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후기] 배동선 작가의 "차원의 문을 열고 영웅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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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프로그램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8-11-20 16:54 조회 7,873 댓글 0본문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차원의 문을 열고 영웅들을 만나다.
글/ 헤리티지 박송숙
2018년 11월 2일, 아주 오래간만에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소사이어티(IHS) 코리안섹션에서 교양강좌가 열렸다. 화제의 신작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쓴 배동선 작가님의 강연이니, 주제를 봐도 강사를 봐도 놓칠 수는 강의였다. 금요일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스나얀 헤리티지 도서관에 도착했다.
작가님이 이 책을 쓴 계기는 제목에 들어간 인물 ‘수카르노’가 메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날마다 달리는 수많은 거리의 이름은 어디에서 온것인지, 그 유래의 배경은 어떤 것인지, 어떤 인물과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궁금증은 나와 작가님이 비슷했을텐데, 이렇게 훌륭한 걸작이 결과물로 나왔다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와 일반인의 차이일 것이다.
그럼, 오늘의 강사 배동선 작가는 어떤 분인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1999년에 딴지일보 인도네시아 특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같은 보직을 맡고 있다고 한다. 강사님은 스트레스를 밤을 지세워 글을 쓰며 푸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와, 세상에 이런 분도 있구나!
강사님이 잠시 소개한 고인 최계월 회장은 2005년 11월 28일 타계하신 한국남방개발(현지 법인명 코데코)의 창업자인데, 별명이 ‘칼리만탄의 왕’이었고, 1995년 수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던 기념비적인 한국인 사업가였다. 그런데, 한국의 신문사 중 몇군데에서 이 분의 부고를 실으며, 내용도 엉뚱한 심지어 사진도 다른 이의 것을 실은 것을 보고, 작가님은 작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언론이 인도네시아를 대하는 태도는, 10년이 지난 기사를 지금까지도 정정하지 않고, 아니면 말고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강사님의 의견이며,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꾸준히 인도네시아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인도네시아 문화와 역사에 애정과 관심이 있는 편이지만, 작가님의 열정, 전문성, 투자한 시간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기 어려운 정도이다. 자, 숨죽이고 강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
독특한 몇가지 도로명의 유래를 맛보기로 살펴볼까.
하얌우룩/가자마다 거리는 한 도로의 상행선과 하행선에 각각의 이름이 명명된 곳이다. 그 이유는 ‘마자빠힛(13~16세기)’ 왕국은 4대 ‘하얌우룩’ 왕 시절이 최고의 전성기였고, 당시 가장 유능한 재상이 ‘가자마다’였는데, 이 마자빠힛 왕국이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꼽히는 이유는, 현재의 인도네시아 국토는 물론, 말레이반도와 필리핀 일부까지 그 영토를 확장했던 저력 때문이다. 이런 강력한 왕국의 주군이었던 하얌우룩 왕과 가자마다 재상이 함께 활동한 기간은 9년여 뿐이었으나, 아마도 최고의 왕과 최고의 재상, 둘의 만남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란히 이 둘의 이름을 도로에 붙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겠다.
‘반둥 불바다 사건(Lautan Api Bandung)’에서 따온 ‘모.또하’ 거리에 대한 대한 유래도 강사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네덜란드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1945년 10월 영국과 함께 연합군의 이름으로 침략을 한다. 1945년 11월, 연합군과 대치하던 인도네시아인들 간의 1차 충돌이 있었고, 1946년 3월 연합군이 반둥 북부를 점령하며 인도네시아 군에게 반둥을 떠나라는 최후 통첩을 날린다. 이때 인도네시아 인민전선(BRI)의 ‘모하마드 또하’와 ‘모하마드 람단’이 연합군의 무기고를 폭파하는 결단을 내렸고, 이 둘은 그 자리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과 함께 도시의 절반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는데, 이들의 희생과 용맹함을 기리기기 위해 반둥에 모.또하 거리가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관련한 사설을 한가지 추가하면, 실은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의 독립 선언은 일본군이 아직 서슬퍼렇게 주둔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카르노와 하타의 용감한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들의 독립 선언 행위는 한인들 사이에 야사처럼 퍼진 것보다, 나름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진행한 영웅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의 세번째 부인 ‘빠뜨마와띠’는 우리에게 익숙한 빠뜨마와띠 거리 및 병원 이름의 주인공이다. 수카르토의 여성 편력은 아주 유명하고 긴 이야기이나, 이 시간을 그것으로만 채울 수 없으니 오늘은 가볍게 패스하고, 본격적으로 위자야 사거리 길 이름들의 주인공을 만나볼까.
첫번째 위자야 사거리 길 이름의 주인공인 ‘라덴 위자야’는 앞서서도 언급되었던 마자빠힛 왕국의 시조이다. 즉, 13세기 말경, 싱아사리 왕조의 끄르따느가라 왕의 양자 라덴 위자야는 양 아버지가 몽골 쿠빌라이칸의 침략에 맞서다가, 끄디리 왕국의 모반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라덴 위자야 왕자는 마두라로 잠시 피신했다가, 스스로 몽골군의 앞잡이가 되어 끄디리 왕국을 멸망시키고, 승전 축하 파티에서 몽골군 장수를 모두 해치우는 반전 끝에 건국한 나라가 바로 ‘마자빠힛’ 왕국이었다. 그의 용맹함과 결단력을 기리기 위한 길이 바로 위자야 거리되겠다.
두번째, 그로부터 250여년 후, 위자야 사거리에서 만나는 길 이름의 두번째 주인공이 태어나는데 그가 바로 바구스 수루붓, 훗날 빠장 왕국을 무너뜨리고, 고대 마따람 왕국의 시조가 되는 ‘스노빠띠(수따 위자야)’이다. 그와 관련된 신화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족 자카르타 남부 지금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빠랑뜨리띠스 해변에서 만난 바다의 여왕 니로로끼둘과의 영적 결혼을 통해 건국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인데, 인도네시아인 중에 이 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니로로끼둘은 위대한 권능과 막강한 군대를 가진 최고의 여신인데, 스노빠띠에게 ‘우리 신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내가 너와 후손들을 도우마’ 약속하고, 그의 영적인 부인이자, 고대 마따람 왕국 후손들의 모든 영적인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민중 독립 운동의 영웅이자 하멩꾸부워노 3세의 아들 디포네고로, 수카르노, 수하르토 등 내로라하는 영웅들이 니로로끼둘을 만났다는 전설이나 소문은 이들이 마따람 왕국의 후예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니로로끼둘은 본인의 옷색깔과 동일한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을 잡아간다는 전설이 있으니, 빠랑뜨리띠스 해변에 방문할때 우리 아름다운 한인 여성들은 초록색 옷을 삼가하자.
세번째, 주인공은 바로 ‘월떠르 몽인시디’이다. 그는 일본어 교사 출신의 술라웨시 독립투사였는데, 1946년경 동료들과 함께 시민 저항군을 조직해 네덜란드군에 처절하게 맞서 싸운다. 투쟁 중에 생포되었다가 탈출하고, 다시 체포된 후에는 이중간첩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1949년 9월에 처형당하고 만다. 8월부터 인니와 네덜란드간 독립 협정이 진행되었고, 국가 주권을 이양받기 불과 3개월전에 처형당한, 24세의 청춘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마지막, 네번째 주인공은 ‘삐에르 뗀데안’ 중위였다. 뗀데안과 관련된 9.30 쿠데타에 대해서는 전에 한번 다른 분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여러 등장 인물들에 대한 내 기억력에 한계가 있었고, 정치적 속 사정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날 강사님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다니 행운이었다. 귀를 쫑긋하고 들어보자.
9.30 쿠데타는, 멘뗑 근처에 거주하던 대통령 경호 부대 고위급 장교들의 집을 새벽에 짜끄라비라와 부대 소속 병사들이 방문(습격)하여, 대통령이 호출한다는 거짓 명령으로 경호 부대 장군들을 호송하려 했던 것이 시초였다. 그 과정에서 야미 육군 사령관은 옷을 갈아 입으면서 문 뒤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는데, 당시의 야미 장군의 자택은 박물관으로 꾸며지고, 총을 맞아 쓰러진 흔적도 그대로 남겨져 있다고 한다. 특히, 이 인물은 인니 근현대사 독립 전쟁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이며, 특히 PRRI(수마트라 지역의 반란) 진압군 총 사령관이기도 했다. 당시 육군 최고의 사령관이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고만 것이다.
빤다이딴 준장도 체포 과정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고, 엔떼 하리요노 소장(하리요노 도로의 주인공)은 맨손 싸움 중 왼쪽 어깨에 대검을 맞고도 계속 싸우다가 결국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했다.
나수띠온 사령관의 저택으로 들어간 반군은 혼자 담을 넘어 바로 옆 이라크 대사관저로 도망가는 나수띠온을 놓치는데, 대신 나수띠온의 막내딸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다. 만약 나수띠온이 이때 사망했다면, 쿠데타는 성공해서 인니가 공산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때 마침, 소란함에 권총을 들고 뛰어 나온 뗀데안 중위가 나수띠온 장군으로 오해받아 대신 잡혀갔고, 뗀데안 중위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이 된다.
한편, 뗀데안 중위를 포함, 수프라또 소장, 수또요 준장, 베스따마 소장 등은 체포되어 지금의 할림 공항 근처 공군 기지, 즉, 당시 반군 소굴 루방부아야로 끌려가서 각종 고문과 함께 전향서를 강요받았으나, 아무도 응하지 않고 모두 고문 끝에 사망하고 만다.
이틀 여후, 반란을 진압한 수하르토가 반군 소굴 폐우물에 버려진 7구의 시체를 수거하는 처참한 일이 벌어졌고, 이들의 장례식에서 수카르노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 9.30 쿠데타는 공산당과 함께 수카르노가 연관된 일이라 믿어지고 있다. 즉, 수카르노 입장에서 군대 수뇌부들이 자신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농민들을 제 5의 군대로 무장시키겠다는 의지와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으며, 실제 중국으로부터 소총 수십만점을 수입하려던 시기였던 것이다.
뚜구 따니에 총을 맨 농민의 아들 아래에서 바구니의 음식을 주는 어머니의 상은 당시 수카르노의 공산 농민 부대 사상의 이미지와 딱 떨어지는 동상이라 철거 여부가 아직도 왈가 왈부 중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나는 길에 동상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어찌되었든, 당시 수카르노는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고, 당시 수하르토가 9.30 쿠데타의 진압 대장이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수카르노의 권력이 점점 쇠하여져서 결국 1967년 수하르토에 밀려 하야하고 만다.
작가님은 라덴 위자야(13세기말), 세노빠띠(16세기), 몽인시디(1940년대), 뗀데안(1960년대)의 영혼들이 우리가 자주 지나다니는 위자야 사거리에서 만나는 것을 상상해 보았고, 700년간의 역사 흐름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상대의 공을 치하하는 시간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온 책이 바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라고 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강사님이 수년간 연구하신 인도네시아 역사의 일부를 단 두어시간만에 요약해서 들을 수 있었다. 소중한 지식과 본인의 역사관을 한인 사회에 아낌없이 공유해 주신 강사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런 분이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오래 계셔 주었으면 하고 바래 본다. 그리고, 본 강좌 개설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해 주신 헤리티지 코리안섹션의 김상태 코체어 님, 김혜정 코체어 님께도 따뜻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본다.
작가님이 강의 말미에 남기신 말을 옮기며, 이 글을 마친다.
“ 인도네시아는 우리가 아는 만큼만 우리에게 문을 열어줄 것이다”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소개
* 국립박물관 한국어 무료 해설: 매월 셋째주 토요일 오전 9:30~11:00
* 신청: 헤리티지 코리안섹션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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