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에서 시를 읽다 (19)
본문
밥
시. 정진규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 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 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 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숟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같다
다 내어주시고 그분들의 쌀독은 늘 비어 있을 터이니까 늘 시장하셨을 터이니까
밥을 드신 지가 한참 되셨을 터이니까
- 출처: 말씀의 춤을 위하여 (미래사, 1991)
******* NOTE
추석을 며칠 앞두고 “밥” 시를 쓴 정진규 시인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몸으로 시를 쓰고(“몸시”라는 연작시집을 내셨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밥에 대하여 깊은 사유의 시를 써 오셨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저승 가시는 길에 마음으로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올려드리고 싶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유독 밥에 관한 말씀이나 속담, 밥과 관련한 행위들이 많다. 어릴 때 어른들이 습관처럼 내뱉는 말씀 중에는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거나, ‘밥술 꽤나 뜨는 집’이라거나, ‘이제 겨우 밥이나 먹고 산다’거나,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거 쳐다보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거나 하는 말들이 참 많았다. 말 뿐 아니라 추석이나 설날, 혹은 집안의 제삿날에는 하얀 쌀밥이 그득하게 상 위에 올려진다. 그러고 보면 밥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상징언어가 되어왔다.
집 떠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도 늘 밥을 짓는 일로 대신 했다. 시인은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는 말로, 늘 아들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기다리셨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마음 속 깊은 그리움과 사랑은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고 확장되고 넓어진다. 제 살던 땅을 떠나와 적도에서 열 아홉번 째 추석을 맞는 나에게 정진규 시인의 시는 위로이고 아픔이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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