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세한도, 그림 한 점에 댓글이 1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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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그림 한 점에 댓글이 10m
산나루 서생
안녕하세요? 산나루 훈장입니다. 요즘 참 댓글이 많은 시대죠? 그럼에도 댓글 길이가 10m라고 하면 좀 놀라시게 되지요? 그런데 댓글이 열개 백개라면 몰라도 10m라고 하니 이거 뭔가 이상하죠? 댓글이 약 10m인 작품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입니다.
어떻게 해서 작품 한 점에 무려 10m의 댓글이 달릴 수 있었을까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추사 선생께서 당시 중국어 통역관이던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그림을 한 점 그려줍니다. 추사 선생께서 제주도에서 5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1844년 환갑을 바라보던 나이였고요. 그 그림이 중국으로 일본으로 떠돌다가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죠. 스승으로부터 귀한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다시 청나라에 가는 길에 그 그림을 가져갑니다. 추사 선생이나 자신과 교분이 깊은 청나라 학자들에게 그 작품을 보입니다. 그러자 그 작품을 보는 이마다 댓글을 답니다. 그 작품의 품격과 거기에 스민 사연 때문에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었겠죠. 특히 그들이 놀란 것은 작품 속에 드러난 추사였습니다. 장기간 유배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것으로 여겼지만, 추호도 비루함 없이 도도하고 단단함이 드러난 작품을 보며 놀랍고 존경하는 마음의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스승 박제가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정치가이자 서예가임은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 또한 복제품도 많거니와 책을 통해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추사 선생은 당시 왕의 친척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았고, 그 총명함으로 왕에게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양자를 갔는데 연이은 초상으로 인해 상복을 입고 산 시절이 많고 여차저차 마음고생도 많이 겪었지만, 24살 나이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 머물며 경학과 고증학, 금석학, 서예 등 다 방면에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벼슬길도 남다른 데가 많은 정치가였습니다. 저는 제목에 충실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는 여기서 그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이나 갖은 자료에서 찾아보실 것을 권합니다.
요즘 말로 금수저인 그가 머나먼 땅 제주도에서 유배생활 5년째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한양에서 제주도까지는 육지로도 먼 길이요, 뱃길로도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부인이 한양에서 지어 보낸 옷가지는 철이 지나서 도착하고 귀하다고 아껴서 보낸 음식은 부패해서 도착했습니다. 귀하디귀한 아이들 보고 싶은 아이들 교육이란 그저 편지로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추사 선생에게 낙이란 책을 읽는 것과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극진히 모시는 이가 바로 위에서 밝힌 제자 우선 이상적입니다. 그는 중국어 통역관이란 직책으로 당시 청나라를 12번이나 오간 사람입니다. 그는 청나라에 갈 때마다 독서광 스승을 위해 책을 모았습니다. 하여 머나먼 청나라에서 발간된 신간을 제주도에 유배 중인 추사 선생이 읽을 수 있었던 거죠
세한도 탄생이 바로 그 책들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 제자 이상적을 향한 스승 추사의 고마움에 사무친 마음 때문이라고 해야겠네요. 이상적은 그 먼 나라에서 책을 구해 마차에 싣고 왔을 것입니다. 다시 짐꾼을 부려 제주까지 보내겠죠. 그 지난한 일을 예삿일처럼 감행하는 이상적을 향한 추사의 마음을 표현하려면 어떠해야 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날씨가 좋으면 한양에서 남해안까지 육지 길이 보름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육지에서 제주까지 뱃길도 멀었지요. 육지에선 혹한과 혹서, 비바람, 바다엔 풍랑이 방해를 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책을 나르는 이들이 신체에 탈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렇더라도 한양에서 제주도 서귀포 대정리의 추사 적거지에 책이 도착하려면 족히 20여일을 소모해야 했을 것입니다. 세한도를 그리는 동기가 된 책은 <황조경세문편>이란 책으로 무려 120권 한질로 적지 않은 양이었습니다.
당시 한양의 대갓집에 팔면 청나라를 오간 수고비쯤 거뜬히 챙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귀한 책이고 많은 양입니다. 이 책을 받은 추사는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아니 뭐 요즘처럼 전화를 걸어 고마워 어쩌고 할 수 있는 때도 아니었으니까요. 추사는 조용히 붓을 듭니다. 생각이 깊어 한없이 먹을 갈았을까요? 진하게 갈린 먹을 물을 타지도 않고 붓에 찍습니다. 그리고 운필을 시작합니다. 메마른 듯한 먹선을 허둥댐이 없이 떨리는 듯 곧은 선을 긋습니다. 적묵법을 씁니다. 진한 먹을 찍은 붓을 강약을 조절하는 노련한 터치로 먹을 쌓기도 하고 명암을 드러내는 필법입니다.
뿌리가 드러난 잎 성근 늙은 소나무 한 그루 그립니다. 그리고 고목 소나무와 벗한 건강하고 줄기 곧은 한 그루를 붓에 힘을 주어 그립니다. 이 두 나무에 아우른 집하나 덩그러니 그립니다. 원근법 따위는 초월한 집모양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건너편에 젊은 잣나무 둘을 그립니다. 가깝고도 먼, 멀고도 가까운 잣나무 두 그루는 그저 반대편 늙은 소나무와 그 곁의 싱싱한 소나무를 건너다봅니다.
차라리 없었더라면~~~~~ 마음 편했을까요? 바닥의 거친 갈필 몇 선 황량함을 더합니다. 세찬 바닷바람이 불었던 걸까요? 아니면 초설이 스쳤던 것일까요. 추사의 심상이 거기 잡힐 듯합니다. 다른 집도 다른 나무도 그리고 풀도 없는 황량하고 차가운 그림, 추사는 거기에 歲寒圖(세한도)라 제목을 붙여 추운시절의 그림임을 밝힙니다. 세한은 해가 바뀌는 계절 추울 때입니다. 거기엔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주야), 즉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논어 자한편 공자의 말이 의미를 더합니다. 이를 압축한 세한도 석자에서 우리는 추사의 세상을 향한 말없는 헛기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너는 왜 아직 내 곁에 있느뇨? 권력과 부를 좆아 다 제 갈 길로 갔는데, 바다 건너 버려진 늙은이를 향한 자네의 절개는 변함이 없구나. 자네의 이 참된 선비의 진면목을 어찌해야 좋을꼬.
그리고 제목 옆에 덧붙인 추사의 한마디 ‘蕅船是賞(우선시상), 우선이여 이 그림을 감상하시게.’ 추사 선생은 왜 하필 우선이란 한 사람의 아호를 써넣었을까요? 유독 제목 옆에 칼금처럼 단 한명의 아호를 새겨 넣어 그에게 감상하라 당부를 했을까요. 새길수록 참 마음이 저려오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이 세한도입니다. 10m의 댓글이 붙을 수밖에 없었던 세한도입니다. 또한 국보로 선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것이고요.추사 선생은 그림을 마치고 그 왼편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정을 적습니다. 이 화발이야말로 추사 예술의 정수를 또 다시 보여줍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읽게 되는 명문장입니다. 읽을 때마다 감상자의 심금을 울리는 글 어째야 좋을까요?
엄정하면서도 칼칼하게 쓰인 해서는 또 어떻고요. 절제미 정수요 균형과 변화의 표상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단아하고 단단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숨결 고르게 자신을 유지합니다. 이는 모든 추사 글씨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그 절정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서예가들이 비급으로 여기며 배우는 그 많은 교본들 처음의 필의를 끝까지 지킨 고전이 몇 가지나 되던가요. 불과 몇 장을 넘기면 처음의 뜻이 흔들리는 고전 수두룩합니다. 추사의 글씨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강철 같은 의지와 변화 차분함은 한·중·일 고금을 훑어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것임에 분명합니다. 세한도를 친견한 당시 중국의 대가 누군들 감동의 찬사를 아꼈을까 싶습니다.
추사의 작품 다소 이해가 어려운 분도 분명 있으실 겁니다. 추사 서체의 특징에 관해서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상 몇 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세한도 진품을 직접 감상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97년 1월이었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기획한 눈그림 600년이란 대 기획전이 제게 세한도를 직접 볼 행운을 선물했습니다. 저는 전시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참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품된 세한도는 두꺼운 유리관 안에 보존된 상태였습니다. 눈 그림 주제의 전시니만큼 가로70.2cm 세로 27.2cm 세한도 그림부분만 유리관 안에 펼쳐져 있을 뿐 화발과 10m의 댓글은 모두 도르르 말려있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 제게는 그날의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도로에서 밀쳐낸 눈들이 길가에 무더기 무더기로 쌓인 풍경을 차창 밖으로 스치며 전주시 외곽도로를 거쳐 박물관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제 뇌리 속에 참으로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전시 현장에서 사온 책 한 권 이 책 한권이 제 서가에서 오롯이 남아 오늘 저를 조금은 행복하게 합니다. 눈 그림 분명 세한도의 제목처럼 추운 때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눈 그림 속에는 놀랍게도 따뜻함과 포근함이 넘칩니다.
저도 한 때 눈 그림에 심취한 적이 있습니다. 더운 나라에 사는 지금 특히 눈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일곤 합니다. 이 영상을 계기로 머지않아 제가 눈 그림을 그리는 영상도 만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면서 추사와 세한도에 관한 특강을 두 번 했습니다. 한국문화원과 모 대기업 인도네시아 지사의 사원을 위한 문화 특강이었습니다. 오늘 또 추사 김정희 선생과 세한도 이야기를 더듬어보니 다시 또 새롭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주제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추사 선생의 그 많은 이야기를 아끼고 줄였습니다. 더 좋은 자료로 더 많은 좋은 이야기를 찾아보실 것을 권합니다.
*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아래 https://youtu.be/-wqKRu17m-8영상 내용을 고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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