녀는 전화 건너편에서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웃고 있을 것이었다.


“선임님! 축하드려요. 진짜 진짜 축하드려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한 적이 언제였더라.


“출산하고 보자. 쌍둥이라 좀 일찍 낳을 거야. 아기들 낳으면 놀러 와. 딸이래. 자기처럼 이쁘면 좋겠다.”

“정말 축하드려요, 출산일이 언제예요?”

나는 손가락으로 개월 수를 가늠했다.


“6월 말이야. 쌍둥이라 미리 수술하거든. 유미 씨 만나고 싶은데 요즘 누워있어야 해서 나가지를 못해. 지금도 누워있어. 출산하고 아기들 보러 와주면 좋겠다.”

“꼭 갈게요. 꼭이요.”

누워있다는 말이 신경 쓰이지만, 지금은 축하만 해주고 싶었다.


“유미 씨 잘 지내는 거지?”

“네, 정말요. 잘 지내요. 오늘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요.”

“어머, 배는 내가 불렀지! 하하, 지금 딱 점심시간이잖아. 어서 가서 밥 먹어. 우리 곧 보자.”


서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통화하는 사이에 동료들이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복도를 달리는 발걸음이 사뿐사뿐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를 껴안았다. 묶인 머리 아래에 드러난 목덜미가 하얬다. 그녀가 품이 커다란 면티와 무릎이 나온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씩 웃었다. 섬유유연제의 베이비파우더 향이 은은했다.


“얼마 만이야. 와줘서 고마워.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

선임이 내 손을 잡고 집안으로 이끈다.


“힘들긴요, 전혀요. 보고 싶었어요.”

“엄마, 아버지! 손님이 왔어요.”


선임의 어머니는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아버지는 누워있는 아기를 얼렀다. 아기 돌보기를 돕는 도우미 이모는 아기들의 작은 옷을 개고 있었다. 선임을 닮은 눈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선영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선임의 어머니가 다가와 내 두 손을 맞잡았다.


“손님이 오셨네! 쌍둥이는 우리가 보고 있을 테니 편히 대화 나누렴.”


아버지가 아기에게 나의 등장을 알리고 일어나 인사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볕을 담은 바람이 커튼 자락을 살랑였다. 아버지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도 바람이 불었다. 어머니는 포대기를 풀러 아기를 눕혔다. 아기들은 가운데 지퍼가 달린 나비처럼 생긴 옷을 입고 거실 매트 위의 이부자리에 등을 댔다. 


나는 손을 씻고 아기들 멀찍이 앉았다. 쌍둥이가 서로 바라보고 누워 작은 손을 뻗었다. 아기들이 맞장구를 치듯 옹알이를 주고받았다. 선임이 아기들의 옷에서 지퍼를 내리고 손과 발을 바깥에 내어두었다. 허공에 손을 휘젓는 아기의 손가락이 생각했던 것보다 길었다.


“괜찮아, 가까이 앉아.”

나는 아이들을 눕힌 작은 이부자리 곁을 무릎으로 걸어 다가갔다. 아, 두 아기의 콧구멍들이 조신하지 않았다.


“아, 애기네요. 애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사실만 연거푸 확인했다.


아기가 보석같이 빛나는 까만 눈동자로 낯선 이를 바라봤다. 쌍둥이들이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고 쫀득한 볼살을 뽐냈다. 둘이서 나누던 옹알이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아기의 발가락에 살며시 대었다. 강낭콩과 완두콩 크기만 한 작은 발가락들이었다. 보드라운 아기 피부에서 비릿한 아기 향이 났다. 안경 속 선임의 눈은 애정으로 가득 차서 꿀단지가 따로 없었다. 손가락을 아기 손에 갖다 댔다. 작은 주먹이 손가락을 쥐고 잡아당겼다.


“안아볼래?”

“제가 안아봐도 돼요?”

“그럼. 이렇게 안으면 돼.”


하얀 피부 아래 단단한 뼈가 관절을 따라 버둥거렸다. 통통한 살이 접혀 팔목과 발목에는 실선이 그어졌다. 아기는 눈을 느리게 끔뻑이고, 입으로 무엇을 찾는 듯 오물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옹알이보다 크게 까르르 소리를 냈다. 사과처럼 딱딱했던 심장이 말랑하게 두근거렸다. 목구멍에 막혀있던 무엇이 덩이째로 밀려 올라와 놀랐다. 조신하지 못한 콧구멍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의 찬사는 필요없다.

어림은 젊음이 보아도 너무나 아름답다. 나직이 속삭인다.


“어머나, 진짜 애기구나. 애기!”


선임은 목덜미에서 까만 고무줄로 묶은 머리를 내보이며 웃었다. 외출하기가 어려워 집으로 부른 것이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손을 잡았다. 대화 중에도 선임은 여러 번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나도 아기들 쪽으로 자주 몸을 돌렸다. 저녁에는 남편까지 어른 다섯 명이 눈코 뜰 새가 없다고 또 웃었다. 고단해 보이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두 감정이 한 번에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게 낯설었다.


온전히 사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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