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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행운, 왜 고난 뒤에 찾아오는가?

인재 손인식의 경영 탐문 작성일2018-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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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손인식의 경영 탐문 22
 
 
행운, 왜 고난 뒤에 찾아오는가?
- 고난을 벗 삼아 행운을 창작하는 사나이 이창희 사장 -
 
소 키우기가 취미인 사나이가 있다. 한눈에 담을 수도 없는 너른 목장 운영이 한낱 취미다. 세상 취미 종류를 한 가닥 넓힌 사나이다.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소 250여 마리가 우글거린다. 지붕을 덮은 축사도 너르게 둘러친 울짱 안도 같은 모습이다. 어른 소 사이사이 송아지가 여럿, 귀여워라! 어린 것은 다 사랑스럽다. 너른 초지를 스치는 바람이 싱그럽다.
 
사나이의 주업은 봉제회사 경영이다. 젊은 시절 인연을 맺어 35년여 초지일관 봉제인으로 살았다. 소 기르기 취미는 땅을 사랑한 때문이다. 조부의 취향과 닮은 거다. 조부께서 토지를 많이 소유했었다. 생뚱맞게 소 기르기가 취미가 된 것은 경상북도 문경 가은읍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어린 시절 뇌리에 담은 고향의 목가적 풍경 한 조각이 허튼 게 아니었다. 아무튼 소 기르기 취미는 사는 곳이 인도네시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의 고향 문경인들 어찌 쉬우랴.
 
본업은 간결하게, 취미는 거창하게
 
“저는 타고난 봉제인입니다. 할수록 재밌어요. 자연적인 도태라면 몰라도 평생 놓지 않을 것입니다. 소 기르기요? 그건 그야말로 취미지요. 아마 상황이 바뀌면 이 취향은 변할 것입니다. 우선 전문성이 부족해요. 목축업에 관해 파고들어 공부할 마음도 별로 없고요.”
 
이창희 사장(62), 그는 씨름 선수가 연상되는 걸걸한 체격의 소유자다. 풍상 섯거친 굵은 매화 등걸 같은 이미지다. 그의 목장엔 그와 비슷한 덩치 큰 황소들이 여럿, 눈에 띈다. 영락없이 주인 닮았다. 표현이 좀 거시기 하달 수 있는데 느낌이 그랬다. 암튼 그는 지금 그가 사는 환경과 쪼쪽(적합=인니어)이었다. 막걸리와 김치 같은 연분.  
 
▲ 목축장 뒷산 능선에서 이창희 사장 
 
▲ ▼ ▼ 축사와 울짱안의 소들  
 
 
 
자카르타에서 남쪽으로 약 140여km 수까부미 산고을, 그는 거기 마을을 감싸 안은 뒷산 자락 약 18 hr의 소유자다. 무더기 무더기를 이룬 대숲이 울창하던 곳이었다. 불도저와 트랙터를 동원 구릉과 능선을 성형했다. 너른 초지를 만들고 축사를 꾸몄다. 바로 거기 한쪽에 거택도 신축했다.
 
필자 일행이 도착하자 그는 다짜고짜 산으로 이끌었다. 툭 틘 축사를 훑고 드넓은 초지 자락을 따라 산 능선에 올랐다. 매일 새벽 4시쯤이면 어김없이 오르는 코스 중 하나라 했다. 동행한 일행에게는 뜬금없는 산책이었다. 입은 체, 신은 체 풀숲을 걸었다. 무성한 초지와 풀이 깎인 초지에 깔린 퇴비, 순환의 묘가 거기 있다. 능선 너머에도 그의 소유 초지가 드넓었다. 평소 훤히 내려다보인다는 수까부미 시내가 그의 어깨 너머로 희미했다. 흐린 날씨가 그의 의도와 엇갈렸다.
 
그에겐 그만의 삶의 질서가 또렷했다. 취미가 본업보다 규모가 컸다. 노동집약 산업 봉제, 주업인 봉제 공장 직원 숫자보다 취미로 기르는 목장의 소 숫자가 더 많다. 임금이 오를 때마다 현장 직원 정예화에 힘씀으로써 경쟁력을 유지한다. 평생 손 떼지 않을 주업이기에 단단함과 간결을 중시 여긴다. 축사에선 2~3일이 멀다 하고 송아지가 태어난다. 농장의 소 숫자가 계속해서 느는 거다. 언제라도 바꿀 마음이 있는 취미이기에 그 세가 부푸는 것이 제격일까?
 
▲ 한눈에 가둘 수 없는 넓은 초지
 
▲ 목장 입구에 지은 거택
 
“저는 행운의 사나이입니다. 살면서 늘 행운이 함께했어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항상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와요. 봉제만 해도 그래요. 다들 일감이 없어 운영이 어렵다고 할 때도 저희 회사는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도와주신 분들께 고마움 깊이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행운이 끊이지 않는 것은 신앙심 깊은 아내의 덕도 큽니다. 아내는 틈날 때마다 저와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해 기도하거든요.”
 
무용담과 콩트 창작자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선 어려운 고비가 툭툭 불거졌다. 그렇다. 행운은 꼭 고초를 겪을 때 찾아온다. 행운을 증명하기 위해선 고난이 버무려져야 제맛이다. 혈기 왕성할 때 봉제회사 경영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방림방적 사원으로 목전의 승진을 물리치고 덤벼든 창업이었다. 2년여 만에 가진 것 모두를 앗겼다. 다시 시작한 직장생활, 돌파구를 찾은 것이 해외 근무, 중남미였다. 과테말라에서 스리랑카, 다시 과테말라로 오간 9년여, 그 사이 그는 온두라스와 니카라과도 넘나들었다.
 
▲ 이창희 사장
 
“동양창출 현지 법인 주재원이었어요. 후에는 법인장을 맡기도 했지요. 인도네시아요? 참 우연히 인연을 맺었어요. 1996년이었지요. 베트남으로 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거든요. 그즈음 어느 지인이 제게 인도네시아를 소개한 겁니다. 몇몇 현실을 들어 권고를 했어요. 저울질하다 인도네시아로 기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조언이야말로 곧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해외로 떠돈 30여 년이 모두 꿈만 같다고 했다. 어찌 아련하지 않으랴. 과거 회상 모드로 접어들자 말투가 더욱 그다워졌다. 어눌하고 투박한 본래 말투에 메뉴가 더 늘었다. 할 이야기가 많은 것에 비해 시간이 모자라단 느낌일까? 널뛰기에 거두절미다. 작용과 반작용이 양념처럼 파고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 귀를 더 기울여야 했다.
 
개성 발휘를 참 잘하는 능력자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다부진 자기 경영자란 느낌 점점 커졌다. 아이큐 지수가 매우 높다고 미리 귀띔해준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급한 것이 확실한 성격도 감지되었다. 몇 년 전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소용돌이 한 컷이 등장하자 아내가 나섰다. 두두둥 둥둥~ 중중모리 장단에 엇박자가 뒤섞이며 당시 상황이 잡힐 듯 전개됐다.
 
“생과 사를 다투는 순간이잖아요? 엄청나게 당황했죠. 그때 이웃 중에 한 분이 떠올랐어요. 식견이 엄청 넓은 분이거든요. 수까부미 사는 한인들을 많이 도와주시는 분이에요. 경황 중에 전화를 드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착착 맥을 짚으셨어요. 응급조치하고 서둘러 그분이 안내한 병원으로 달렸죠. 병원에 도착하니까 그분께서 이미 잘 조치해놓으셨더라고요. 신문지에 싼 돈 뭉치도 내미셨어요. 제가 허둥대느라 병원비 준비를 못 할 줄 예상하셨던 거예요. 그 치밀함과 감사함 평생 못 잊지요. 아무튼, 그분 조언에 병원 의사들도 놀랐어요. 결과적으로 정말 보기 드문 기사회생이었지요.”
 
신념을 가져라, 세상 부러울 것 없나니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집을 떠났습니다.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배려였어요. 어려서부터 목표가 해양대학이었는데 입학 얼마 후 곧 자퇴했습니다. 공군 조종사를 꿈꿨는데 그 또한 가로막는 사정이 있어 포기했습니다. 방황하던 시기에 포목점을 운영하던 지인의 영향으로 봉제 산업에 발을 디뎠습니다. 군 전역을 한 뒤 본격적인 봉제인의 길을 걸었어요.”
 
독립심에 관한 한 스스로 확신한다는 의미겠다. 근심이나 걱정,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사전에 없는 단어였다. 여행도 혼자 하기를 즐긴다고 했다. 과테말라에 근무할 때는 내전도 겁내지 않았다. 틈이 나면 혼자 과테말라 전역을 훑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작은 끈이라도 있으면 그곳이 목표가 되었다. 라마단 연휴 때면 십 수 일씩 혼자 떠돌기를 수차례, 한국의 소와 닮은 소를 찾기 위해 인도네시아 곳곳을 다니기도 했다. 자연산 꿀을 찾아 장비를 갖춰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 행간에는 늘 낭만이 흘렀다. 어느 곳 어느 때를 이야기해도 부정보다 긍정을 앞세웠다. 그는 고난을 사람 삶의 한 요소로 여겼다. 그래서 고난이 찾아오면 벗처럼 맞이해 어울린다. 아들의 미국 유학(UCI(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은 봉급쟁이의 한계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창업의 기회로 활용했다. 자금 마련도 쉽지 않았고 자금을 옮겨 올 때 어려움도 발생했다. 그러나 그건 모두 행운의 전조였다고 했다.
 
▲ 이창희 사장 본업, 봉제 회사 PT. Monami 현장
 
 
공장 건립 후 떼를 지어 찾아온 비리 공무원들은 그의 훈계에 고개를 숙였다. 갈등을 초래한 주변 조폭들은 산처럼 당당한 그의 리드 앞에서 조력자로 변했다. 자각의 깊이였다. 삶에 관한 자신감이었다. 그는 무용담 창작자다. 콩트 소재 생산자다. 이야기 속에 진지한 해프닝이 줄을 이었다. 단조로운 다양함이었다. 양극도 역설도 그에게는 다 조화를 위한 재료였다. 그 중심에서 시종여일 도드라지는 것 두 가지가 있었다.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성실함과 단내 나는 검소함.
 
그는 지금도 변함없는 고수익 창출자다. 그러나 그의 절약 실천은 아무나 따를 수 없는 경지다. 돈을 아끼기 위해 집과 공장 모두 직접 설계하고 시공도 손수 했다. 년 2만 달러가 넘던 연료비를 아끼기 위해 공장 보일러를 땔나무용으로 교체할 때도 직접 제작하고 설치했다. 항상 직원들보다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 시작 준비와 마침 점검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역할이다.
 
▲ 검소함의 표본 PT. Monami 회의실
 
그의 절약 실천은 집이나 회사 사무실에서 표본으로 드러났다. 그는 스스로 지닌 신념을 보이는 것에 실어내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지인 대다수가 즐기는 골프의 효용성을 인정하되 무작정 따르지 않는다. 예전 회사에 근무할 때는 핸드폰을 가장 늦게 산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경영하는 회사이기에 더 충실하게 근무한다.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한 그 며칠 빼고는 창업 이후 결근한 적이 없다.
 
“처음 수까부미에 왔을 때였어요. 마침 비어있는 집이 있더라고요. 외지고 허름한 게 맘에 걸렸어요. 하지만, 임시로 세 들어 사는 거야 특별히 가릴 이유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괴롭히는 일들이 연거푸 일어났어요. 믿지 않던 귀신이 실감나는 집이었어요. 크고 작은 일로 경찰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사를 나오고 나서야 알았어요. 그 집이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흉가였다는 것을요. 그 집은 지금까지 계속 비어있습니다.”
 
사는 곳을 관계치 않기로는 과테말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일하는 곳을 방문한 아들이 “여기도 집이야?”라고 물었을 정도다. 법인장 직책이었지만 형편이 좋지 않은 회삿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심지어 범퍼가 없는 싸구려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부인이 그때의 이야기를 거들었다.
 
“제가 그곳에 함께 있을 때입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어요. 퇴근길에 함께 탄 차가 길에서 멈춰 섰어요. 집에 돌아가기 위해선 허름한 버스를 타야 했지요. 버스 안 승객들에게 동양인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죠^^”
 
곤궁한 시절 덕에 현재가 만족
 
부창부수였다. 겉치레에 연연하지 않기는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순서를 매기자면 부인의 근면 검소가 한 수 위였다. 부인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과 사는 것이 익숙하다고 했다. 공장 직원들 간식도 그가 담당했다. 야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 날랐다. 거세게 일을 시키는 남편의 스타일에 관한 완충작용이기도 했다. 맛있게 먹으며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볼 때면 수고보다 즐거움이 몇 배였다고 했다.
 
“자연환경에서 사는 것이 좋아요. 한적해 보이는 겉과는 달리 속내는 한가한 것이 아니지만요. 그러나 도시보다 더 좋아요. 백화점이 멀어 돈도 많이 아끼죠^^ 사람들과 얽힐 일 적어 좋고요. 곤궁한 시절을 겪어서가 아니라 비교적 현재에 만족하는 성격이에요. 물이 새는 지하에서 살 때 비하면 지금은 낙원에서 호강하는 거죠. 그때 물에 잠겨 결혼사진도 다 잃었어요.
 
저 양반이 사업을 실패한 뒤 외국으로 떠났잖아요? 저도 가만히 놀 수가 없었어요. 친정엄마에게 돈을 빌려 작은 화장품 가게를 차렸지요. 집은 복덕방 사무실 안쪽에 붙은 작은 방을 얻어 아들과 살았습니다. 세간도 없었지만 둘이 반듯이 눕기도 좁은 방이었지요. 남편은 받은 월급을 통째로 다 부쳤어요. 생활비는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 쓴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보내 준 돈은 만져보지도 않았습니다. 한 푼도 안 쓰고 몽땅 다 저축을 했어요. 그 덕에 사업 실패로 잃었던 집을 3년 만에 되찾았지요. 아이가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다가도 아빠도 엄마도 핸드폰을 안 쓰고 절약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나중엔 아침마다 신문을 돌려 스스로 돈을 벌어서 핸드폰을 샀지만요.”
 
세간엔 일을 취미 삼은 사람 참 많다. 특히 전환기를 거치며 일에 묻혀 살아온 세대들은 놀이보다 일을 즐기는 경향이 허다하다. 일로 현실과 자기 관리도 하는 일거양득을 누린다. 그 면모는 이창희 사장에게도 여실했다. 그는 관습에 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가갸거겨, 조삼모사 적당히 뒤섞이는 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시선에 매몰돼 자신을 허무는 경우란 애초부터 그에게 없었다. 그는 남과 달라야 편안하다. 맘먹은 것을 뭐든 식은 밥 해치우듯 현실로 풀어내는 능력자란 의미가 아니다. 늘 자신의 현실에 알맞게 신념 굳건히 세우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개성 강한 사나이일 뿐이다.
 
세상 행복의 척도 하나 꼽으라면 그건 바로 안분지족(安分知足) 아닐까? 자기 분수를 알아 바로 지금을 편안하고 만족히 여겨 다른 데 마음 두지 않는 것. 안분지족의 향기 짙은 이창희 사장, 그는 무조건 돈을 아끼는 구두쇠가 아니다. 불요불급 낭비를 줄일 뿐 나눔에는 망설임이 없다. 정예부대인 직원들과 성과 나누기는 기본이다. 지역 주민과 유대도 늘 우선순위다. 인도네시아를 위한 일이 무엇일까는 평소 고려 대상이다. 때가 되면 보유한 드넓은 대지를 인도네시아인들과 더불어 사는데 거침없이 활용할 생각이다.
 
安分知足(안분지족)
자기 분수를 알아 바로 지금을 편안하고 만족하게 여기다.
무술년 단오 전 2일 산나루 주인 인재 손인식 쓰다.
 
최근 이창희 사장 부부에게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얼마 전부터 외아들 용범(37)씨 부부와 함께 살기 때문이다. 취업하고 결혼한 후 죽 한국에서 살던 아들은 한국의 경제 상황, 경쟁 위주의 교육 현실 등을 고려 부모 곁에 닻을 내렸다. 최고의 보물 귀여운 손자 손녀와 함께. 4개월여 후면 둘째 손자까지 태어날 예정으로 부부의 기쁨은 무한이다.
 
▲ 손녀 가은 양(사진 좌) 손자 경은(사진 우)와 함께
 
▲ 이창희 사장의 가족. 부인 박명순 여사(앞줄 오른쪽)
뒷 줄이 아들 용범 씨와 손녀 가은 양
자부 안미류 씨와 손자 경은 군. 
 
“가족이 다시 함께 살게 됐어요. 제게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생각이 많지요. 가진 것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손자 손녀의 미래까지 생각하면서요. 일단 아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든든한 파트너로서요~^~^. 아들의 취향은 봉제업이나 목장 운영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까부미 시내에 대지를 확보했습니다. 건물 신축을 앞두고 있지요. 목적은 우선 볼링장 설립입니다. 아웃렛 매장, 현지 식품 도매업, 화장품 수출입 판매업 등도 가시권이고요.”
 
이창희 사장, 그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본보기다. 스스로 힘쓰고 몸과 마음 가다듬기를 쉬지 않는다. 하여 지금의 전환점이 그의 내일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자못 궁금하다. 췌언처럼 덧붙인다. 그의 취미가 더욱 다양해지기를 빈다. 무용담과 콩트도 변함없이 활발하게 생산하기를 바란다. 그의 선한 희망들이 아름답게 꽃 피기를 소망한다. 천조자조(天助自助)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그가 스스로 최선을 다 하는 한 그에게 행운이 그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 이 프로젝트는 <자카르타경제신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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