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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21)| 멋진 리더, 그가 지닌 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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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의 경영 탐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174회 작성일 2018-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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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손인식의 경영 탐문 21
 
 
멋진 리더, 그가 지닌 묘수
 
- 양영연 회장, 재인니 한인회 경영 -
 
 
 
“의심하라.” “의심하고 있음을 상대방에게 드러내라.”
 
한국인이 인도네시아 직원들을 다루는 매우 중요한 팁 중 하나가 ‘의심하라’다. 그것도 ‘의심한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도록 드러내라’다. 옳지 못한 직원 관리 방법이란 의견 있을 거다. 이 상황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수판질 차원이 아니다. 긍정과 부정의 틈도 아니다. 꼭 집어 문화 차이를 말하는 거다. 속절없이 당한 경험자들은 단숨에 고개를 끄덕이리라.
 
16세기 철학자 데카르트는 “모든 불확실한 것을 일단 의심하라”라고 외쳤다. 선입견이 영글기 전 의심하고 살펴 확실히 맺으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널리 알려진 그의 다른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 또한 까닭이 명료해진다. 그렇다. 올바로 활용하면 ‘의심’이 곧 지혜다. 의심은 대상에 관한 바른 평가와 타당한 판단의 바탕이다. 사람 관계에서 잘 활용하면 좋은 결과를 창출할 에너지다.
 
누군가 전에 없이 가까이 다가오는가? 없던 친절을 베푸는가? 톤 낮은 음성으로 누군가를 비난하며 편을 가르는가? 이 모두 의심 꺼리다. 한 발짝 떨어져 살핀다면 후에 탄식할 일 없으리라. 떠도는 소문을 의심해보라. 역지사지로 대처하면 헛소문 쓸어내기 시간문제 아니랴. 마침내 의심의 날을 자기 검증에 쓴다면 그게 바로 의심의 진정한 가치 아니랴.
 
한인을 위한 한인에 의한 한인회를
 
자신을 향한 어스레한 선입견을 밝게 해소한 이가 있다. 그는 의혹의 눈길, 내용 없는 뜬소문 따위를 탁월한 리더십으로 조용히 잠재웠다. 친화력 장착한 조율 능력으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바로 2016년 제5대 회장으로 취임, 현재 주인도네시아 한인회를 이끄는 양영연 회장(73)이다.
 
“일이란 게 하려 들면 많습니다. 하지 않으려 들면 할 게 없고요. 사회활동도 마찬가집니다. 단체장 역할도 다르지 않고요. 그러나 일을 맡았으면 열심히 해야 해요. 기왕이면 잘해야죠. 활동하면서 느낌인데 재밌어요. 돈을 버는 쪽으로는 스트레스가 쌓일 법한 일도 봉사다 보니 즐거워요. 뭔가 난제를 해결했을 때 그 쾌감이 사업해서 돈 많이 번 것보다 기분이 더 좋더라고요^^~^^”
 
재인도네시아 한인회는 1972년 7월 <대한민국 거류민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그간 국제 정세나 경제 상황에 따라 그 얼마나 변화가 많았으랴. 타국이기에 곡절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때가 이르렀을까? 꽃이 피고 있다. 향기가 두루 퍼지고 있다. 양영연 회장께서 그 선봉에 있다. 그가 화합과 소통을 위해 솔선수범하고, 정직과 의리를 앞세워 인도네시아 한인회 새 지평을 열고 있다.  
 
▲ ▼ ▼ 재인도네시아 한인회 양영연 회장
 
 
 
“한인회장을 맡고 보니 선배님들의 크고 작은 성과가 수북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일찍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하여 길을 닦으신 분들의 공로에 저는 무임 편승한 겁니다. 선배님들을 위해서, 또 지금의 우리를 위해 반드시 인정받는 한인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인 전체의 한인회, 한인들에게 필요한 기구가 돼야죠. “한인회가 뭣 하는 곳이며, 누가 시켜서 한인회장 노릇 하느냐?”고 따지는 거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 참여해 함께 이루기를 바라죠.
 
25개 여에 이르는 군소 단체들과 관계 정립이 우선이었어요. 대사관과 바른 연대가 필요했고요. 그 안에서 역점을 둔 것 하나가 한인끼리 벌이는 송사 중재였어요. 타국 살면서 한인끼리 소송을 벌이면 그 피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겉보리 세말만 있으면 송사하지 말라’는 옛말 있잖아요? 특히 인도네시아는 소송 결말이 나기까지 난관이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양측이 다 막대한 손해를 입어요. 한인회가 적극 중재에 나섬으로써 한인 간 소송 사건이 대폭 줄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극과 극을 이으면 그게 바로 소통
 
그는 한인회장으로서 피아를 따지지 않는다. 누구와도 대화를 꺼리지 않는다. 화재 등 사건 사고 현장에도 먼저 달려간다. 리더의 포용과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해 더러 불거지던 교민들 간 배척 정서가 차츰 누그러지고 있다. 한인회 임원진 숫자도 대폭 늘었다. 그들은 적지 않은 한인회 운영비를 쾌척한다. 이로써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불법 체류자가 된 한인들이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한인을 향한 도움이 더욱 활발해졌다. 대사관은 물론 국내의 해외 구조단 성직자 단체와 유기적으로 연대함으로써 후속 처리까지 원활하다.
 
그는 한인회장을 하면서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그 모두를 존중한다고 했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촛불 모임과 같은 이색 일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고 했다.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그들이 이번 인도네시아 아시안 게임 때 봉사 요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키로 약속도 받았다.
 
“서로 관심을 가지고 포용해야 합니다. 관심을 가지면 서로 달라지지요. 극과 극을 이으면 동그라미입니다. 그게 바로 소통이죠. 처음부터 극이란 없어요. 사람 사이에서 생긴 겁니다. 동에 있는 사람은 서에 선 사람을 이해하고, 서에 선 사람은 동에 앉은 이를 헤아려야 해요. 인정하면서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서로의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하늘과 땅은 서로 상생한다.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항상 상생 위주로 순환한다. 가을이 되어 산천초목이 다 시들고, 겨울이 닥쳐 모두 얼어 죽는 것 같지만, 봄이 다가오면 새싹이 생동한다. 겨울은 역할이 크다. 참고 기다리게 한다. 걸러내는 역할도 한다. 강한 것을 더 강하게 조련한다. 곧 하늘과 땅은 사람들에게 항상 상생의 기운을 북돋는다.
 
生氣爲主 天地恒心/ 하늘과 땅은 항상 상생의 기를 위주로 삼나니.
肅殺之中 生生之意 常爲之主 卽是可以見天地之心
(차가운 살기 가운데도 생성하고 발육하는 기운이 항상 위주니
이에서 하늘과 땅의 마음을 보느니라.)
菜根譚 句 채근담에서 가려 무술 소만 후 오일에 인재
 
“인도네시아 교민들요? 모든 부분에서 세계 1등이죠. 제3국 한인회 임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인니 한인들이 얼마나 괜찮은지 금방 드러납니다. 어느 나라 이야기를 들어봐도 인도네시아 교민사회 같은 곳이 없어요. 우선 모든 부분에서 협조가 잘 이루어져요. 회장으로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지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정서요? 저도 공감합니다. 노소 격차가 두드러진다는 것도요. 어른들 아집이 강하고, 젊은이들 지나치게 배타적이라는 거 다 틀리지 않아요.
 
그런데 만나서 격의 없이 이야기하면 다 통해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대화로 다 통했어요. 그러기에 제가 회장 취임 때 숙원 사업으로 천명한 한인회관도 멋지게 목적을 이룰 것입니다. 지금 성큼성큼 진행 중에 있습니다. 교민들의 호응도 참 좋아요. 새로운 방법론도 몇 가지 속속 추가되고 있습니다. 제 임기가 끝나더라도 한인회관 건립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체육회장으로 진가를 드러내다
 
“인도네시아 첫발은 89년이었어요. 지인들도 만날 겸 단순한 방문이었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91년 8월 땅그랑 지역 3, 7 hr 공간에 PT, BOSUNG INDONESIA를 설립했어요. 이후 2003년 6월 찌까랑 자바베카 공단에 약 2. 3hr 공간을 확보하여 PT. TAEWON INDONESIA를 설립했지요. 두 곳에서 카툰, 오프셋박스, 쇼핑백, 펄프몰드 등을 생산 공급합니다. 양쪽 회사에 현재 한국인 19명, 현지인 직원 2천여 명이 종사하고 있습니다. 생산품 주요 공급 업체는 삼성, 엡슨, 카시오, 삼인도등 전자업체와 세아를 비롯한 여러 한국 봉제 업체입니다.”
 
▲ ▼ ▼ 재인도네시아 한인회 양영연 회장께서 설립한 PT, BOSUNG INDONESIA와 PT. TAEWON INDONESIA
 
 
 
그의 사회적 역량이 잘 드러난 것은 <재인도네시아 대한체육회> 창설이다. 재인니 체육회 창설은 그 이전에도 한인회 차원에서 시도가 있었다. 다만 대한체육회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던 바다. 양 회장께서 직접 대한체육회를 방문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재가를 얻어냈다.
 
“전국체전에 참가한 선수와 임원 120여 명에게 항공료나 단복, 물품 등을 적극 지원을 했지요. 전국체전에 참가하는 18개국 어느 나라 교민회에서도 하지 못하던 시도였어요. 그 결과 전국체전 재외 교포 선수단 입장식부터 단연 모습이 도드라졌어요. 당연히 인도네시아 선수단을 비롯한 참가 임원과 응원단 모두 자부심이 컸죠. 모두 집중했고 멋진 힐링의 시간이었어요.”
 
▲ ▼ ▼ 재인도네시아 대한체육회의 활동
 
 
 
재인니 대한체육회 출범은 나비 효과가 컸다. 이후 한인회 행사 모습도 변했다. 교민들이 한인회를 대하는 정서도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일찍이 리더로서 덕을 펼친 곳은 재인니 한인 성당이다. 사목회장으로서 그는 성직자를 잘 보필하고 교우들과 잘 조화했다. 지금도 도움 요청이 있을 때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기꺼이 응한다. 그의 긍정의 미덕은 항상 변함이 없다.
 
“저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 못됩니다. 교리에 대해서도 밝지 못해요. 가족과 주일에 갈 데가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좋아요. 어떤 직무라도 맡은 것은 잘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평소 제 신념입니다. 사목회장은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온전히 도와야 하는 역할입니다. 순명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성당의 직무를 맡았으니 고해성사 볼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요. ”
 
다섯 살에 아버지 잃어
 
그는 나이 다섯 살 때 부친을 잃었다. 부친께서는 그의 고향 충북 보은의 농부였다. 밭일하며 소를 거두다 말고 쓰러졌다. 무장공비 토벌군의 오인 사격 때문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로 그와 두 살 위 누나는 하늘같은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모친께서는 실로 통탄할 일로 하늘같은 지아비를 잃었다. 이리 안타까울 수가 있는가. 아버지 얼굴도 미처 가슴에 새기지 못했는데. 아버지와 변변한 추억 하나 마련한 것이 없는데.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급히 옮겨가는 장면만 다섯 살 철부지 뇌리에 어렴풋이 남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중학교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모습이 기둥처럼 크게 상단전에 새겨져 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가 어머니 나이 27 세셨어요. 성장하는 제 어깨에 가장이라는 아주 묵직한 견장하나 붙었지요. 그리고 아주 당연한 목적 하나 자리 잡았어요. 막연한 것이었지만 ‘성공’이란 두 글자였습니다. 당시 제게 성공이란 개념은 갈래지을 것도 없이 돈 버는 거였어요. 어떻게든 어머니가 돈 걱정하지 않으시게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제 나름 구체적인 것도 있었어요. 나이 서른에 자가용을 굴리겠다는 포부였지요. 올해 어머니 연세가 93세입니다. 누나는 75세시고요. 감사하게도 두 분 다 건강하십니다.”
 
어린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비 없는 자식이었다. 형제도 없어 늘 힘없는 외톨이었다. 자생력 기르기였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호신용으로 무술을 익혔고 그로 인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손가락질 받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그런 그의 고향 마을에 삼십 수년 전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섰다. 고향 마을 뒷산에 물탱크를 설치하고 배관을 해서 마을 집집에 물을 공급한 것을 기린 표지석이다. 원활하지 못했던 마을의 식수 사정을 단번에 해결한 일이었다. 조석으로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나르던 부녀자들이 얼마나 감동했으랴. 서른 갓 넘긴 그가 꿈꿨던 대로 포니Ⅰ을 기사를 두고 굴리던 때이니 여유를 혼자 누리지 않았던 거다.
 
가족, 그 무엇과 바꿀 수 있는가?
 
“저는 큰 기업을 일구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사업 실패로 곤경을 겪은 일이 없어요. 바로 그래서 유난히 크게 후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 가족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마땅히 돈 버는 일을 두 번째로 두겠어요. 오직 가족과 함께하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삼을 것입니다. 제40대는 정말 돈을 잘 버는 시기였어요. 전국으로 펼친 사업이 번창했지요. 바로 그것이 병폐였어요. 가족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돈 버는 일에 다 빼앗긴 겁니다. 당시는 깨우치지 못했어요. 돈을 잘 벌면 다라는 생각이었죠. 가족에게도 돈을 풍족하게 주면 됐다 싶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잘 못 한 것이 중3 큰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것입니다. 어린 아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묻지 않았어요. 아버지 존재를 거스르지 않은 아들은 변변한 의견 표출도 없이 순순히 유학길에 올랐어요. 응석 부릴 나이, 부모 믿고 반항도 해볼 나이에 낯선 타국에 혼자 떨어진 겁니다. 두려웠을 아이를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생각뿐입니다. 지금에야 후회를 하는데, 이미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간 걸요.”
 
▲ ▼ ▼ PT, BOSUNG INDONESIA와 PT. TAEWON INDONESIA 장치와 내부
 
 
 
먼 타국에서 혼자 생활로 어려움을 겪던 큰아들은 산타바바라 지역 고등학교(Nilbano boarding school) 2학년 재학 중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원외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큰아들의 유학은 그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운 큰 계기였다. 올해 나이 마흔 네 살 큰아들, 그는 차근차근 경영 수련을 거쳐 몇 년 전부터 PT, BOSUNG INDONESIA의 사장으로 취임, 일선 경영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형과 달리 한국에서 순조롭게 학업을 마친 둘째 아들은 현재 게임회사 NQ 운영하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장께서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은퇴를 준비하고 계시다.
 
“나이 칠십 은퇴는 늘 가져왔던 생각입니다. 마침 일을 줄이고 쉬라는 병원 주치의의 권고 있고 해서 약 2년 후 완전 은퇴를 예정하고 정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엔 봄가을에는 한국, 여름과 겨울엔 인도네시아에서 지낼 계획이지요. 제 취미 활동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낚시입니다. 골프도 좋아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낚시예요. 예전에도 낚시를 하면서 한국의 자연 저수지 순례하기를 좋아했어요. 한인회장 임기가 끝나면 미니버스를 개조한 캠핑카를 장만할 겁니다. 낚시도 하고 한국도 일주하려고 합니다.”
 
그는 은퇴 후 꼭 할 일 하나 정해놓고 있다. 쉬면서 그간의 생을 돌아보는 일이다. 가족을 향해 가감 없는 진솔한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그것은 그간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 했다.
 
“제 이야기를 정리하려는 것은 저를 향한 반성입니다. 그간 고락을 함께 했고 또 이어갈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향해 풀어내는 진솔한 화해지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후손을 향한 것이에요. 더하고 덜함이 없는 솔직한 기록에 대한 후손들의 판단이 긍정일지 부정일지 알 수 없죠. 다만 저는 최선을 다해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 나름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무한한 우주를 보며 인간의 왜소함을 말한 철학자가 있었다. 파스칼이다. 우주 운행에 동화하여 행복과 자기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철학자가 있었다. 데카르트다. 양영연 회장과 긴 시간 인터뷰, 그에게서 데카르트의 향기를 물씬 느끼는 참 고마운 시간이었다. 바쁜 시간 함께 해주심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이 프로젝트는 <자카르타 경제신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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