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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 좋은 작품 비밀 캐기 ① > 좋은 요리, 최고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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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051회 작성일 2019-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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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 비밀 캐기 ①> 
 
좋은 요리, 최고 모임
 
산나루 서생
 
오늘은 좋은 작품이란 과연 어떤 작품인가를 주제로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먼저 화면에 가득한 이 작품을 함께 감상하시죠. 이 작품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대련 작품입니다. 대련이란 대구가 되는 글귀를 종이 두 장에 나란히 쓴 작품이란 뜻입니다. 먼저 오른쪽부터 내용을 살펴보실까요?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 이 작품 큰 글자의 내용입니다. 뜻을 풀어보면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니라.’ 하고 써 있습니다.
 
여기에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숨어있습니다. 이 작품이 창작된 해는 1856년으로 지금으로부터 163년 전입니다. 그 즈음은 그야말로 채소가 반찬의 대부분일 때입니다. 요즘처럼 육식을 많이 하던 시절이 아닙니다. 그런데 결코 귀하다고 할 수 없는 채소반찬을 아주 큰 요리라고 강조합니다. 모임 또한 어떤가요. 그즈음은 대가족이 살던 때입니다. 모임이라 할 것도 없이 조석으로 만나는 것이 가족입니다. 일상으로 마주하는 대상이 아내와 아들딸 손자 손녀일 것임에도 이거야말로 최고의 모임이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큰 글씨 옆에 쓰인 방서에서 그 이유를 다소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해석으로 들어가보죠.
此爲村夫子 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幾人. 爲杏農書 (차위촌부자 제일락상락. 수요간두대황금인, 식전방장시첩수백, 능향유차미자기인. 위행농서).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 아니겠나. 비록 허리춤에 한 말 크기의 황금인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을 드는 사람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 이 작품을 받는 사람 ‘행농을 위해서 쓰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물론 추사 선생은 자신이 8년여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해배되어 돌아와서 다시 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2년을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더구나 작품을 쓰던 해는 추사 선생께 죽음이 닥친 해이니 이런 글귀를 떠올렸고 또 쓰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받는 분의 상황이 이런 글귀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오래된 작품 내용이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 참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련의 뒷장엔 달랑 七十一果(71과)라고 쓰고 인장을 찍었는데요 이는 글자 그대로 추사선생께서 71세를 맞아 썼다는 것입니다. 혹 과(果)자가 무슨 뜻인가 할 수 있겠는데요, 이는 추사선생께서 만년에 과천에 기거하실 때 아호를 주로 ‘과옹(果翁), 즉 과천 사는 늙은이’라고 쓴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쨌든 오른쪽과 왼쪽 두 장의 방서 즉 작은 글씨 배치는 추사 선생의 다른 대련 작품과 비교해볼 때 글자의 안배가 조금 다릅니다. 즉 보시는 바와 같이 작품에 추가하는 글을 앞장에 다 적고, 다음 장에는 상대적으로 정말 간단히 넉자만 적습니다. 이런 배치 언 듯 비율이 안 맞아 보이죠? 혹자는 별세하시던 해의 작품이라고 하니 연세가 많이 드신 때문인가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살펴보면 다분히 의도적임을 곧 알 수 있습니다. 나이나 기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우선 본문 14자의 획과 배치 또 작품 전체에서 흐르는 고고함이 전혀 나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글자를 이룬 하나하나 획을 살펴보시죠. 추사 글씨의 최대 장점이기도 한데요. 한 획 한 획이 흔들림이 없습니다. 잘 쓰려 해도 군더더기가 생기고 실수를 하면 당연히 군더더기가 생기는 것이 서예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게 없습니다. 자연미에다가 추사 특유의 놀랍도록 계산된 능청스러움이 아주 적절히 포진하고 있습니다. 기필 수필, 즉 획마다 시작과 맺음의 정밀함이야 그야말로 서예작품의 진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더해 거슬림 없는 획의 대소 변화, 뗀 듯 잇는 듯 점과 획의 기운 연결, 의도가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공간 등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이리 쉬워 보이면서도 허술함이 없는지 정말 서예 작품의 정수를 이 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느낌은 양 쪽 옆 작은 글씨에서도 같은 느낌 그대로인데요. 작가가 얼마나 철저한 실력을 닦아야 하고 또 창작을 할 때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하는지 참 많이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 영상을 보신 분 중에는 혹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으실 줄 압니다. 특히 초학자들께서는 왼쪽의 큰 글씨 중 다섯 번째 글씨 아 자에서 왼쪽으로 삐친 획을 보고 실수를 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요? 과연 그런 획이 다른 글씨 어디에 또 있나요? 유일한 하나라면 그거야말로 특수성입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멋입니다. 톡 쏘는 소스죠. 만약 그것이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 여긴다면 작품할 때 더러 그런 실수 계획하십시오. 웃을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쉬어갈 수 있는 지점이 될 것입니다. 삼복더위에 부는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될 것입니다.
 
또 다른 분은 방서, 즉 첫 장 양쪽 변에 쓰인 작은 글씨를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엉성하게 구성한 글씨가 눈에 거슬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시다면 안목에 한계를 두지 말아야라고 부탁드리고 싶군요. 혹 필경사의 정교함을 좋은 글씨로 생각하시나요? 마구 휘갈긴 행초서를 좋은 글씨로 알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제가 앞에서 “작가가 얼마나 철저한 실력을 닦아야 하고 또 창작을 할 때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하는지를 참 많이 느낍니다.”라고 말했는데요 바로 그 방서에 제 필이 더 꽂힌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살펴야 할 것은 이 흐트러짐은 흐트러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어눌함은 실력이 모자라 생기는 어눌함이 아닙니다. 이야말로 실력 짱짱한 서예가들만이 즐기는 작가의 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못 쓰다니요. 그런 심보가 어디 있어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이런 질문 있을 수 있죠?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앞으로 이 작품 감상 섹션 영상에서 수없이 반복될 부분이기에 이 영상에서도 분명히 한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심뽀가 나빠서도 아닙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뭘 까요? 그것은 본질을 찾아가기 위한 순정한 기도이자 몸부림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르의 작가들이 지향하는 자연회귀입니다. 바로 이런 본질을 향한 작가의 담금질이 더러 일반인에게는 기행처럼 보이고 엉뚱하게도 그것이 이야기꺼리가 됩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흉내 내는 사이비 작가도 생기고요. 그야말로 혹세무민이죠. 혹세무민에는 안목 없고 지각 없는 일부 방송도 한 몫을 합니다. 진정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퍼포먼스를 마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예술가의 행위 인양 보도를 하니까요.
 
모든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온 곳으로 회귀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살아서 회귀하는 것입니다. 즉 살아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행복한 것이 진리임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살아있을 때 천국을 만나고 극락을 만나는 것이 최선임을 다 압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이와 같으니까요.
 
진정한 작가가 바라는 작품의 궁극은 자기 손으로 우주자연의 순정한 이치를 표현해보는 것입니다. 말없고 욕심이 끼지 않은 자연의 경지를 창작을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그 신의 경지에 이르겠습니까? 다만 소수의 작가들이 그 경지에 다가감으로써 역사를 관통하며 추앙을 받겠지요. 다만 그 본질을 향한 작가의 몸부림이 일반인의 눈에 삐뚤하고 어색해 보일 것입니다. 쌩초보인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예술은 바로 그것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그 마음자리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면 분명 참다운 예술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기법을 배우면서 점점 초심과 멀어집니다. 아니 초심을 잃어버립니다. 노력이 안으로 향하지 않고 밖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자랑하고 싶어 하고 남보다 앞서겠다는 마음 때문 아닐까요? 도를 도라고 말함으로써 그만 그 순수한 세계가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제가 준비하고 있는 다음 영상이 있습니다. 자연회귀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다음 영상도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아래https://youtu.be/taxKZeG0rGA영상 내용을 고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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