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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미국 아닌 인도네시아 선택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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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587회 작성일 2019-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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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닌 인도네시아 선택 이유 2
 
사람사는 곳 어디나 다 고향
 
산나루 서생
 
안녕하세요? 산나루 서생입니다. 지난 이야기를 잇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인도네시아는 군도 국가로서 1만 7천여 개를 헤아리는 섬으로 이루어진 나랍니다. 국토 크기와 인구 세계 4위를 자랑하는 대국 인도네시아죠. 수도 자카르타가 자리한 자바섬에는 전체 인구가 1/2 이상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자바섬에서 가장 길다고 알려진 강 이름이 뱅아완 솔로입니다. 바로 이 강물에 따르는 전설이 있어요. 이 강물을 마신 사람은 반드시 인도네시아로 다시 오게 된다는 설이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제가 인도네시아에 다녀간 뒤 바쁜 활동으로 피곤이 겹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인도네시아 생각이 났습니다. 그즈음 일 욕심 많은 제게 일이 건강을 위협했어요. 당시 많았던 것이 40대의 과로사인지라 어느 순간엔 이게 남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엄습하더라고요. 그때마다 제 뇌리에는 인도네시아 한인들이 사시는 너른 집이 생각났습니다. 적절한 습도를 섞은 변화 적은 기온이 그리웠습니다. 낮은 인건비로 인해 기사와 가사 도우미까지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떨치기 쉽지 않았어요.
 
그러던 차 2001년 환우 중이던 어머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주제로 전시를 준비하던 때인지라 참 안타까웠지요. 2002년 5월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전시와 함께 책 <어머니의 빛>을 출간하고 저는 마음속으로 인도네시아 행을 결심했습니다. 제 버릇 이미 앞 영상에서 밝혔죠? 무슨 일을 계획하면 저는 곧 바로 컴퓨터 폴더부터 만듭니다. 그리고 자료 수집하며 실행에 돌입하죠. 저는 그해 12월 성적처리를 마친 것을 계기로 자카르타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말로는 머리 좀 식힐 겸이었지만 내심 이주 준비에 돌입한 것입니다. 하여 제 나이 49세 3월 30일 한강변에 개화하기 시작한 차창 밖 벚꽃을 눈길로 어루만지며 아내와 딸과 함께 공항으로 달렸습니다. 나이 50까지 책 10권 발간이라는 40대의 목적에는 아직 한 권이 미달이었고, 나이 50부터 10년 간은 해외 활동이라는 계획 시한이 아직 1년이 남은 상황에서 훌쩍 서울을 떠났던 것입니다.
 
▲2002년 출간한 어머니의 빛 
 
여러모로 살펴도 사람이 일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사는 것이 바로 일이잖습니까? 자기가 할 일을 얻는 것은 공부의 지극히 현실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좋은 스펙을 쌓고 능력을 갖추려는 것은 결국 적재적소에서 활용하기 위함이니까요. 특히 젊은이들에게 취업이란 참 중요합니다. 따라서 취업난이 해소되지 않는 한국의 현실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취업의 눈을 돌립니다. 이런 차제에 한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 인도네시아 시장 크기와 성장 가능성을 높이 삽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도네시아에는 대사관에서 파악한 한국인 기업 숫자만 해도 2.200여개를 헤아립니다. 업종도 매우 다양해요. 봉제업, 신발산업, 가발업, 전기 전자, 기계 부품 등의 제조업들이 기틀이 단단하죠. 건설업도 꾸준하거니와 도소매업 금융 및 보험업 서비스업 등도 나날이 확장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곳 크고 작은 회사에는 한국의 관련 학과에서 끊임없이 인턴과 연수 요청이 옵니다. 재학생과 졸업생들 타국에 소재한 한국기업 현장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자 하는 요청이 오는 거죠. 어느 면으로 보나 참으로 상호 도움이 될 부분입니다. 그래서 6개월 인턴으로 온 젊은 아가씨가 어느새 현장 책임자로 또는 개발자로 멋지게 성공한 사례가 보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부 이야기라는 것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상당수가 정해진 일정이나 채우고 떠나거나 어렵게 취직으로 이어졌음에도 이국의 환경, 현장의 수고로움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근무지가 지방이라는 이유도 떠나는 이유입니다. 그중에는 가족이 그립다고 일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업을 이끄는 분들의 바람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높은 스펙이 아닙니다. 타국에서 자기 미래를 가꿔보겠다는 절대적인 의지입니다.
 
제가 인도네시아를 선택할 때는 참 많이 늦은 시기였죠. 제 나이 49였으니까요. 저는 그때 성대 유학대학원 부설 동양문화 고급과정 서예 강사, 강원대 미술과, 한성대 미술과, 세 곳 대학에 출강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 멈췄지요. 매주 연수를 하는 초등학교 선생님 팀도 세 곳이었는데 그도 멈췄습니다. 아내가 도맡았던 대치4동의 서예 한문학원은 이양했으며 별도의 제 연구실도 문을 닫았습니다. 서예전문 포털사이트 주)서예로는 어렵게 운영을 잇던 차라 그 참에 도메인을 내렸고요. 서예전문 월간지 <까마>의 편집 주간과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기획위원도 다 물러났습니다. 실속이야 어쨌든 제 능력보다 책임이 막중했던 역할들 다 내려놓고 지금의 과거 그때는 알 수 없는 미래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 것입니다. 너무 무모했던 것일까요? 그냥 운명적인 힘에 이끌린 것이라고 할까요? 저는 그때 만해선사의 오도송으로 알려진 시를 자주 읊었습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다 고향이거늘, 그 누가 떠도는 나그네라고 한탄하는고. 한 소리 질러 삼천 세계를 허공에 날리고 보니, 눈 속에 복사꽃잎 조각조각 날리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裏桃花片片飛(남아도처시고향 기인장재객수중 일성갈파삼천계 설리도화편편비)
 
어찌 감히 대선사의 오도송에 제 당시 현실을 빗댈 수야 있겠습니까만 참 많은 위안을 삼았던 시입니다. 7언 절구인 28자 이 한시는 해석자에 따라 해석문 어구가 조금씩 다릅니다. 앞에 읊은 내용은 전달하기 편하도록 제 나름으로 해석을 붙인 것이니, 강호의 대가들께서는 문법에 어긋난 오역이라고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저는 지금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 이런 곳에서 사느냐란 말을 들어가며 공기 좋고 풍광 좋은 인도네시아 작은 산마을에서 삽니다. 아주 조촐하지만 나름 잘 살고 있죠. 어쨌든 인도네시아 이주 후 자카르타 생활 10년, 그러니까 지금 살고 있는 이 산마을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기 이전 10년은 정말 다사다난 다사다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열정을 불태운 한 때였습니다. 정말 절망이 컸기에 또한 보람도 큰 시기였습니다. 스스로 마음이 내켜 이주했으니 온몸으로 견뎌야 했고, 그래서 분명 새롭게 무엇인가를 쌓은 10년이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있어 인도네시아와 인연이 되었다면 저처럼 운명적인 힘에 이끌렸다 치십시오. 모름지기 전력을 기울이게 되지 않을까요? 누구라도 이주를 원한다면 지금 그 생각을 잘 살핀 후 실천하세요. 생각의 실천엔 분명 멋진 창작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음 영상에서는 청년 일자리에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과정(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이하 GYBM)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한국인 젊은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장의 일꾼으로 거듭나는지 살펴보도록 하시죠.
 
제 인도네시아 이야기는 인도네시아 풍정과 한인들의 실생활이 주 주제입니다. 주재원을 재외한 청년들의 취업이나 자영업의 세계, 은퇴자 이주 등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미 겪은 체험에 식견을 갖춘 분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삼겠습니다. 앞 영상에서 밝혔듯이 때로는 필요한 분을 찾아가서 대담을 나누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 구독과 좋아요 버튼 누르시고 다음 영상도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산나루 서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아래 https://youtu.be/IqZq0r5NNpE 영상 내용을 고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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