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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서예가의 골프 만담 2] 골프 스코어, 왜 이리 널뛰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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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488회 작성일 2018-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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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가의 골프 만담 2 >

골프 스코어, 왜 이리 널뛰기야?
 
 
동반자가 미들 홀에서 더블 파를 범했다. 전 홀 파 포에서 버디를 한 후다. 전 홀보다 무려 다섯 타를 더 쳤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난주였다. 그는 18홀을 단 투 오버 스코어로 끝냈다. 흔히 말하는 그 님이 오는 날은 불쑥 언더 스코어를 작성하는 아마추어 실력자다. 그가 오늘은 스코어 17을 적어냈다. 이럴 수가? 옆에서 보면서도 이걸 믿어야 하나 싶다. 그러나 현실이다. 물론 잦은 사건은 아니다. 그렇다고 희귀한 일도 아니고.
 
“골프 성적이란 송곳 끝에 머무르는 것과 같다.”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이 말 다 긍정할 거다. 『달마가 골프채를 잡은 까닭은?』을 출간한 방민준의 말이다.  골프에서 최상의 스코어를 내는 것은 늘 순간일 뿐이란 의미다. 아마추어만 실력 유지를 못 하는 것 아니다. 골프가 직업인 프로 선수도 때로 말도 안 되는 샷을 날린다. 믿기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골프가 흥미롭다고들 한다. 그래서 도전의식이 끊이지 않는다고도 한다. 골프, 왜 한 홀 사이에도 원치 않은 온탕과 냉탕을 오갈까? 그게 왜 흥미를 끌고 도전의욕을 돋우는 일일까?
   
골프, 백 타 천 타가 다 다르다. 골프에서 꼭 같은 샷은 그야말로 꿈이다. 같은 클럽을 쥐고 같은 공을 같은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쳐도 결코 결과가 같지 않다. 비거리가 다르고 구질이 다르며 멈추는 자리 또한 다르다. 예컨대 동반자 두 사람이 동시에 파 쓰리 홀에서 홀인원을 했다 치자. 이건 누가 뭐래도 같은 결과다. 그러나 골퍼들은 같다고 말하지 않는다. 같은 것은 한 타에 홀컵에 들어간 그 결과 딱 하나뿐이기에.   
 
 ▲ 인도네시아 보고르의 에메랄다 골프장 
 
여기서 흥미가 발생한다. 도(道)의 세계가 펼쳐진다. 필자가 주시하는 창작성이 숨어있다. 필자는 서예가다. 서예창작이 직업이다. 무한 창작을 고민하고 또 즐긴다. 따라서 골프에서 흥미와 도, 창작성을 발견하고 놀란다. 골프와 서예, 둘의 같고도 다른 참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펼치는 이유다.
 
우선 골프와 서예는 정 반대다. 골프가 한 번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안정적인 결과를 바란다면, 서예는 같은 상황에서 변화가 제1의 원칙이다. 한 작가가 같은 붓으로 먹을 찍어 같은 시간, 같은 화선지에 같은 굵기, 같은 길이의 선을 그으면서 각기 다른 느낌을 추구한다. 획과 획, 글자와 문장이 균형을 이루고, 통일감을 갖춰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골프 학습은 일관됨이 목표다. 루틴, 스윙 궤도와 속도, 탄도와 비거리 등 일정하기를 바란다. 수많은 상황에 한결같은 대처를 위해 수없이 기본기를 닦는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참 모질 정도로 과정과 결과가 다르다. 이 아이러니를 흥미와 도전의식 유발로만 치부하고 말아야 할까? 에라 모르겠다 그냥 밀쳐버려야 할까?
 
서예란 느낌이 다른 선, 모양이 다른 글자들 조합이다. 균형과 통일감, 조화 넘치는 창작이 목표다. 작가마다 개성을 갖춰야 하고, 작품에 따라 추구하는 미가 달라야 한다. 작품이란 둘도 없는 유일한 하나여야 한다. 그 때문에 알면 알수록 묘미가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러니까 골프는 일관성을 지향하며 플레이하고, 서예는 다름을 지향하며 붓질을 한다. 
 
▲  言學靑山/ 청산에서 말을 배우다/ 2015년 인재 손인식 
 
두 가지에 차이가 없는 부분이 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 즐길 수 있다. 힘이 세도 좋고 약해도 아무런 문제없다. 키가 작아도 무방하고 커도 괜찮다. 뚱뚱한 사람도 어울리고 홀쭉한 사람도 마땅하다. 남과 여를 가리지 않는다. 어린아이도 즐기고 팔십 나이 노인도 즐긴다. 뒤섞여 함께 즐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각자 능력만큼 즐길 수 있다. 욕심을 버리고 자기 역량에 알맞게 다스리면 만사 OK이다. 골프와 서예 그리 다른 것이 이리 같다.
 
골프나 서예 둘 다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 마음 다스림이다. 골프나 서예는 똑같이 넘치는 힘이 필요하지 않다. 힘이란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쓰는 것임을 아주 잘 가르쳐주는 것이 골프와 서예다. 그리고 둘 다 너그럽다. 한 번의 실패로 희망이 탈탈 털리지 않는다. 실력을 갖췄다면 반드시 발휘할 기회와 만회할 기회가 있다.
 
골프는 3타부터 5타까지 칠 수 있는 홀이 18개다. 단 한 타로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는다. 파 쓰리 홀에선 첫 타를 조금 실수해도 두 번째 세 번째 타로 만회할 기회가 있다. 파 포 홀과 파 파이브 홀은 좋은 샷을 날릴 기회가 더 많다. 곧 실수를 한다해도 그 다음을 잘 다스린다면 실수를 만회하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이 골프다. 서예도 다르지 않다. 한 획 한 글자가 전부 다가 아니다. 멋진 획, 개성 만점 글자, 묘미를 발휘하는 구성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상쇠 한다. 
 
▲  인도네시아 보고르 레인보우 골프장 
 
우주와 만물의 변화는 인위가 아니다. 여유가 노니는 자연적 변화다. 사람의 변화도 자연이 기반이다. 지키려 해도 변화하고 변화 속에서도 지켜지는 원칙이 있다. 골프는 늘 그 실력을 유지하기 바라고 더 발전하기 바란다. 늘 핸디캡이 낮아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실력은 지켜지지도 않고 핸디는 바라는 것처럼 쉬 낮아지지도 않는다. 곧 플레이를 자기에게 알맞게 창작해야 한다는 암시 아니랴.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는 가르침 아니랴.
 
서예가 골프보다 조금 더 쉽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20년 30년 실력을 닦았다고 치자. 골프는 절정의 실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신체의 변화에 따라 실력이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그러나 서예는 대체로 실력이 유지된다. 서예란 예술의 본질을 꿰뚫고 어지간히 창작능력을 갖추고 나면, 나이가 들수록 연륜이 쌓일수록 더 노련해진다. 창작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역사에 기록되는 명가가 아닐지라도 나름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남길 수 있다.
 
현실의 화려함이야 서예로선 골프와 비교 자체가 불가다. 골프 산업은 끊임없이 발달한다. 단일 대회의 상금 액수도 날이 갈수록 커질 뿐 줄지 않는다. 실력을 갖춘 프로선수는 나이와 관계없이 한 해 사이에도 놀라운 수익을 올린다. 골프장 숫자는 지금도 늘고 있다. 서예는 예나 지금이나 가치 하나로 견딘다. 변함없는 예술 전선을 지키며, 문명의 변화와 맞서 그 나름의 변화를 추구한다.
 
▲   가을 풍정 / 2007년 인재 손인식 작
 
 
“골프에서 테크닉은 겨우 2할에 불과하다. 나머지 8할은 철학, 유머, 비극, 로맨스, 멜로드라마, 우정, 동지애, 고집 그리고 회화이다.” 그랜트랜드 라이스의 골프 명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창작 면허를 지니고 있다. 창작자가 되시라. 창작의 세계엔 반드시 묘미가 있다. 창작 경험자가 느끼고 즐길 영역이다. 그리고 선명한 진리 하나, 창작의 묘미가 있는 것은 쉽게 도태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완벽은 오직 이데아일 뿐이다. 제발 하지 않으면 좋을 실수를 기어코 하고 만다. 골프와 서예 또한 사람이 완벽할 수 없음을 전제한 사람의 놀이다. 운도 끼워 넣어 놨다. 당연히 실력이 먼저다. 하지만 때에 따라 운이 개입한다. 장애물이 행운을 돕기도 한다. 심지어 상대방 실수가 위안의 찻잔을 내밀기도 한다. 어쨌든 자기 스코어는 오직 자기가 책임져야 할 작품이다.
 
한 번 날린 샷은 되돌릴 수 없다. 한 번 행한 붓질은 가필하면 획을 망친다. 오늘의 창작은 오늘의 결실, 오늘의 샷을 즐기고, 오늘의 획을 만끽할 일이다. 다시 먹을 갈 수 있으니. 다시 라운딩을 즐길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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