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목 꽃에서 배우다 '하루하루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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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피는 꽃, 행운목 꽃
행운, 찾아 얻는 것일까? 스스로 찾아오는 것일까?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 볼 때 아무래도 행운은 쟁취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막연히 기다리는 것도 답으로는 모자란 느낌이다. 누구라도 딱 집어 이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은 것이 바로 행운의 정의리라.
나는 믿는다. 예술은 역시 발견이다. 세상과 사람의 삶 역시 발견이다. 행운목 꽃이 행운의 갈래를 제시할 줄이야.
▲ 옥수수 잎 닮은 무성한 행운목에 전에 볼 수 없던 넝쿨이 늘어져 있다. 넝쿨엔 꽃 뭉치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와아∼ 행운목 꽃이다. 행운목이 꽃을 피우다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산하던 <산빠람(인도네시아 한인 등산모임)> 일행이 누군가의 탄성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옥수수 잎 닮은 무성한 행운목에 전에 볼 수 없던 넝쿨이 늘어져 있다. 넝쿨엔 꽃 뭉치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행운목에 꽃이 피었다. 돌아보니 주변 행운목 몇 개가 함께 꽃을 뽐내고 있다.
"어 근데 꽃이 뭐 이래?"
순간 왠지 꽃이 이름에 못 미친다는 느낌이 든다. 꽃의 꽃다운 맛 화려하거나 요염하거나 그런 맛이 없다. 풍성하지도 않다. 꽃 색과 모양, 크기 어느 모양으로 보나 눈길 확 사로잡을 본새가 아니다. 암튼 꽃이 꽃이니 어찌 꽃 축에 못 끼랴만 어째 좀 께적지근하다. 어쨌든 행운목 꽃이다. 오묘함이 넉넉하잖은가. 일행 모두 요리보고 조리 살피고 호기심 충족하기 바쁘다.
▲ 와아∼ 행운목 꽃이다. 행운목이 꽃을 피우다니……
▲ 세상과 사람의 삶 역시 발견이다. 행운목 꽃이 행운의 갈래를 제시할 줄이야
▲ 행운목에 꽃이 피었다. 어 근데 꽃이 뭐 이래?
찰칵찰칵! 일행 모두 행운목 꽃을 사진으로 담느라 분주하다. 모두 행운을 만났다는 표정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십 년을 살았어도, 또 10여 년에 걸쳐 이 산길을 오간 회원도 행운목 꽃을 만나기는 처음이란다.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꽃'이란 말이 그냥 속설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원산지인 인도네시아에서도 행운목 꽃을 보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을 검색했다. 검색창이 열리자 행운목 꽃에 관한 포스팅이 줄줄이 뜬다. 꽃 사진도 다양하다. 희게 핀 꽃은 영락없이 커피 꽃 모양새다. 내용도 가지가지다. 정성으로 기른 결과 몇 년 동안 매년 꽃을 피웠다는 경우도 있고, 8~10년을 기다려야 꽃을 볼 수 있다고 강조한 내용도 있다. 어쨌든 인도네시아 자생지 현장과는 모두 조금씩 다른 내용이다.
행운목의 학명은 Drasaena, 영어로는 Lucky Tree다. 그 종류도 여럿이고 줄기와 잎 모양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그중 드라세나 맛상게아나가 가장 흔한 종으로 행운목이라 불린다고 한다. 아무튼, 행운목 원산지 부분 첫머리는 인도네시아가 장식하고 있다. 물론 인도네시아 산과 들엔 행운목이 많다. 도시 후미진 곳이나 시골 마을은 행운목 울타리가 흔하다. 물론 정성스럽게 가꾼 것이 아니니 실내에서 수경재배나 분에 심어 키우는 한국의 토막 행운목에 비하면 달라도 매우 다르다.
▲ 인도네시아 산과 들엔 행운목이 많다. 도시 후미진 곳이나 시골 마을은 행운목 울타리가 흔하다
▲ 나무숲에서 곁살이 하는 행운목 묘목들
포스팅 내용 중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았다. 행운목 꽃이 밤의 꽃이란다. 그러니까 벌건 대낮 하산 길에 본 꽃은 참다운 행운목 꽃이 아니었다. 간밤에 개화했다가 다시 꽃잎을 닫은 것이거나 밤이 도래하면 꽃피울 꽃망울이었을 뿐이다. 짙은 향기로 사람을 아찔하게 하거나, 온 집안에 가득 퍼진다는 행운목 꽃향기란 거기엔 없었다.
아니 또 이런 인연이라니. 행운목 꽃 생리가 우리 집 현관 앞 야래향(夜來香)과 여러모로 너무 유사한 거다. 그러니까 활짝 핀 행운목 꽃을 보기 위해서, 그 매혹적인 향기를 느끼기 위해서 야간 산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빌미를 찾았다. 물론 행운목의 만개한 꽃을 보고 놀라운 향을 누리기 위해서는 야간 산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맞다. 그렇지만 어둠을 뚫고 인적 없는 산을 오르기란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
▲ 야래향 꽃몽오리
▲ 활짝핀 야래향 꽃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리겠다. 행운목 꽃에 빗대 '행운'의 의미를 함께 결론지어 보자. 각설, 행운목 꽃이 기르기에 따라 또는 자연환경에 따라 피는 것을 알았다. 꽃이 필 상황이면 핀다는 것을 알았다. 자주 또는 아주 드물게 필 수 있음도 알았다. 아예 꽃이 피지 않을 수도 있다지 않은가.
바로 이거다. 사람의 행운 또한 어찌 이와 다르랴. 행운을 맞을 상황을 항상 준비하는 사람, 행운이 왔어도 모르고 흘려버리는 사람, 아예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 등 행운이란 결과적으로 각자에게 달렸다는 의미다.
다만 이것으로 결론 맺지 말자. 밋밋하잖은가. 사람답지 못하잖은가. 필요한 것은 자기의 행운을 아는 것이리라. 자기의 행운을 행운으로 인정하는 것이리라. 생명을 가진 모든 이에게 오늘은 바로 행운이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 아닌가? 곧 자기의 현재를 축복으로 여기고 만족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운을 누리는 것이리라. 그렇다. 뭐니 뭐니 해도 행운 역시 발견이다.
헉헉~ 가쁜 숨을 고르며 산에 올라갈 때는 보지 못한 행운목 꽃, 그러나 내려올 때도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꽃, 주변을 살필 여유를 가지고 내려올 때야 비로소 발견했던 것처럼 자기의 오늘 역시 행운임을 발견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산마을은 행운목을 흔히 볼 수 있다. 행운목 꽃 발견을 계기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자주 보는 꽃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산마을 사람들이 행운목 꽃과 닮았다. 오늘과 현재 상황을 만족하며 늘 웃으며 산다. 그들이 사는 작은 집이 초라하다는 것은 내 판단이다. 그들의 삶이 궁색할 것이라는 판단도 내게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내 눈에 비친 현실과 그들의 느낌은 달라도 많이 다른 것이다.
떠올랐다. 지금 내가 사는 집 집터도 행운목 군락지였다. 건축을 시작할 즈음에도 자생인 듯 재배인 듯 행운목 묘목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땅속 깊이 스민 행운목 기운때문일까? 사는 기간이 늘어갈수록 내 일생 가장 멋진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산마을 살이가 행운이란 생각이 자꾸 커지는 거다. 아뿔싸! 그런데 지금 우리 집엔 행운목이 없다. 내일 당장 행운목 몇 그루 구해 심으리라.
▲ 우연히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으로 여기는 꽃 행운목 꽃
화려하지 않아서 요염하지 않아서 꽃 축에 끼워주지 않는다 해도 행운목 꽃은 행운목 꽃이다. 가꾸는 행운목이 꽃을 피웠다면 그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우연히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으로 여기는 꽃 행운목 꽃, 하여 그 꽃을 빌어 바란다. 오늘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행운을 발견하기를 빈다. 오늘 자기에게 주어진 풍성한 행운을 아는 참 행복한 날이기를 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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