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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26)|아버지와 아들, 아름다운 줄탁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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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의 경영 탐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8,165회 작성일 2018-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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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손인식의 경영 탐문 26
 
 
아버지와 아들, 아름다운 줄탁동시
 
- 윤수학, 덕환 부자의 기차철로 같은 동행 -
 
사나이 셋 여행으로 뭉쳤다. 거친 느낌 물씬하다. 한 사나이는 한국에서 날아왔다. 두 사나이가 인도네시아에서 맞이했다. 벼르고 별러 휴가 기간을 맞췄다. 여행 목적지가 알차다. 인도네시아 대표적인 여행지 세 곳이다. 불가사의 유적으로 빛나는 프람바난과 보로부두르의 고장 고도 족자, 지구의 신비하고 오묘한 비밀을 엿보이는 수라바야 부로모 화산과 반유왕이의 까와 이젠.
 
여행의 근본적인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 렷다. 일상 잠시 밀치고 탈출 회색 공간이다. 신선함 찾아 일상 벗어나기다. 휴양지나 문화유적지, 장엄한 대자연 등 목적지가 어느 곳이든지 마찬가지다. 육로나 배, 비행기 어느 것을 활용해도 한 가지 이유, ‘자유’ 만끽하기다.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와 볼빨간사춘기의 노래 <여행>의 가사처럼 트렌드는 시대에 따라 바뀐다. 그러나 언제라도 여행은 삶의 활력이다. 삶 즐기기가 핵심이다.
 
▲ ▼ ▼ 삼부자의 여행
 
 
 
삼부자의 일주일 여행 사진, 1천 6백 컷
 
그런데 세 사나이 나이가 영 부조화다. 한 사나이는 장년기 중심을 지나고 있는 육십 대 중반, 두 사나이는 아직 청년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마흔과 서른여덟. 세대 차이 두렷하다. 취향이 맞았을까 싶다. 그러나 같은 곳을 향해 함께 달리며 즐겁게 보고 느꼈다 했다.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며 24시간, 1주일을 기쁘게 지냈다 했다.
 
그러니까 세 사나이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조합이었던 거다. 삼부자가 부인과 아이들을 떼놓고 그들만의 여행을 도모했다. 그냥 덮기 아까운 흥밋거리다. 이슈를 물었다. 들출 게 없다고 손사래부터 쳤다. 몇 번 사양하는 동안 몇 주가 흘렀다. 한국에서 마케팅 프리랜서로 일하는 장남 윤승환 씨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후, 드디어 아버지와 차남 두 부자와 마주 앉았다. 삼부자의 여행 기획은 둘째 아들이 했다고 했다.
 
“형님과 저는 둘이 뭉쳐 더러 여행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눕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여행하는 것을 몇 년 전부터 계획했었지요. 다만 서로 시간이 딱 맞지 않았어요. 이번 인도네시아 르바란 기간이 썩 좋은 기회였습니다. 저희가 여행하는 기간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별도 회합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형수와 조카 둘, 제 아내와 우리 집 아이 둘 모두 모여 즐겁게 지냈으니까요.”
 
 
▲ ▲ ▼ ▼ 삼부자의 여행
 
 
 
삼부자 여행 기록 사진이 무려 1천 6백 컷이라 했다. 6박 7일 여행 기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긴 사진 숫자가 제법 많다. 살펴보니 한 컷 한 컷 모두 흥미롭다. 포인트와 표정 모두 또래 젊은이들 어울림 같다. 얼마나 즐거웠을까. 사진 몇 장 감상하는데도 뿌듯함이 잡힐 듯 묻어난다.
 
“이번 여행에서 형님과 제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변화죠. 평소 아버지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아주 달랐습니다. 포인트마다 저희를 리드하셨어요. 권유하고 자청하셨지요. 아버지의 과묵도 마찬가집니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선 제가 예상한 부분까지도 말을 아끼셨어요. 여행에 방해될 요소는 모두 배제하시는 거였습니다. 여행 중 떠올릴 수 있는 화젯거리에만 집중하시며 함께 즐기셨어요. 아버지께서 저희를 배려하신 거죠.”
 
기회란 만드는 것, 모르면 배우는 것
 
위의 아버지는 PT. DAE YOUNG APEX INDONESIA(이하 DYAI)의 윤수학 대표(64)다. DYAI는 자카르타 서쪽 찌깜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자동차와 냉장고 부품을 생산하는 건실한 중견 기업체다. 플라스틱 사출 성형 및 후가공한 부품을 유명 전자 회사와 자동차 회사에 납품한다.
 
“한국에서 창업한 것이 84년입니다. 작으나마 제 사업을 일군 것이 벌써 39년째지요. 당시 제 업은 기계 제작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인연도 기계가 연결고리입니다. 90년대 중 후반이죠. 전자 부분 삼성, 엘지 등 대기업과 그 협력 업체들이 대거 인도네시아에 진출했습니다. 저는 그 기업들에 기계 설비를 납품했어요. 기계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지인이 플라스틱 사출 가공업에 대해 권유하더라고요. 대뜸 판을 짰지요. 2002년 DYAI를 설립한 겁니다.
 
새 법인을 전문 경영인 체제로 시작했어요. 한국 사업체도 있었거니와 제가 아는 분야가 아니니까요. 저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출장을 왔고요. 그런데 그게 맘과 뜻대로 안 되더라고요. 여러 사정으로 인해 6년여 만에 최대 경영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문을 닫는다, 임금이 밀렸다 등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좋지 않은 소문이 무성하더라고요.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접기에는 너무 자존심 상했지요. 직접 경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한국의 공장을 정리했어요. DYAI에 온 힘을 기울였지요. 그러나 기울어진 회사를 되살리는 것은 창업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때 주저앉았으면 지금의 DYAI가 없겠지요^~^ ”
 
▲ ▼ PT. DAE YOUNG APEX INDONESIA 외부와 내부
 
 
▲ ▼ PT. DAE YOUNG APEX INDONESIA 사원들과 사무실 내부
 
 
윤 대표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대체적인 특징을 올곧게 지니고 있다. 그는 기회란 만들면 된다는 의식이 투철하다. 하려 들면 할 일이 있다는 생각 단단하다. 알지 못하면 배워서 하면 된다는 의지 강하다. 시대가 요구한 도전 정신 더불어 창의성도 만만찮다. 그는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없다. 시대가 안긴 어려움쯤이야 그러려니 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맞고 싶지 않은 매도 피할 수 없으면 응한다는 인정 마인드다. 한 인니 문화와 체육 교류에 기꺼이 후원하고 향우회 등 주변을 조용히 이끄는 것도 그의 성정대로다.
 
“두 아들 누군가와는 함께 일구고 싶었어요. 경영학을 전공한 큰아들이 적격이지요. 직접 와서 경험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맞지 않았나 봅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둘째는 체육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자기 의사 표현이 분명한 성격이죠. 적극적이고요. 그래서 사업가로서 적합한 장점이 많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공부 안 하고 놀아서 체육대학에 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공부 잘했으면 지금 제 곁에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저와 동행해준 둘째에게 고마운 마음 큽니다.”
 
▲ ▼  PT. DAE YOUNG APEX INDONESIA 신축 현장(2016년)
 
 
행복, 자기를 돌아보며 자신이 느끼는 것
 
윤 대표의 결론은 항상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다. 자상한 아빠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가장으로서 열심히 돈을 버는 일차 책임만 매우 충실했다고 털어놓는다. 아이들은 아내가 다 알아서 잘 키울 것으로 믿었다고 밝힌다. 세상 아버지들의 흔한 소회다. “두 아들이 제 때에 결혼했어요. 슬하에 손자 손녀가 넷입니다. 다들 나름 잘 사니 고마운 마음 큽니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를 보며 스스로 ‘잘 살았네’ 하고 위안으로 삼는다니까요.” 동 세대 중 그가 부러운 사람이 비단 필자뿐일까?
 
“두 아들과 여행, 참 갖기 어려운 시간이었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전부 아닐까요? 저는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었습니다. 제가 여행지까지 가서 어른 노릇 할 필요는 없지요. 제가 즐기고 행복한 모습을 보였다면 그것으로 제 할 바는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역지사지해 봅니다. 제가 두 아들에게 잔소리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죠.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5살 즈음부터 칭찬보다 독려만 한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두 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조곤조곤 이야기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두 아들이 과연 아빠가 우리를 많이 사랑한다고 느꼈을까요? 성장한 다음 어느 순간부터 두 아들에게 제 말이 설득력 부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함께 일하는 둘째(DYAI 윤덕환 이사)가 느끼기에 상충 점이 많았을 겁니다.”
 
사람의 진짜 가치는 뭘까? 다수가 사랑이라 말하리라. 행복이라 말하리라. 골똘히 생각한 혹자는 용서와 화해라 말하리라. 왜? 사랑과 행복추구는 꼭 갈등을 거치니까. 이해와 조율 과정을 거쳐 다시 더 참다운 사랑과 행복에 다다르니까. 동서고금 소설과 영화, 즉 사람 이야기 모두의 중심이 다 이 과정 아니던가. 비극으로 끝나는 설정 왜 없으랴. 하지만 그것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더 강한 메시지 아니랴.
 
대자연의 생명체는 생숙생(生熟生)이 필연이다. 씨앗에서 새싹이 트고 자라면서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그리고 다시 씨앗을 남긴다. 사람의 삶, 이 굴레에서 한 치라도 벗어남이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 삶의 진짜 가치는 용서와 화해라 할 수 있으리라. 현실은 소설과 연극 영화가 아니다. 따라서 정형도 없다. 그러나 사랑과 행복을 향한 희망은 사람 누구나 한 결이다. 고난은 극복하고 갈등은 용서와 화해로 물리쳐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가꾸는 것.
 
瓜熟啄同時(과숙체락 줄탁동시)
때가 성숙하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기회와 인연이란 서로 투합하느리라. 벽암록(碧巖錄) 구
무술년 입추 전 2일 인재 손인식 작
 
말과 행동 그리고 이심전심
 
“아버지의 이른 창업을 어렸을 때는 몰랐죠. 그냥 일을 하신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제 나이보다 훨씬 어렸을 때 창업하신 거잖아요? 참 놀랍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 주말이면 유아 체육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아버지 회사에서도 아르바이트했고요. 아버지는 저를 키우셨으니 어려서부터 제 면모를 아시겠지요. 특히 회사 일을 시키실 때는 기대도 하셨을 것으로 압니다. 저야 뭐 그냥 아르바이트였지만요^~^ 암튼 아버지와 함께 일한 것이 벌써 14년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정규직 직장생활 경험이 없습니다. 제가 이 곳에 올 때 회사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잖아요? 회사에 관한 좋지 않은 평판이 제게도 전해졌습니다. 좀 당황했지요. 물론 아버지는 매우 속상하셨을 겁니다. 더욱 황당했던 것은 아버지와 제가 본격적으로 운영에 뛰어들자 기존 한국인 주재원들이 오래지 않아 다 그만두는 겁니다. 과연 사회가 이런 것인가 하고 의아했죠. 지금은 다 이해합니다.”
 
▲ 부부와 두 아들
 
▲ 윤수학 대표와 윤덕환 이사 그리고 윤 대표의 세 손자와 손녀
 
윤 이사는 고교 때부터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고교 때 이미 당구 애버리지 3백을 점령했다. 건설현장 노동일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번 돈을 좋아하는 놀이에 거침없이 투자(?)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왜 모르랴. 오직 이해할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한 때 놀기를 좋아한 것도 프라이드가 강한 것도 장점으로 여긴다 했다. 아들 또한 그것을 장점으로 살려냈다. 
 
“문화 충돌요? 있었지요. 다만 크지 않았습니다. 처음 인도네시아 왔을 때부터 그냥 모든 상황에 적응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사안을 고려하자는 평소 제 의식이 타국살이를 시작하면서 더 강해졌죠. 적응 초기에 이수한 <월드옥타 글로벌 경영자과정>에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지금은 누구를 상대해도 고정관념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을 진행할 때는 나름대로 최선의 전략이 뭘까 고민 많이 합니다.”
 
윤 이사는 특히 현지 직원들과 대화를 많이 한다고 했다. 늘 그들의 관점에서 기준을 잡는다. 그래서 큰 트러블이 없었다. 그래도 방향이 틀릴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좋은 방향이 무엇일까 많이 생각한다. 쉽게 놀이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나 도박은 절대 피하는 것도 그의 장점이다. 체육 전공 특징이 빛을 발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윤 대표와 필자의 눈이 마주쳤다. 공감이 컸다. 
 
부자(父子)의 꿈, 둘 아닌 하나
 
“처음엔 생각이 많았어요. 아들과 함께 다시 해볼 만한 일인가 생각이 많았지요. 일단 아들을 오라고 했지만, 한 5년 경험하고 제 갈 길 찾게 하려는 마음이었어요. 초기 3~4년 참 많은 우여곡절 함께 겪었습니다. 일정 궤도에 오른 것은 5년여 정도입니다. 그사이 넓은 대지를 마련해 새로운 공장도 신축해 이전했습니다. 아들이 큰 힘이었습니다. 이젠 동반자죠. 어느 사이 든든하게 가까이 선 훌륭한 동반자.”
 
윤 대표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일었다. 흔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갖는 아직 어리다는 관념이 이젠 전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잔소리가 다시 생겼단다. 뭘까? 좀 더 체계를 갖추자고 독려한다고 했다. 어려울 때는 덮어놨던 부분까지 다시 되짚는다고 했다. 백년대계를 세우자는 아버지 마음 아들 또한 어찌 모르랴. 어려운 과정 모두 이심전심으로 극복한 부자 아닌가.
 
瓜熟啄同時(과숙체락 줄탁동시)가 있다. 벽암록(碧巖錄)의 화두다. ‘때가 성숙하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기회와 인연이란 서로 의기투합한다.’라는 뜻이다. 때를 강조하고 합심을 강조한 말이다. 변화와 배려 관심과 경청에 관해 다독이는 말이다. 윤 대표께서  2선 후퇴 운운했다. 아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남들은 저를 보며 농담합니다. ‘어차피 회사가 네 껀데’라고 말하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DYAI는 아버지께서 일군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이템이지요. 경영방식도 아버지 스타일입니다. 설사 물려주신다고 해도 위로 형님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사회 환원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나중에 아버님이 결정하실 일이고 제 소관 밖입니다.
 
제 것으로 여길 입장이 못 되죠. 제가 별도로 관리하는 오더도 있습니다만, 그건 업무 과정에서 생긴 성과일 뿐입니다. 저는 지금 한 사람의 직장인입니다. 내일 떠난다 해도 조금도 뒤탈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저는 가정을 이끄는 가장입니다. 우선 아이들이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잘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회사나 집에서 제 역할 잘해서 인정받는다면 기쁜 일이죠^^~^^ ”
 
생각이 깊다. 윤 이사는 부인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어머니는 한동안 할머니 모시느라 한국에 계시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생활을 낯설어 하십니다. 어머니는 더러 오가시지만 아버지와 함께 한 집에서 산지가 그럭저럭 십 년입니다. 타국살이니만큼 아내는 집안에 어른이 계시다는 측면에서 정신적으로 매우 든든했을 것입니다. 아이들도 늘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고요.” 이 대목에서 시아버지가 참지 못했다.
 
“시아비인 제 복이죠. 며느리는 나름 불편한 부분이 많았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준 며느리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곧 분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손자 손녀의 성장 때문이지요. 마땅한 학교를 찾아 둘째 아들 가족이 거주지를 자카르타로 옮겨야 합니다. 권유해야할 상황입니다. 물 흐르듯 찾아온 변화잖습니까? 손자 손녀를 매일 못 봐 아쉽기도 하지만, 모두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 부부와 두 아들 가족 라운딩
 
윤 이사는 체육과 출신답게 모든 운동을 좋아하고 잘한다.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한 때 야구와 거리 농구에 심취했었다. 배드민턴도 즐겼다. 그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있을 때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움직임으로 푼다. 기분이 다운될 때면 자전거를 차고 나가거나 동네를 뛴다.
 
“저는 술을 즐기는 편인데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 마실 생각이 싹 달아납니다. 기분 좋을 때는 많이 마시죠. 이번 여행 가서도 아버지, 형님과 꽤 마셨습니다. 현재 푹 빠진 취미생활은 없습니다. 필요하다 할까요? 골프만 합니다. 골프 이야기는 어머니와 가장 많이 합니다. 어머니와 라운딩도 많이 하고요. 어머니와 즐기는 내기 골프는 정말 즐겁습니다^~^”
 
참 즐거운 나눔이었다. 행복한 이야기를 들려준 DYAI의 윤수학 대표와 윤덕환 이사께 감사하다. 부자가 창작하는 행복 바이러스가 세상에 만연하기를 빌며 흥겹고 뿌듯한 가족 이야기 정리를 마친다.
 
 
※ 이 프로젝트는 <자카르타경제신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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