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도청(盜聽)
본문
일본의 진주만기습 직전 화평교섭 마지막 시점에, 미국은 해군성 감청반을 가동하여 일본은 이미 어전회의를 통해 개전을 결정하였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승전의 가도를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1943년 4월, 솔로몬제도 부겐빌 전선시찰을 위해 그가 탄 고속 수송기가 미육군 항공대 소속 요격기에 의해 격추되어 전사한 것도 비행경로 첩보를 미리 입수한 미해군의 감청 덕분이었다.
1998년 5월 수하르또 하야와 동시에 대통령직을 승계 받은 하비비 대통령 재임 초기,‘수하르또 처벌과 개혁’을 부르짖는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여, 결국 수하르또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기에 이른다. 이때 하비비는 동향출신의 안디 갈립(Andi Ghalib) 검찰총장에게 전화로 지시하여, 실제로는 예우를 갖춰 한 두 시간 정도 형식적인 조사를 진행하되, 언론에는 7~8시간 강도 높은 조사를 강행한 것처럼 발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하비비 대통령과 검찰총장간의 이 전화대화 내용이 정적에 의해 도청되어 언론에 폭로되자, 하비비 정권은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고 결국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교체된다. 2003년 부패척결위원회(KPK)가 설치되어 법적으로 도청이 허용되자, 당시 재계서열 3위 가자뚱갈 그룹 총수 누르살림에 대한 면죄부를 위해 로비를 벌이던 아르따리따(Artalyta) 부인이 자카르타 심뿌룩 지역 누르살림 자택에서 검찰수사관인 우립에게 미화 60만 불의 뇌물을 건네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도 도청 때문이며, 권부와 밀착된 여성기업가인 하르따띠(Hartati Murdaya) 부인이 지난해 술라웨시 지역 농원지역 인허가를 취득하기 위해 지방군수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할말을 잃도록 만든 것도 검찰이 코 앞에 들이댄 도청된 휴대전화 녹음이었다.
전직 미국 중앙정보부 및 미국 국가안보국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자료에 근거하여. 최근엔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서방국가 원수들의 개인 전화를 도청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더니, 바야흐로 인도네시아도 그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수개월 전 미국과 호주가 인도네시아에 대해 도청을 실시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후, 구체적으로 인접국가인 호주 방위신호국(DSD)이 2009년에 유도요노 대통령, 영부인 그리고 몇몇 측근장관들을 도청하였다는 언론보도로 구체화 되었다. 이를 놓고 인도네시아 정부가 호주정부에 공식해명과 사과를 요구하자, 지난 11월 19일 토니 애보트 수상은 이를 거부하였다. 정부는 즉각 주 호주 인도네시아 대사를 소환하였으며, 국내여론은 호주와의 관계 격하, 외교관 추방 외에 ‘롬복 협정’이라고 불리는 ‘국방안전조약’ 동결까지 불사하여야 한다는 강경론을 내세우고 있다. 국회 일각에서는 ‘보트피플(Boat People)’ 문제를 무기로 삼아 호주정부에 압박을 가하여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 토니 수상은 취임직후, 인도네시아와 긴밀히 협조하여 보트피플 수를 줄이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천명한 적이 있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이를 토니 수상의 아킬레스 건으로 보고,‘보트피플’유입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공조지역 설정’에 관한 양국간의 협약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유엔난민 고등판무관에 의하면, 지난 5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경유하는 난민의 수가 18배나 증가하여, 인도네시아의 협조 없이는 호주로 몰려오는 난민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호주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국가인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과거 영욕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수하르또 대통령 일가의 정경유착 문제를 파헤친 호주의 일간지‘시드니 모닝 헤럴드지(The Sydney Morning Herald)’의 기사를 놓고 양국관계는 극도로 경색되어, 시드니에서 발리로 비행 중이던 호주 국적의 콴타스(Qantas) 여객기를 중간에 회항시키는 초강수를 두는 가 하면, 동띠모르 병합과 독립 문제와 관련하여 내정간섭의 곡예를 타기도 하였으며, 상대국 마약사범 처벌을 놓고는 수시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양국간에 걸려있는 경제적 이해관계 등으로, 이번 도청사건으로 인해 1980년대 중반처럼 양국의 외교관계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 닫을 가능성은 크지 않을지라도, 그 해결방안을 놓고 양국 당국자들이 지혜를 모아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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