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수십년간 ‘육해공 원조’…아세안 경제에 고삐를 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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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자카르타는 태국 방콕과 함께 동남아에서 교통체증으로 악명이 높은 도시 중 하나다.
이 때문에 많은 택시가 미터기를 끈 채 달리고, 타기 전에 요금을 협상해야 한다. 차를 타는 것보다 차라리 걷는 게 빠른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 ‘교통지옥’과 다름없는 자카르타 시내 도로를 점령한 것들은 도요타, 다이하쓰, 혼다 등의 일본 자동차들. 28일 인도네시아 차량사업연합(GAIKINDO)과 일본자동차 제조협회(JAMA)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자동차의 인도네시아 시장 점유율은 98.5%에 이른다. 이는 일본 자동차의 안방인 자국 시장 점유율(94%)보다 높은 수치이다.
대표적 소비재인 자동차 산업에서 일본 자동차가 앞마당처럼 누비고 있는 곳은 인도네시아뿐만이 아니다.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주요국 시장에서도 일본 차는 70~80%를 점령하고 있고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에서도 약진 중이다. 코트라 자카르타 무역관 관계자는 “일본이 닦은 도로 위로 일본 차들이 달리고, 그 차들로 길이 막히니 이제 일본은 경전철 등 대중교통을 놓고 있다”라며 “경전철이 완공되면 일본에 대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재부터 인프라까지 장악
이들 지역의 주요 도로와 교량, 공항, 항만 등 해당국의 각종 기간 산업의 바탕이 되는 인프라로 눈을 돌리면 아세안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더욱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인도차이나반도를 가로지르는 경제회랑(回廊ㆍcorridor)을 구축, 자국 기업들의 아세안 진출을 지원하고 있다. 여기서 ‘회랑’은 항만, 공단 등 주요 경제권을 잇는 물류망을 의미한다.
일본은 베트남 중부 항구도시 다낭으로부터 서쪽인 라오스 국경으로 향하는 하이반 터널, 라오스 사바나켓에서 태국으로 넘어가는 제2메콩국제대교 건설을 통해 미얀마 항구도시 모울메인까지 닿는 동서경제회랑을 만들어 놓은 상태다. 특히 지난 2015년 프놈펜 인근 메콩강을 가로지르는 니크 로엉 대교를 일본이 지어줌으로써 남부경제회랑은 활기를 띠고 있다. 박번순 고려대 경제통계학부 교수는 “이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국제노선 버스가 페리를 타고 메콩강을 건너야 했다”라며 “일본은 상징적인 프로젝트를 발굴,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했다.
특히 일본은 인도차이나반도의 육로뿐만 아니라 섬 국가들이 많은 아세안의 특성을 감안해 해양ㆍ항공로 연계를 위한 공항, 항만 등의 인프라 구축에도 힘을 쏟고 있다. 주아세안 일본 대표부에 따르면 일본은 베트남 호찌민 떤션넛공항, 인도네시아 수라바야공항 등 9개의 공항과 베트남 다낭, 말레이시아 켈랑항 등 20여개의 항구를 건설했다. 통사이 사야퐁캄디 라오스 사바나켓 경제특구청장은 “일본 덕분에 고립국에서 연결국이 됐다”고 말했다. 라오스는 아세안 국가 중 유일하게 바다를 끼지 않고 있는 나라다.
40년 전 아세안과 본격적인 관계 구축
일본 기업의 공식적인 1호 아세안 투자는 1959년 일본 마쓰시다 전기의 태국 건전지 회사 설립이지만 아세안 지역 진출 역사는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 중부 다낭 인근 유네스코문화 도시 호이안에는 일본인 마을이 있고, 1920년대에 이미 일본의 유흥업소들이 동남아에서 성황을 이뤘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의 본격적인 아세안 진출은 1977년 후쿠다 다케오 총리의 이른바 ‘후쿠다 독트린’ 이후다. 앞서 74년 후쿠다 총리가 일본의 고도성장에 맞춰 동남아를 돌며 자원외교를 펼쳤는데,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상품이 동남아를 휩쓸고 있던 상황에서 또다시 자원까지 차지하겠다고 나서자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반일(反日) 폭동이 일어난 것. 자카르타에서 도요타 자동차를 생산하는 아스트라 본사가 불에 탔고, 일본 기업과 정부는 대아세안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태국 총리가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본제품을 소비한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후쿠다 독트린의 내용은 ▦군사대국화 포기 ▦일본-아세안간 신뢰구축 ▦상호이해에 기초한 평등 관계 양성 등으로 요약된다. 박 교수는 “말라카 해협을 끼고 있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은 중동으로부터 석유 등 원자재를 조달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고, 따라서 일본은 해당 지역의 정치적 안정 유지를 통해 이 길목을 지키고자 했다"라며 “이를 위해 해당 국가에 엄청난 공적개발자금(ODA)을 투입해왔다”고 말했다. 일본의 대아세안 ODA 규모는 1967년 이래 1,000억달러를 웃돌며 2015-2020년 180억달러 공여도 약속한 상황이다. 한국의 대아세안 ODA 총액은 32억달러(1987-2015년)이다.
아세안 시장 확대는 중국 견제 목적
특히 일본은 연 1,000만달러(약 115억원)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동아시아ㆍ아세안 경제연구소(ERIA) 등에 투자해 아세안과의 공동번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연구소는 아세안과 관련된 가장 많은 연구자료가 축적된 곳으로 평가된다. 아세안은 지난 2010년 제 17차 아세안정상회의에서 아세안을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아세안 연계성 마스터 플랜’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는 ERIA 작품이다. 서정인 주아세안 대표부 대사는 “이렇듯 일본은 물심 양면으로 아세안을 지원하고 있다”라며 “2000년대 들어 영향력 확대를 가속화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은 곳곳에서 중국의 물량 공세에 밀리고 있다. 중국과 경쟁하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사실상 일본이 수주하는 것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중국이 뛰어들어 낙찰받았다. 하지만 중국 수주 후 공사가 진행되지 않자 인도네시아가 불만을 제기하는 등 자국 내 다른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일본의 참여를 공식 요청하는 방식으로 중국에 불만을 표시하는 등 갈등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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