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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경영 이야기-7] 변화에 도전하라! 안정은 저절로 찾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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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의 경영 탐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550회 작성일 2023-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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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탐문, 경영이 예술이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경영 이야기 일곱 번째- ()성원버튼 이원만 대표(71)의 존재의 의미는 찾기 나름


변화에 도전하라! 안정은 저절로 찾아질 것이다!!

- 도전과 성실의 조화, 이원만 대표의 경영 세계-

 


경영은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이 경영탐문 프로젝트 진행 중에 훅 파고든 말이다. 변화가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 예술의 정론으로만 알았다. 진하게 체험하고 이해한 것은 겨우 서예 창작의 맛을 알 때쯤이다. 알면서도 쉬 파고들기 어려운 변화의 경지, 이 경지를 벗 삼아 즐기는 강호의 고수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이원만 성원버튼 대표(71)는 변화의 본질을 약관의 청년시절부터 이미 알았던 것 같다. 본인은 무대뽀 정신만 가졌었다고 자신을 낮추지만 먼저 변화의 전선을 무너뜨리기만 한다면 균형 맞추기는 문제없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가 경영 현장에서 균형을 잡았을 때쯤엔 이미 변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이요 성공이었다. 하니 변화를 향한 과감한 결단, 몸을 사리지 않고 파고든 도전,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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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원버튼 이원만 대표 

 

대전 소재 한 단추공장 ()유창양행에 취업한 것이 제 오늘의 첫 단추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하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때지요. 직장생활을 일찍 시작했어요.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후 복직했는데 그 얼마 후 결혼으로 이어졌고요. 가장도 되었으니 직장생활에 충실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 뇌리엔 늘 독립이 맴돌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독립할 만한 무슨 특별한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창업 할 밑천이 마련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어영부영 적당히 묻어가는 것은 시간 낭비란 생각이 들었어요. 딱히 근거도 없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뿐이었는데요. 제가 가진 것이라곤 성실함 하나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신감마저도 그야말로 무모함이었지 싶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사표 수리를 안 해주는 거예요. 그것도 3년여나~^^”

 

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사표수리 안 해주는 회사를 3년이나 그냥 다녔다고? 요즘 세대들 들으면 과연 꼰대 세대답게 답답했다 할 것이다. 웬만한 정서로는 이해 불가의 경지. 그런데 그 시절엔 흔히 그랬다. 붙잡는다고 그냥 더 일하고, 도리 따지고 미운정 고운정 셈하느라 싫어도 쉽게 손을 털지 못했다. 하긴 요즘도 이런 계산 안 하는 우직한 인정 살아있는 곳 왜 없으랴.

내 인생의 첫 단추는 단추 

 

막연한 독립 지향, 뭐 그럴듯하게 말하면 존재 찾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공부를 하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다 자기 존재 밝히기고 그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독립을 갈망한 이유는 어떤 특별한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그냥 제 식의 길, 아니 운명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쉽겠네요. 이건 태어나 걸음마 후부터 보호를 기대하기보다 자력으로 넘어지지 않고 걷는 법을 익혀야 했던 제 세대, 즉 전후 세대들이 세상을 해쳐온 방식이었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요.”

흔히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말한다. 첫 단추 끼우기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강조한다. 이 강조, 맞는 사례 세상엔 너무 많다. 어느 시인은 인생의 첫 단추는/ 내가 가고자 한 길을/ 처음 시작한 날이 아닐까?“라고 썼다. 그런데 첫 단추 채우기가 전부는 아니다. 단추를 반드시 채워야 하는 것만도 아니잖은가. 세상엔 잘 못 끼운 단추가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고쳐 끼울 기회도 얼마든지 있다는 의미다.

“퇴사가 퇴사가 아니었어요. 조건이 붙었거든요. (주)성원버튼(82년 창업)에 중고 기계와 인력을 지원해주는 대신 (주)유창양행의 수출용 오더를 우선적으로 생산해달라는 것이었어요. 여력이 있을 경우 내수용을 생산 판매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수출용 오더를 제게 주지 않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내수용을 개발하고 생산했지요. 그렇게 1년여, 꽤나 잘 나가던 즈음 조건이 달라졌어요. 기계와 인력, 그리고 저까지 모두 복귀하라는 명령 같은 제안이었지요. 미련 없이 기계와 인력 다 돌려줬어요. 물론 저는 남았죠. 독립다운 독립을 위해.” 

 

그렇다고 해서 ()유창양행과 딱 자르듯 끝난 것이 아닙니다. 원료 가공에서부터 완성품까지 생산 시설을 갖출 여력이 없던 저로서는 가공하기 직전 단추원료 브랑크를 공급받아야 했거든요. 일단 공장을 다른 장소에 이전 설립하는 것으로 제 길로 한 걸음 더 나선 겁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란다. 그 중에 아주 현명한 사람은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랄 것이다. 이기고 지는 일은 남과의 일이다. 오직 스스로를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것 모르는 사람 없다. 이원만 대표, 그는 스스로 어려운 길을 개척하고 자신을 이겨냄으로써 지금 이 자리를 닦았다. 그는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자기에게 있을 것이고 실패할 조건도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생적으로 알았던 것일까?

 

누구나 자신을 이기고 싶겠죠. 실천이 문제일 것이고요. 저는 어떤 방법을 연구할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어요. 성격상 아주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요. 아주 현실적은 상황 판단만 하고 필요하다 싶은 결론이 서면 곧바로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지요.”

이원만 대표는 타국 인도네시아에서 임대 공장을 가동한 것이 2002, 그리고 부지를 사서 공장을 신축하여 확장 이전한 것이 2006, 그의 용단이 얼마나 빠르고 행동이 얼마나 과감한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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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버튼 공장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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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원버튼 인도네시아 공장 내부 

 

한국에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장을 몇 번 이전했어요. 가까스로 독립해 운영하던 경기도 광주 동부읍(현재 하남시) 소재 공장이 198412월 옆 공장 발화로 전소되다시피 했어요. 파괴 없는 건설 없다 하잖아요? 변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은 제게도 특수를 누릴 기회를 제공했고 덕분에 확장도 했습니다. 그런데 토지개발공사 대지 수용 명령으로 공장을 이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은 상수원 문제로 이전해야 했고, 다시 두 번을 더 이전하고야 지금의 한국 공장 ()성원버튼이 존재합니다.”

 

흐름 읽기와 순응의 묘


이원만 대표는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 중에도 굳건히 지킨 원칙이 있다. ‘천지 자연 현상은 다 변한다는 말 빼고는 다 변한다는 주역의 진리 같은 일관된 원칙이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투자를 거듭하는 중에도 다른 업종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오직 단추 산업이란 한우물 파기에 집중했다.

이익이 더 큰 업종도 있겠고 흐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눈 돌릴만한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오직 제 관심은 우물을 깊게 파야 가뭄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그런 논리에 뿌리 박혀 있었어요. 무엇보다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것만이 지속적인 존재가치를 발휘할 것이라 믿은 것이지요. 좋은 제품은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탄생할 것이고요.”

지금 생각하기에 가장 과감한 투자는 공장에 불이 난 다음이었던 같아요. 화마가 덮친 곳에서 고쳐 쓸 수 있는 기계를 수리하는 한편, 이탈리아 산 좋은 기계 수입에 눈을 돌렸어요. 당시 서울 00동 아파트 한 채 값을 호가하는 고가의 기계였는데요. 지금이야 비싼 수입 기계가 공장 곳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만, 형편이 어려웠던 당시는 단 한 대 마련에도 거듭 고심해야할 상황이었거든요.”

 

이원만 대표는 초지일관 지키는 원칙 하나를 내비쳤다. 합리적인 가격과 적기 납품이 그것이다. 과욕을 덜어낸 결과리라. 나름 좋은 시설을 갖추고 좋은 제품을 생산할 바탕을 갖췄는데 가격도 합리적이고 납품 기일도 철저히 잘 지키겠다는 다짐, 이 얼마나 멋진가. 이야말로 당연하지만 생산 현장의 지키기 어려운 묘리요 진인사대천명의 진수 아니랴.


지금은 지퍼가 상당 부분 잠그기 기능을 점유하고 있어요. 어떤 역사학자는 지퍼의 출현을 인류의 혁명이라고 강조하기도 하잖아요? 저는 지퍼의 출현을 단추와 잠그기 기능의 멋진 양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양립으로 인해 멋과 포인트 측면에서 단추의 역할이 더욱 도드라졌다고 보거든요. 단추쟁이만의 이기적 논리일까요?^~^”

단추, 반드시 채워야 할 단추가 있다. 열어 두어도 괜찮은 단추도 있다. 선택의 폭이 각자에게 달린 단추도 있다. 열어 둘 것인가? 채울 것인가? 열어 자유로운 느낌을 발산할까 아니면 잠금으로 단정한 맛을 살릴까. 단추에 깃든 사용자 선택의 미학이 참 귀엽다.

단추 역사 역시 매우 흥미롭습니다. 옷을 여미는 기능을 훌쩍 뛰어넘었거든요. 권력의 상징으로 쓰였는가 하면, 일반적으로도 신분의 고하를 나타내는 장식으로도 쓰였지요. 특히 로마시대에는 장식의 역할이 강했고요. 1만 개가 넘는 금단추 장식옷을 입었다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나, 48개 금단추 장식 장갑으로 권력과 부를 보여주었다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단추의 기능을 극대화한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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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완성된 단추 


결단력과 무모함 사이

 

“인도네시아 진출은 창업 20년만인 2002년이었어요. 투자라기보다는 활로 찾기였지요. 1995년경부터 한국 내 단추 수요가 눈에 띄게 줄었거든요. 80년대 후반 인력 집약 산업의 하나인 의류 생산 산업이 대거 해외로 진출한 영향이 컸던 것입니다. 저도 해외진출 계획을 세웠어요. 1차 중국에 가서 상황 파악을 했고, 2차 베트남으로 날아가 실태를 살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베트남으로 이전하려고 할 때였는데요. 우리 회사 제품을 적극 사용하던 거래처 사장께서 인도네시아가 비교적 괜찮은 조건을 갖췄다는 정보를 주더군요.” 

 

이원만 대표와 인도네시아 인연은 IMF 이전이라고 했다. 인도네시아 삼성 계열사에 납품한 버튼 때문에 일주일여 출장 기억을 떠올렸다. 첫 방문자에게 심한 배탈 설사를 선물했던 곳, 그러나 지금 그에게 인도네시아는 참 감사한 나라라 했다. 고희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 은퇴를 생각해본 적이 없게 한 나라.

남들은 제게 결단력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들추자면 결단력이라기보다 무모함에 더 가까울 거예요. 20019월에 법인인가신청 및 중고기계반입허가를 인도네시아 당국에 신청했어요. 20021월 기계선적 후 2002년 기계설치 완료 까진 비교적 순조로웠습니다. 그때부터 진짜 도전이 시작되었고요. 생산 준비는 무난히 마쳤지만, 정작 사줄 곳이 없었으니까요.”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현지인 영업직원을 채용한 후 사전 한 권 놓고 소통을 시작했고, 기사 한 사람 대동하고 이국의 낯선 길을 구석구석 헤매고 다녔으니까요. 오라는 사람은 없었어요. 인도네시아 한인 봉재협회(KOGA)에서 발행한 책 한권 들춰 가며 매일 갈 곳을 정했지요. 그렇게 6개월여,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갖춘 장인 정신과 실천력이라면 그를 만난 사람들에게 곧 진실이 전달되었을 것임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반응이 좋아지자 역시 그의 특기대로 시설을 업그레이드 했고,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를 소화할 수 있는 양질의 기계도 증설했다. 2006년에는 드디어 지금의 공장 위치에 대지를 사고 신축을 했는데 이야말로 경쟁력의 참다운 바탕이었다 한다.

“2023
년 현재, 7시간 기준 일일 생산량이 평소 13십만 개 정도입니다. 성수기에는 2백만 개까지 생산할 수 있는 시설 규모고요. 그간 애용해주신 거래처와 관계자 모든 분들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 큽니다. 특히 기계와 한 몸처럼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들을 바라보면 흐뭇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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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 직원들 

 

효와 다복


이원만 대표와 필자는 38, 그러니까 대략 40여년 교분을 나눠온 사이다. 그야말로 팔팔하던 청년시절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이란 기치를 내건 한국청년회의소(JC) 일원으로 만났다. 그는 중소기업 청년 창업자요, 필자는 학원을 운영하는 청년 서예가였다. JC OB 회원이 된 40세 이후에도 또 다른 단체의 일원으로 인연이 이어졌는데, 공교롭게도 1년을 사이에 두고 다시 인도네시아에서 함께 재외동포가 되었다. 개인적 인연을 들추려는 게 아니다. 그의 도타운 인정을 오랫동안 봐왔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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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JC 활동을 함께 했던 회원들과 

 

충남 당진이 고향인 이원만 대표는 5남매, 3남 2녀 중 차남이다. 옆에서 본 그의 가족사랑은 참 놀랍다. 차남이지만 초지일관 장남 역할과 부친께서 작고하신 뒤에는 가장 역할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홀로 남으신 후로는 고향에서 서울로 모셨고, 치매를 앓게 되자 인도네시아에 집을 신축해 모셔왔을 정도다. 어머니를 향한 효심은 92세로 수를 다하실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인도네시아 공장 신축과 주택 신축, 한국 공장 신축 등 연이은 공사로 제게 심각한 건강 위기가 닥친 적이 있어요. 지금은 이렇게 무난하죠. 다만 아내가 치매 노모를 돌보다 어머니를 안고 쓰러지면서 다쳤어요. 괜찮을 거라는 본인의 말만 믿고 제때에 치료를 못하다가 어머니 작고하신 후 2012년에야 수술을 했는데, 치료가 늦은 때문인지 지금도 후유증이 있어요.” 


“팔불출이라 해도 좋은데요. 이래저래 아내에 관한 고마움이 정말 큽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사업 한답시고 바쁜 남편 대신 두 아이(1남 1녀)들 도맡아 키우고, 어머니 모시며 집안 대소사까지 잘 챙겼거든요. 형제들 돕는 것에 관해서도 묵묵히 제 뜻을 이해해줬어요.”


박금신 여사, 필자도 익히 안다. 인정으로 치면 이 대표에 견줘 한 치도 모자람 없을 분이다. 행사가 있을 때나 여행을 다닐 때도 자상함과 솔선수범이 빛난다. 결혼 후 여태껏 아침 6시 부군의 따뜻한 아침식사 차리기를 한 번도 거스름이 없음은 별빛 초롱초롱한 밤하늘 같은 사실이다. 그림자 같은 내조, 조용한 내조라 하면 바로 박 여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지~.

첫째가 딸인데 상명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고양시에서 독서실을 운영 중입니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주립대학에 수학했던 아들은 현재 한국 ()성원버튼 대표를 맞고 있는데요. 인도네시아 법인 이사직도 겸하고 있어 자주 오갑니다.”

제가 복을 참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손자 손녀들 때문이에요. 아들 며느리와 딸 사위가 각각 손자 손녀를 안겨주었어요. 나이 먹은 증거일까요? 자라나는 손자 손녀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자주 영상 통화를 하는데도 가까이 보고 싶어 한국으로 날아가기도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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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녀와 즐거운 시간 

 

기회의 땅 가능성의 나라,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장년층 중에는 인도네시아 현실에 만족을 느끼는 분들 참 많다. 은퇴할 나이에도 찾으면 할 일이 있음에 기회의 땅 가능성의 나라임을 인정한다. 이 대표는 주문량이 조금 줄어도 순환이려니 하고 편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도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이제 곧 아들이 인도네시아 법인도 운영을 맡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던 일이니 뒤에서 도우면서 좀 더 삶의 후반기를 즐겨야죠.^~^ 아들에게 맡기고 난 후엔 전적으로 아들을 믿을 겁니다. 좋은 아이디어로 새로운 일에 진출한다 해도 그건 아들의 재량이죠. 다만 아들이 항상 처한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라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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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 신축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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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지인들과 


마침 인도네시아 법인에서 업무 중인 아들 이상기 이사에게 몇 가지를 뭉뚱그려 물었다.

여러모로 참 감사한 일이죠. 아버지께서는 제 뜻대로 공부할 수 있도록 다 해주시고 지금까지도 후원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다만 지금 경영 수업 중인 단추 생산업이 제게 꼭 맞는 일인지 아직 확신이 부족합니다. 인도네시아 생활에 관한 아내의 의견이나 아이들 교육 문제도 아직 저울추가 애매하고요^~^.”

그러나 지금까지 아버지가 일구신 업적과 단추 생산업에 관한 가치야 충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결단력과 성실함에 관해서도 존경하는 마음 크고요. 잘 공부하고 익혀서 아버지의 업적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내지 않으려 노력할 겁니다. 제가 아버지 나이쯤일 때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펼칠 수 있도록 해야지요.”

 

단추 채우기, 조화요 합 맞추기다. 와이셔츠 단추를 천천히 끼우며 하루 일을 가늠하는 경영인들 많으리라. 떨어지면 다시 꿰맬 수 있고 잘못 끼웠다면 풀어 다시 끼울 수 있는 단추, 속도와 효율에서 훨씬 뛰어난 지퍼가 있음에도 가진 역할과 가치를 굳게 지키는
단추, 우리들 삶의 호흡을 조절해야 하는 이유 단추의 미학에서도 넉넉히 새겨 진다.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성원버튼 이원만 대표를 통해 살펴본 귀한 시간이었다. 함께 대담에 응해주신 이 대표와 이 이사의 덕에 감사한다. 가족에게는 건강과 평화, 회사에는 무탈과 번창하심을 믿으며 이만 가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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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 이 글은 <인니 한인 사회가 보유한 소중한 자산 기록하기> 일곱 번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재인니한인회가 주최하고, 재인니 한인상공회 KOCHAM이 주관하며 자카르타 경제신문이 후원합니다. 예술가의 시각으로 탐문하고 기록하는 경영 현장과 경영인들의 창의력과 실천 능력, 다음 편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경영탐문 내용은 영상으로 제작되어 You Tube 채널 <손작가 TV> 경영탐문 섹션에 업로드 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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