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에서 시를 읽다 (16)
본문
벼
시/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출처: 깨끗한 나라- 이성부 시집)
NOTE ****************
바야흐로 가을이다. 곧 추석이 다가오고, 풍요와 결실의 계절이 들판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성부 시인의 <벼>는 가을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벼’는 민중을 상징하고, 서로의 몸을 묶는 공동체의 힘을 상징한다고 한다. 고난 앞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서로를 묶어 불의에 저항하는 민중의 힘을 우리는 익히 경험해 왔다.
이성부 시인은 언제나 소박하지만 단단한 언어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했고,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리어 왔다. 그러나 굳이 민중을 상징하는 ‘벼’가 아니어도 좋다. 벼가 익어가는 가을의 풍경 자체로만 읽어도 시는 충분히 따뜻하고 힘이 난다.
여름날 뜨거운 볕 속에서 스스로를 아끼고 깊이 익어가는 벼. 태풍이 불어오면 서로 몸을 묶고 기대면서 살아내는 벼. 더운 가슴으로 사랑했지만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벼. 그토록 넉넉하고 큰 품의 자연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떠나는 벼의 그리움을 읽으며 곧 다가올 추석을 기다린다.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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