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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스승님 영전에 바치는 영상 - 대 예술가 고 도곡 김태정의 예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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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210회 작성일 201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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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영전에 바치는 영상
 
- 대 예술가 고 도곡 김태정의 예술 세계
 
산나루 작가
 
 
<창작서예> 연구반 책상 위에 밀가루 반죽 한 덩이씩이 놓였습니다. 때는 1980년대 어느 해 봄 개나리가 필 때였죠. 장소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 아카데미, <창작서예> 연구반이었어요.
 
그때 창작서예 실험 재료로 밀가루 반죽 덩이를 제시한 분은 바로 도곡 김태정 선생님이셨습니다. 주물럭거리기에 따라 갖은 모양을 빚을 수 있는 그 물렁물렁한 칼날은 새로운 창작을 열망하는 젊은 작가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전통과 규범이라는 인습이 강철처럼 단단한 한국 서단을 향한 새로운 길 다듬기였을까요?
 
그 자유인 도곡 김태정 선생님이 별세하셨습니다. 제 존경하는 스승께서 8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저는 멀리 타국에 산다는 이유로 선생님의 빈소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지난 9일 초저녁 부음을 받고 난 후 저는 머리만 어지럽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자정쯤에야 잠자리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습니다. 선생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끊이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부터 도곡 김태정 선생님과 선생님의 작품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결코 아무도 훔칠 수 없는 선생님의 자유주의를 말하려 합니다. 선생님은 제가 스승으로 모시기 전부터 제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글들을 외다시피 할 만큼 매료되어 작가적 마음을 키웠거든요. 제가 만약 순수하게 서예의 본질에 관한 가늠이라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선생님께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 모로 보나 도곡 김태정 선생님의 작가 세계와 작품을 논할 능력이 안 됩니다. 한다 한들 포폄(褒貶)의 언저리도 가지 못할 능력입니다. 그러나 저는 외람되게 스승님의 작가 세계와 작품 세계에 관한 글을 두 번이나 썼고, 그 글들을 전문지에 발표하고 발간한 제 책에 실었습니다. 내용은 제자로서 선생님께 배우는 과정에서 느낀 선생님과 선생님의 작품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선생님의 모든 것은 하나의 총체적 예술입니다. 반드시 알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여 이 추모 영상을 시청하시는 분들께 감히 부탁드립니다. 꼭 선생님의 예술 세계를 음미해주십시오. 만약 선생님과 예술관을 달리 하는 작가들이라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제가 강변하지 않더라도 현대 한국 서예나 창작 서예를 들추면 바로 거기에 도곡 선생님이 계심을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 스승님 내외분과 함께)
 
선생님은 현대 한국 서단의 이단자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선비정신만을 주창하는 한국의 서단의 작가들에게는 확실히 이단자입니다. 그러나 서예는 물론 한국화, 서양화, 조각 등 장르를 떠나 진정한 문자 예술을 지향하는 작가들에게는 대부임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도곡 선생님을 바로 보려면 전통서예 주류의 표면과 선비적 서예가를 염두에 두면 안 됩니다. 유일하게 제 얼굴 하나 지니고 수백 수천 년을 유유히 거니는 고전, 그 고전의 존재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곱씹어 보고, 전통의 중심에서 툭 삐져나와 광기를 부리고는 우리 앞에 그 성깔의 흔적을 당당히 남겨 놓은 역사를 이끈 선각자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작품에 대해 한국의 서예 평론가 고 정충락은 “신품(神品)이다.” 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난조 후미오는 “현대 미술 속에서 매우 독보적인 작업”으로서 “작품이 지닌 어떤 종류의 강력한 존재감, 자장과 같은 힘”을 느꼈다고 말했죠. 저는 이들의 평가에서 탄력 넘치는 직관을 느낌입니다. 프랑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알려진 앙드레 말로의 탄력 넘치는 그런 직관 말입니다. 일본의 미술품을 다 돌아본 앙드레 말로는 일본 호류지 지역 법륭사(法隆寺) 2층 북창(北倉) 특별실에 우뚝 선 백제의 관음상을 보고 읊조렸습니다. “이것이다. 이것이 일본이다.”라고 외쳤죠. 앙드레 말로는 그 관음상이 백제의 것임을 이미 알고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요?
 
 
도곡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난조후미오는 일본으로 돌아가 “정통한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도곡 김태정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989년 11월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사는 대규모 도곡 김태정 초대 기획전을 열었고, 일본의 유력 방송 NHK는 저녁 8시라는 골든타임에 무려 40분간이나 김태정의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방영하죠.
 
한편 도곡 선생님은 미화랑의 전속작가로, 한국화가로 또는 서양화가로 활동합니다. 한국화랑제, 파리 그랑빨레 초대전, 동경국제미술제 등 여러 초대전에 작품을 선보이죠. 그러나 선생님의 기반이기도한 한국 서단 한편에서는 초대작가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안타까운 여론이 일기도 했죠. 재밌게도 서예가가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어요.
 
 
193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선생님은 서울대 문리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입니다. 대학 시절 시 동인 활동, 이화여고 국어 교사, 수필 <다선문답>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경력이 대변하듯 선생님은 영락없이 문학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벗한 필묵에 대한 애정과 탐구 결과는 문자 예술 장르 이정표 하나를 세우셨습니다. 선생님은 한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출판 과장직을 맡으셨지요. 그때 미국 출장이 잦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의 중요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인류문명 초기의 문자와 고대인들의 도상 문자를 깊이 살폈습니다. 평소 문자 예술에 관해 탐구하셨던 그 도화선에 불길이 붙은 것이지요.
 
‘서예가 꼭 문자라는 약속을 지켜야만 하는가.’
‘통념적 해석을 뛰어 넘어 이미지로서 세계인과 교감할 수는 없을까.’
‘선속에, 문자 안에 사람의 감정이 숨 쉬게 하고 사람과 자연, 옛날과 오늘이 함께 존재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의문의 해답을 찾는 길만이 자기다운 창작을 할 수 있다고 여긴 선생님은 사십 초반의 나이를 상관치 않고 그길로 직장을 접고 미국 유학을 결행했습니다.
 
 
미국에서 2년여 동안 주로 고대 미술품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한 선생님은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이 원시적 조형성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자코메티의 가느다란 브론즈의 인체 조각 작품, 피카소 유화 속 다면 상, 마티즈의 인물 조각, 블라맹크의 인물 작품, 파올 클레의 펜화 속 인물들이 재료만 달리했을 뿐 모두 아프리카에서 연유된 것을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도곡 선생님은 이러한 깨우침으로 선과 문자의 형상 안에 인간의 정과 모습을 넣고자 했습니다. 문자의 형상이 가지는 상징성을 알기 위해 한자 조형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셨습니다. 결국 40대 중반의 나이에 대만의 문화대학교 예술대학원 미술과에 입학하십니다. 그리고 무려 5년에 걸쳐 고대 문자학에 대한 연구와 미술 이론 및 실기를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다졌습니다. 선생님이 귀국한 것은 50세가 되던 1986년이었습니다.
 
선생님 귀국 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길에서 소나기를 만났고, 비를 피하려고 공사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대자연의 낙서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추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땅 위에 그려내는 문자 형상과 그림 문양을 통해 참다운 서예는 바로 대자연의 낙서와 닮았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참 우연한 발견, 그리고 깨침, 그 깨침은 바로 작품으로 드러났어요. 발표하는 작품들은 안목을 갖춘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요. 이경성, 이일, 박래경 등 유명 미술평론가들의 논평이 줄을 이었습니다. 서예가로서는 전무했던 전문화랑의 전속계약이 뒤따랐습니다. 일본과 중국, 서구 여러 나라의 초대전이 이어졌고, 세계 미술시장과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뉴욕 록펠러 재단에서 거행된 크리스티 경매에서 작품이 고가로 낙찰된 것입니다.
 
2001년 여름방학 중에는 클리블랜드대학 ZEN 센터와 박물관, 아틀란타미술대학, 센프란시스코 아시안 뮤지움 등을 순회하며 서예 강의 및 퍼포먼스를 실행하셨습니다. 센프란시스코 아시안 뮤지움에서는 1천호 대형작품을 소장했고요. 그리고 이어 2002년 9월에는 주 뉴욕 한국문화원의 초청으로 4주간이나 전시 및 강연, 퍼포먼스를 실행합니다.
 
 
도곡 선생님은 늘 자기답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다운 작품을 창작하는 분이었죠. 곧 선생님은 매우 두둑한 배짱과 용기의 소유자셨습니다. 뛰어난 직관력과 감성으로 예술의 본질을 꿰뚫었고, 그것을 다시 실체화시키는 배짱과 용기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작가는 모름지기 일필로 세상을 조롱할 수 있고 일필로 세상의 아픔을 껴안을 수 있는 큰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신념을 작품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미술평론가 이일 선생은 “기존의 모든 전통과 관습, 지식 따위에서 풀려난 김태정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와 같은 작업을 하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모든 인습을 떨쳐버린다는 일 자체가 용이한 일이 아닐뿐더러 회화의 ABC도 무시한 때가 묻지 않은 생졸(生拙)한 그림을 실제로 그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하고 밝힙니다.
 
작가에게 가장 쓸모없는 것이 남의 방법이나 형식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내 작품을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면 그 작가는 바로 자기를 망치죠. 선생님은 항상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천상 예술가셨습니다. 누구라도 마주 앉아 30분만 이야기하면 그의 예술가적 기질을 충분히 느낄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은 그 타고난 기질에 문학 공부를 통해 직관력을 쌓았고 감성의 울림을 깨달았으며, 동서양의 미술을 박람함으로 생래적 기질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스스로 기반을 조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몇 가지 이유로 선생님을 한국 서단이 배출한 참다운 예술가로 기리는 바입니다.
 
현대의 서예는 이미지가 창출하는 첫 인상을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의 낱알들이 밤하늘에 총총히 들어앉은 별 같이 작품 속에 박혀야 합니다. 푸근한 웃음과 넉살스러움이 필요합니다. 도곡 선생님의 예술세계에는 바로 그런 요소들이 숨 쉬며 노닙니다.
 
선생님은 동양의 붓과 잘 친하기만 하면 서양의 마음을 앞지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여행을 다녀오시더니 제게 말씀하셨어요. “최근 동유럽을 다니면서 색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어. 동양의 미감은 너무 냉정해. 감정을 지나치게 여과시켜 색채를 절제하는 데서 생기는 현상인 것 같아. 나도 그 지성적인 미감에 충실해 왔었지 싶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나타나는 낙서의 유희 정신을 표현하려고 애써 왔지만, 감정의 전부를 화면 위에 살려내지 못했던 거야. 역시 내가 색채를 너무 절제한 데서 생겨난 결과라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깨달았어.”
 
선생님은 동양을 말씀하시는가 하면 서양을 이야기하셨어요. 서양을 그리는가 하면 다시 동양을 쓰셨죠.
 
“동양의 근원을 알기 위해 하루도 붓을 쉬지 말라.”
“고전은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다.”
“동양의 자료는 보물 창고와 같다. 정신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다. 서예 속에 모든 비밀이 다 들어 있다. 해석력만 기른다면 서양 예술을 금방 앞지를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온통 서예 정신 범벅인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 이미지는 늘 서예에서 떠나 있지요. 서예 밖에서 서예를 구하고 서예의 진정한 속살로 다른 형상을 빚으셨던 겁니다.
 
도곡 선생님은 “작품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작품에 그 작가가 살아있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죠. 몇 년이면 닦아질 방법에 매달려 평생 허비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가장 친절한 교수가 가장 나쁜 선생이다. 먼저 나서지 말고 학생이 자생력을 갖도록 해야 한다.”
 
선생님의 작가 노트에 쓰여 있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방법을 일부러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제자들과 함께 노니셨죠. 그러기에 선생님의 작품과 산문에는 온통 노니는 모습투성입니다. 선생님은 제자들과 둘러앉아 대화할 때면 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선생님인지 알 수가 없을 때도 많았어요. 선생님은 제자의 주장이라도 절대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어울릴 때 선생님의 표정을 보면 송구하게도 어린아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졌을 때가 저런 모습일까? 하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제자들과 밤새워 놀고 싶어 하셨습니다. 도무지 시간의 제약을 거부하는 태도로 일관하셨지요. 시간이 선생님께 매달려 따라간다고나 해야 할까요?
 
선생님은 놀이 정신이 없으면 모든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조용히 혼자서 자기를 바라보고 갈 길을 가늠하라고 하셨죠.
 
선생님은 “자연은 인간의 관례와 윤리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완벽하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니 모든 것을 방법으로 하지 말고 느낌으로 하라고 하셨어요.
 
도곡 선생님은 작가라면 대부분 희망하는 화랑의 전속 작가셨습니다. 대구예술대학서예과 교수로 퇴직을 하셨고, 한국서예학회 회장을 역임하셨어요. 각종 초대전 및 해외 초대전을 수없이 치르셨어요. 그러나 저는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선생님이 작품으로서 실현해내신 그 업적이야말로 특별하고 영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참 많은 글을 쓰셨습니다. 한국 서단과 문단이 알아주는 명문을 쓰셨습니다. 선생님이 펼치는 예술 이론은 늘 독특했습니다. 후학들에게 예술과 창작의 무한 세계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귀중한 자료들이 아직 한 권의 책으로 묶이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일임에 저는 희망을 갖습니다.
 
자유인 도곡 김태정 선생님께서 작품으로 남긴 것, 이제 고인이 됨으로써 다시 전하는 그 메시지들로 인해 한국의 서단이 시끌벅적 해지기를 원합니다. 그 예술혼으로 인해 오직 좋은 작품을 하기 위한 소란이 여기저기에서 불길처럼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천상에서도 그 천진한 웃음과 창의력으로 가없는 자유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https://youtu.be/9LP7g4u4E9Y영상 내용을 고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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