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에서 시를 읽다 ⑮
본문
그리운 바다 성산포
12 술에 취한 바다
시,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NOTE*************
내게는 30년이 넘도록 간직하고 있는 시집이 여러 권 있다. 가끔 시집을 꺼내들면 까맣게 변해가는 종이에서 바스라질 듯 낡아가는 세월의 냄새가 난다. 그런데 유독 아직 새하얀 종이의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집이 한 권 있는데,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이생진 시인의 시집이다. 초판이 1987년에 발행되었고, 나는 1993년에 발행된 무려 14쇄 판본을 가지고 있다. 한 시집이 저토록 긴 시간 동안 꾸준히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시인들이 모여서 우스갯소리로 요즘 시집은 시인들만 사서 읽는다고들 한다. 슬픈 일이다.
아무려나,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제주 성산포 바다에서 쓴 시들이 한 권 가득하다. 파란 시집 표지에서 아직도 바닷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 시집의 12번째 수록시 ‘술에 취한 바다’를 읽고 난 후에 나는 어느 바다에 가건 이 시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내 고향 삼천포나 통영의 바다에서, 여수 밤바다에서, 삼척의 새벽 바다에서, 마나도와 코모도, 혹은 블리뚱의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바다에 앉아도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한다. 때로 떼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술을 마셨지만/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기도 한다. 이생진의 시를 읽고 난 후에 만나는 바다는 달라진다. 더 가깝고 더 그리운 존재가 된다.
누군가 내게 왜 시를 읽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이생진의 <그리운 성산포>로 답을 한다. 시를 읽기 전의 바다와 시를 읽고 난 후의 바다가 다르지 않냐고. 시는 자연과 사람과 세상 모든 관계의 그물들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이야기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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