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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유튜브와 通한 서예가… “무엇이든 소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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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017회 작성일 2021-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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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와 通한 서예가… “무엇이든 소재가 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서 활동 서예가 손인식
2018년 채널 만들어 대중과 소통
구독자수 감추고 광고도 안 붙여
돈 좇는 유튜브 세태와 거리두기

2000년 UI초청전 계기 해외 눈돌려
2003년 인도네시아로 활동지 옮겨
“새로운 세계서 더 많은 자극제 찾아”

‘인니 산나루에 사는 서생’으로 소개
2020년엔 트로트 가수 주제 작품활동
“평범한 삶서 가치 찾는 것 즐거워”
 
서예가 손인식이 인도네시아 자와바랏주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모습. 작가 제공
 
<서예와 유튜브의 만남. 이 어울리지 않을 듯한 조합에 일찌감치 도전한 이가 있다. 소통보다 돈에 방점을 찍는 유튜브 세태와 거리를 두려는 것일까. 구독자 수를 감추고 광고도 나오지 않는 채널이지만, 업로드된 200여개 동영상의 누적 조회수는 200만회가 넘는다. 그는 바로 인도네시아 거주 서예가인 인재(仁齋) 손인식이다. 손 작가는 2018년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한글로는 ‘산나루’ TV, 영어로는 ‘Calligraphy Maestro’(캘리그라피 마에스트로)라는 ‘온라인 현판’을 내걸고 유튜버로 변신했다. 그를 전자우편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서예가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 전후, 그는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서예가였다. 한국서예협회 초대 작가로, 주요 단체전과 개인전을 수차례 가졌다. 서예대전 심사위원장을 지냈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청와대 영빈관 앞뜰에 놓인 표지석도 그의 휘호다. 그러다 2000년 인도네시아국립대(UI) 초청 전시를 계기로 해외활동을 결심, 2003년 인도네시아로 활동지를 전격적으로 옮겼다. 그렇게 한국서예협회에도 해외 지부가 만들어졌다.

그는 “나이 48세, 한창 때 모든 것을 뒤로하고 활동지를 옮긴 것을 주변 작가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세계에서 더 많은 자극제를 찾고 작품을 탐구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품의 변화가 있었다. 이주 초기 한글을 응용한 퓨전 작품, 서예의 본질을 더 깊고 분명하게 드러내야겠다는 자각, 인도네시아 오래된 나무를 이용한 서각 작품, 프레임까지 작품화한 시도, 인도네시아 전통 옷감인 바틱(Batik) 천을 응용한 시도 등이 작품에 녹아들었다”고 설명했다.

어느덧 18년이 흘렀다. 이제 그가 바라보는 서예의 대중기반은 해외 현지인, 교민, 고향의 한국인으로 넓혀졌다. 그의 유튜브도 한국의 침체된 서단 분위기와 달리, 대중친화적이며 활발하다. 작품세계, 여행 이야기, 미술작품을 보는 법 등 다양한 콘텐츠가 자주 업데이트된다. 가뜩이나 작업실에서 고독하게 작업하는 작가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쳐 ‘골방 작가’가 된 상황과 달리, 해외에서 유튜브로 소통해온 내공이 언택트 시대를 맞아 그를 더 눈에 띄게 만들었다.
 
'고향만리'
 
서예기법인 번지기와 금석기(金石氣: 모필로 금석에 주조하고 새겨 나온 글자처럼 질박하고 고졸한 기식을 갖춘 것. 획 주변이 까칠하거나 잘게 갈라져 보인다)를 설명하며 “서예는 선의 예술인 만큼, 선의 질감에서 느껴지는 자연성을 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번지기에서는 부드러움을, 금석기에서는 단단함을 느껴 보라는 그의 설명에, 독자들은 “서예가 이렇게 무궁무진한 줄 몰랐다”, “뜻과 의미를 알고 보니 깊이가 느껴진다”라며 정성어린 호응을 댓글로 남긴다.

그는 어쩌다 ‘소통하는 서예가’가 됐을까. 그는 “1999년에 서예 전문 포털사이트 ‘서예로’를 만든 적이 있다. 20여년 블로그에 글을 쓰고 소통했다. 유튜브는 지금까지 제가 하던 어떤 방법보다 좋은 소통 창구”라고 했다.

영상 속 그는 특유의 달변으로 막힘없이 쉬운 설명을 한다. 일상 소재로 대화하다가도 고전을 녹여낼 때면 관록이 흐른다. 탈권위와 대중소통, 자유를 즐기니 인간미가 묻어난다. 그는 블로그에 스스로를 ‘천방지축 서예가’라 적어놓고, 동영상에서는 “인도네시아 산나루에 사는 서생”이라 소개하며 자신을 낮춘다. 매년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작품을 만들어 왔는데, 지난해엔 트로트 가수 조명섭을 주제로 삼더니 올해엔 댓글들로 작품을 할까 구상 중이라 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삶에서도 소재를 찾아 그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저는 즐겁다”고 말하고, “무엇이든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입문자들을 격려한다. 그렇게 자연과 인생사를 서예에 담고 싶은 꿈을 사람들과 공유한다. 계보를 잡고 학파를 따지는 기존 서단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어떤 형태가 됐건, 사회와 함께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는 그의 철학을 듣고 나면 그의 행보가 이해된다.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은 책상에서 만들어진 묵향과는 뭔가 다른, 자연의 묵향이 느껴진다.

그간 한국 서예는 침체기를 겪으며 예술 영역에서도 지워지는 듯했다. 그러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서(書)’ 전시 등을 계기로 한국 미술사에서 서예가 차지하는 자리를 재확인했다. 그에게 한국의 현대 서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물었다. 그는 “과도기”라고 답했다.

“문화엔 언제나 변화가 온다. 마티에르(질감) 효과를 낼 수 없는 평면 조형예술이었던 서예에 그런 것들을 도입하며 재료를 뛰어넘고, 번지는 종이인 화선지가 스스로 자아내는 우연성을 받아들이거나 파괴하면서 작가의 심상을 노래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변화, 퓨전의 바탕이 돼야 할 기본인 조형에 대한 공부, 문학에 대한 자기 고뇌 부족으로 전통과 현대 둘 다 잃거나,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자연도태되는 것도 생길 것이고 일부는 다듬어지며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과도기”라고 했다. 그는 현대 서예를 이끈 인물로 2019년 작고한 도곡 김태정을 꼽았다.

사실 서예는 세계미술시장에서 아시아만의 전통과 개성, 유구한 역사가 담긴 예술로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그중에서도 예술로서 한국 서예의 가능성은 그 뿌리가 중국, 일본보다 튼튼하다. ‘서법(法)’이라는 용어를 쓰는 중국, ‘서도(道)’라고 부르는 일본과 달리 일찌감치 예술(‘서예·藝’)이라 부른 곳이 한국이다.

그는 “해외 현지 기자마다 물어보는 것이 한국 서예는 중국, 일본의 서예와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저는 한마디로 민족의 기질과 정서가 다른 만큼 다르다고 말한다. 한국의 서예는 감성이 강하다. (중국의) 법을 초월하고, (일본의) 도를 능가해, 얽매임 없이 노니는 것이 한국의 서예”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인이 지닌 감성적 측면을 잘 어필해야 한다. 한류를 이끄는 영화나 드라마, 음악 등에서 너무도 잘 살려내고 있는 점”이라고 했다.

서단의 변화 노력을 전제하면서도 그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한국 정서와 기질을 가졌고 역사와 문화를 잘 체득한 예술인들이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자기 예술로 재생산한다면, 어느 장르에서건 한류 명작이 이어지지 않을까요.”
 
*본 내용은 세계일보 김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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