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에서 시를 읽다 51
본문
사평역(沙平驛)에서
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출처: 사평역에서- 창작과 비평)
NOTE***************
시집에는 이제 옅은 곰팡이 자욱이 생겼다. 1983년에 첫 출간된 시집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이 시집을 한국에서 자카르타까지 무려 30여 년을 지고 다닌 셈이다. 그리고 험난한 80년대의 마지막 해에 시작되었던 나의 대학 시절과 초라했던 청춘의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시집을 꺼내 읽는다. 모두에게 험한 상처로 남아 있을 80년대를 버티어 온 확고한 서정의 시를 읽으며 위로 받는다.
곽재구 시인의 신춘문예 등단작이자 시집의 제목인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곳이다. 애당초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는 기차역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인의 상상력이 사평역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미지는 때로 실재보다 훨씬 강렬한 감동을 만들어 낸다는 걸 시를 읽으며 새삼 느낀다.
쓸쓸한 겨울 대합실 풍경 안에는 정처 없이 실려가는 우리들의 인생이 단면으로 보인다. 밤늦게 고향으로 가는 막차를 기다리며 겨울 추위에 떨고 서있는 가난한 군상들은 피곤에 지쳐 졸고, 감기에 걸려 쿨룩거리고 때로 침묵하며 자신의 삶을 응시한다. 모든 고달픈 삶은 기차를 타고 낯설고 추운 설원을 달리는 기차와 같다. 그 기차에 매달린 단풍잎 같이 작고 초라하며 쓸쓸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그리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그 시간을 떠올리며 톱밥 한줌을 난로 속에 던져 준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서글프고 고단한 것이지만, 한 줌의 톱밥과도 같이 따뜻한 눈물로 간직하고 싶은 기억들이 있게 마련이다.
* 채인숙 /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고,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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