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섬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 코모도Komodo 국립공원 2 > 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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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9) 섬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 코모도Komodo 국립공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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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 시인이 만난 매혹의 인도네시아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002회 작성일 2019-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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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인도네시아 9>
 
섬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 코모도Komodo 국립공원 2
 
글과 사진 / 채인숙 (시인)
 
 
가끔 천천히 걷는 시간이 필요하다. 살던 곳을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오래 살면서 마주치는 숙제 중 하나는, 내 인생의 어떤 부분을 나누고픈 매력이 전혀 없는 사람과도 그럭저럭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 된다는 좁은 교민 사회 안에서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혹은 가까이 지내며 속마음을 나눈다는 건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견디기 힘들 때는 아예 주변을 차단해버리는 극단의 조처를 취한다. 언젠가 소시오패스 기질을 가진 사람과 무슨 활동을 같이 한 적이 있는데,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모르는 미성숙한 언행에 영혼이 피폐해져서 그 사람에 관한 어떤 소식조차 닿지 않도록 연락처를 모두 차단해 버린 적도 있다. 사람들이 포장된 가짜에 그토록 쉽게 속는다는 것도 놀랍고 한심했다.
 
그나마 20년쯤 지나니 인간관계를 맺는 기준이 나름 생겨나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런저런 원치 않는 일들에 휘말리면 이때쯤 스스로 호흡을 조절해야 한다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오직 자연만이 쓰린 상처를 보듬어주고 내밀한 호흡의 시간을 허락해준다. 대학 생활 내내 같이 어울려 다녔던 과 선배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시를 써서 한때 노랫말로 유명세를 탄 적도 있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다.
 
 
코모도 섬의 바다 언덕을 걸었던 이야기를 쓰려다가 서두가 장황해졌다. 원시의 왕도마뱀을 만난 뒤 우리는 가디언의 안내를 받으며 섬 트레킹에 나섰다. 그리 높지 않은 바다 위 언덕을 아주 천천히 걸었다. 나무가 별로 없이 키 낮은 풀들로 뒤덮여 있는 등성이 가운데로 한두 사람이 같이 걸어가기에 족한 흙길이 주욱 이어져 있었다. 햇볕을 피할 공간을 찾기 힘든 트래킹이었지만 그리 덥거나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사실 트래킹을 계획에 넣어두지 않아서 운동화가 아니라 낮은 샌들을 신고 나왔는데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는 바다 쪽에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는 때도 있었고, 드물게 나무 그늘을 만나면 물을 마시며 쉬엄쉬엄 앉았다가 다시 걸었다. 서두를 필요도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도 없었다. 길섶에 멈추어 서서 언덕 아래 동네의 낮은 지붕을 바라보면 어디서나 사람 사는 풍경은 다 그만그만하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아득한 원시의 시간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던 초록과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이 만들어 낸 버석거리는 흙길의 상념 사이에서 마음속에 품었던 온갖 인간 군상들의 목소리를 하나씩 지워나갈 수 있다. 여행지의 시간은 충분히 느리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바다 위 언덕을 걷는 두어 시간의 산책을 끝내고 다시 작은 배로 돌아갔다. 라부안 바조로 돌아가는 길에 코모도 국립공원의 정취를 느낄만한 작은 섬들을 만나면 배를 정박하고 수영을 하거나 짧은 산책을 즐길 생각이었다. 바다는 아름답고 깊어서 초록의 섬을 있는 그래도 받아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긴 나무 산책로가 있는 작은 섬에 멈추어 우리 가족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선착장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아들이 모래사장에 ‘Merry Christmas’라고 크리스마스 축하 카드를 썼다. 아마 예수님도 보시고 흐뭇하셨을 것이다. 아빠와 아들이 함께 물수제비를 뜨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이토록 아름답고 평화로운 크리스마스를 선물해 주신 것에 감사했다.
 
 
 
 
남은 날들은 우리 집 남자들이 코모도 섬을 찾아 온 원래의 목적인 스킨스쿠버를 즐기러 바다로 나갔다가 라부안바조 항구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나는 그들을 배웅하고 호텔로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을 읽었다. 적당히 느긋하고 적당히 편안한 시간이었다. 가끔 호텔을 나와 다이버 숍들이 즐비한 항구를 걷다가 카페로 들어가 차가운 맥주나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바다로 나간 남자들을 기다렸다.
 
그 시간에 내 가슴과 내장 어디쯤에 숨어있었을 시 한 편이 불쑥 나타나고, 그 시의 언어를 받아적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마침 펼쳐 든 책에서 ‘식물들의 삶처럼 그렇게 늘어져 느리게 흐르는 삶이 무엇보다 시에 어울린다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는 장 그르니에의 구절을 발견했던 것만으로 라부안바조와 코모도 섬에서 보낸 시간은 충분히 시적이고 충만하게 다가왔다. 섬의 시간은 언제나 느리게 흘렀고 나는 그 시간에 발을 맞추느라 더 깊고 천천히 숨을 쉬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음 곳곳에 박혀있던 잔가시 몇 개를 뽑아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섬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인도네시아 문화와 예술에 관한 글을 쓰며, 인도네시아 인문창작클럽에서 활동한다.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격주로 동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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