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63 - 인도네시아 현대시 특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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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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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에서 시를 읽다 63 - 인도네시아 현대시 특집 3>
: 2018년 8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을 자축하며 한 달 동안 인도네시아 현대시 특집을 게재한다.
신장*
시 / 라뜨나 아유 부디아르티
번역 / 채인숙, 노정주
나는 매일 밤 니나 보보와 함께 몸을 흔들어요
“넬렝 넹꿍, 게우라 게데 게우라 장꿍, 게우라 사꼴라 까 반둥…”**
부드러운 목소리가 꿈 속으로 데려가요
나는 신장을 덮고 있어요
종종 초록 신장을 몰래 꺼내 입어요
벼 무늬가 있거나 싸움닭*** 이 그려져 있지요
나는 책상 아래에 집을 짓는답니다
내 어린 시절의 집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황급히
책장 한 페이지 속으로 넣어버리지만요
나는 엄마의 젊은 날 옷장을 들여다 보아요
몇 장의 옷감이 남았는지 세어 보아요
때때로 근사한 드레스가 된 신장을 입고
멋진 공연을 하는 상상을 해요
엄마의 노래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다시 아기로 태어난 것 같아요
행복했던 시간은 결혼의 문을 향해 재빨리 지나왔지요
엄마의 기도가 붉은 색과 갈색의 신장을 적시고 있어요:
“하나는 네 아이를 업을 때 쓰고,
또 하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으로 고르렴”
엄마는 옷장 구석에서 바틱슬로보그를 꺼내며 말씀하셨죠:
“언젠가 엄마가 떠나면, 이 신장을 꺼내 입거라”
(출처: 현대시학 2018 7,8월호)
*신장(Sinjang, 순다어) : 직사각형의 긴 천으로 지역마다 특색있는 바틱 무늬가 그려져 있다. ( 보통 천으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고, 아기를 안는 보자기로 쓰거나, 이불로 쓰기도 한다: 역자 주)
** “neleng nengkung, geura gede geura jangkung, geura sakola ka Bandung” : 순다 지방의 전통 노래로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이다. 아이가 얼른 자라서 반둥에 있는 좋은 학교에 가길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둥은 서부 자바의 주도이다.
*시인 / 라뜨나 아유 부디아르티 (RatnaAyuBudhiarti)
: 1981년 2월 9일 찌안주르에서 태어나 시와 단편소설, 에세이, 칼럼, 순다어 인형극 등을 쓰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출판되었고 영어와 프랑스어로도 번역되었다. 개인 및 공동시집 38권과 단행본 6권을 출간하였다.
NOTE***********
라뜨나 아유 부디아르티는 특히 자바 여성들의 삶에 관한 많은 시들을 발표했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언어들이 시 곳곳에 배여 있다. <신장>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긴 바틱천을 통해 엄마와 딸,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녀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정신적 연대를 보여 준다.
어린 시절, 엄마의 신장을 덮고 자장가를 들으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을 나. 조금 더 커서는 엄마의 초록색 신장을 몰래 꺼내 입고 상상 속의 집을 지었던 나. 그리고 지금,엄마의 옷장을 들여다 보며 이제는 늙어버린 엄마의 젊은 시절을 대신 추억하는 나.그리고 결혼을 앞둔 나에게 두 개의 신장을 내어주며 하나는 옷을 지어 입고 하나는 아기를 업을 때 쓰라고 말씀하시는 엄마.
내가 떠나면 이 옷을 입으라며 옷장 깊숙한 곳에서 신장을 꺼내주는 엄마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읽히는 아름다운 시다. 아마도 그 아름다운 옷은 나의 생애를 지나 나의 딸에게 또 고스란히 전해지리라. 언제나 신장의 길이만큼씩 더 크고 깊었던 엄마의 사랑을,우리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딸들은 어리석은 후회와 연민을 안은 채 겨우 엄마가 되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 채인숙 /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고,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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