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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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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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만수 목사의 그 하얀 희망에 대하여-
필자 주 :
이 글은 고 서만수 목사의 생전 2005년 1월 인터뷰 내용이다.
2006년 초 <한 타임즈>가 발간한 책 『아름다운 한국인』의 첫 꼭지다.
고인은 2009년 소천하셨고,
그가 생전에 참 많은 사랑을 쏟은 땅 인도네시아에 육신을 누이셨다.
고인은 존경받은 성직자였고 인도네시아 교민사회 큰 어른이셨다.
고인을 기리는 마음 크다. 그의 귀한 말씀을 다시 새기는 이유다.
지금 읽는 독자를 위해 내용을 일부 수정했음을 밝힌다.
미지의 삶에 대한 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항상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사람의 생이 어느 부분 결핍이며 미완임을 알기에 더욱 자신의 삶이 아름답고 행복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에 희망은 삶의 바탕이며 힘이다. 사람의 삶을 참답게 하는 에너지다. 최선으로 향하는 동력이다.
선교사 서만수 목사의 생은 온통 희망으로 뭉친 삶이다. 사랑 실천의 생이다. 그가 인도네시아(이하 인니) 선교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197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5회 총회에서다. 그 이듬해 인니에 도착한 그는 무려 35년여를 인니 전역에 사랑의 발자취를 남겼다. 국토 크기 세계 4위 인니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3백여 종족 중 어느 종족도 가리지 않고 만났다.
교포 성도 1,400여 명,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위용의 대 성전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를 건립했다. 지역과 종족을 초월한 교회 개척 목표가 3천 개다. 이를 위해 기독대학교(UKIM)을 설립했다. 각 부족의 인재들을 모아 양성 중이다. 한국 교민들뿐만 아니라 인니 방방곡곡의 현지인들까지 그의 업적을 두루 안다.
그는 77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90년 제1회 한국기독교 선교대상을 받았다. 해외 선교에 성공한 선교사를 기린 상이다. 그에게는 빛나는 저서 세 권이 있다. 인니 사역 20년의 결정판 『남방에 심는 노래』와 시집 『둥개야!』, 선교 30년 기념 집 『남방에 피는 꽃』이다. 모두 그의 인니 선교의 전기적 스토리가 올곧게 수록된 책이다.
그는 타고난 문인이다. 책에는 그의 문학적 소양이 금결로 박힌 그의 책은 삶의 본질을 설파한 사상서다. 이국의 인종과 문화 탐방서다. 누구나 읽으면 좋을 교양서다. 어느 한 페이지를 들춰도 다양하고 알찬 내용으로 숨이 벅차다. 거기에는 공역자 정소라 전도사(2012년 별세)의 숨겨진 내조의 공 체감은 또 다른 행간의 묘미다.
대담의 주제를 희망으로 정했다. 서만수 목사의 희망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몇 권의 책으로는 담기 어려울 그의 삶 아닌가. 이 짧은 글에 담는 것은 애초에 가당찮은 일, 그가 지닌 희망의 길을 선택해 함께 걷기로 했다. 시간이 쌓이고 고난이 중첩되며 깎이고 씻겨 이제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오직 투명하기만 할 그의 희망, 그의 희망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주옥의 귀감이 될 것이기에.
▲ 고 서만수 목사님 2005년 1월 인텨뷰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서
2005년 1월 12일 오후 3시,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 당회장실, 커피 향이 실내 기온쯤으로 잦아들 즈음 필자는 새해맞이와 최근의 건강을 여쭙는 것으로 대담의 문을 열었다. 그는 먼저 호흡을 정리했다. 아직도 정기 체크 중인 년 전의 병고 때문이리라. “참 많은 분에게 심려를 끼쳤어요. 모든 분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신년 덕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희망이라∼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바라는 것, 즉 희망이 있겠지요? 싹이 터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그것이 다 희망이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인물을 닮고 싶은 것이 제 희망입니다. 성서 속 사도 바울이에요. 바울은 당대에 인정받았던 최고의 학자이자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그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청산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요.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 3장)’ 라고 하면서. 이 고백에 저는 깨우침을 얻었어요. 이미 잡은 것이나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잡을 수 없는 것, 항상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것이 진리임을 안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사도 바울처럼 늘 앞서 있는 목표를 향해서 좇아간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하나님께서 또 새해를 주셨으니 기회라고 생각하고 올해에도 사도 바울처럼 달려가기를 원하는 맘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이들이나 인니의 한국 교민들도 모두가 잠깐의 목표가 아니고 육신과 영적인 목표를 함께 아우르기를 바랍니다. 고상하고 영원히 남을 목표를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서만수 목사가 희망을 말하는 사이 가만가만 배어나는 것은 역시 그 다운 철학이다. 그가 좌우명처럼 여기는 성구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가서 제2장 13절)”로 귀결이 자연스럽다. “함께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동반, 동행, 동거, 동역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함께 하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합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큰 성전과 많은 숫자의 개척교회, 세간의 존경, 이만하면 ‘성공’이리라.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성공이란 말은 제게 어울리지 않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보이는 성전 다 우리 성도들이 힘을 합해 지은 겁니다. 작년 12월 말로 꼭 300개를 달성한 개척교회 또한 현지인 사역자들이 이룬 것이에요. 저는 그저 심부름으로 미약한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그러니 성공이란 말이 제게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생각할 수도 없어요. 그저 사도 바울처럼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뿐이지요. 특히 개척교회는 원래 3천 개를 목표로 하여 진행하고 있었는데, 97년과 2003년의 제 병고로 인해 차질을 빚고 있어요.”
‘성공’이라는 세속적 질문을 현답으로 단숨에 일깨우신다. 겸손도 중량감이 느껴진다. “300개의 개척교회” 그 많은 숫자의 개척교회 설립에 대해서 범인은 생각조차 미치지 못할 것이거니와 관리는 또한 얼마나 어려울까? “관리라기보다는 도와준다는 말이 맞습니다. 어떤 부족이건 그 부족의 일원 중에 지도자가 나와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나가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유치원을 비롯한 초등학교나 중학교 등을 세울 수 있도록 하고 우리는 그것을 지원해주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순명하는 그의 실행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모이신 정소라 전도사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은 제 동반자로서 40년 동안 누구보다 충실하게 제 곁에서 큰일을 해준 동역자입니다. 제가 미치지 못한 분야를 잘 감싸주지요. 특히 어린이 교육에 열성을 다해요.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누가 들어도 어색하지 않은 지아비의 아내에 대한 사랑 표현, 그마저 짧게 끊는 미덕과 겸손을 마음에 새기는 사이 시간이 잠시 쉬어간다. 문학도이자 시집을 출간한 시인인 그에게 종교와 시의 상관관계를 여쭸다.
“시뿐만 아니고 모든 예술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생활입니다. 그 사람의 노래고 사색의 세계지요. 신앙이 제 생활이듯이 시 또한 생활이죠. 저는 종교와 예술 모두를 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표현 방법이라고 봅니다. 선인장에 관해서 쓴 적이 있어요. 선인장은 한 뼘만큼 자라서 가시가 나오고 꽃을 피우고 거기서 또 한 뼘 자라서 자기를 방어하는 가시가 나요. 그 선인장을 보면서 아, 사람도 저렇겠구나. 자기 수준과 능력만큼씩 세상을 향해서 뻗어 나가며 환경과 조화를 이루겠다 생각했죠. 이처럼 시는 신앙과 같은 현실 깨우침이자 생활입니다.”
▲ 고 서만수 목사의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선교 사례집
▲ 고 서만수 목사 소천 1주기 추모집
둘이 아닌 하나, 종교와 생활
“종교란 바로 신과의 문제로서 곧 생활입니다. 생활과 종교가 따로 있어서는 안 돼요. 종교의 중심을 온통 드러나는 현상에 두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발생하는 사회문제나 세습의 문제도 종교의 생활화를 이루면 모두 해결될 것들입니다. 종교의 모든 경전을 온통 그대로 따르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지요. 경전에 대한 부담을 갖지 말고, 그 진리를 따르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현대 종교인이 지녀야 할 최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가르침이 참 깊다. “종교가 구현되는 현장은 한 인간의 구체적인 생활이다. 계기도 자기에게 있고 구원도 자기에게 있다.”는 종교학자의 정의가 부드럽게 흐른다. “종교란 현실 속에서 자각되는 아집의 자기에게 절망과 무력을 느끼고 무한하고 지고하며 절대적인 것을 찾는 전생명의 약동”이라는 깨우침이 더욱 구체적이다.
서만수 목사, 그는 현재 인니 국민이다. 인니 국적을 취득하라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결정에 따랐다. 그는 인니 법무성에서 국적 취득 통지가 왔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국적이 바뀐다는 사실에 인간적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함께 있던 사람들도 같이 울었다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동족 이상으로 인니인들을 사랑하고 이끈다. 생명을 걸고 쫓고 쫓기며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오지 선교의 초기부터 싹튼 사랑이다. 항상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대화하고 정을 나누었다. 그 결과 어느 외국의 선교사들보다 훨씬 큰 선교 성과를 거두었다.
“급변하는 자연과학에 걸맞게 우리 삶의 주인인 영혼을 잘 길러야 합니다. 물질만을 따르는 인생은 약간의 지능을 가진 로봇이나 다름이 없어요. 인간이라고 하는 생명체는 물질과 영혼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종교의 문제는 영혼입니다. 건전한 인간은 건전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예요. 물질적인 향상만 있다면 세상은 행복보다 비극이 많을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요한3서 1장 2절’의 진리가 전하는 의미를 현대인들은 진정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 일침이 부디 세상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으면 좋겠다. 그는 진정한 인니 한인교포사회의 원로이다. 그가 아무리 겸양 지사로 사양을 하더라도 교포사회를 향한 고언 한마디는 반드시 들어야 할 것 같다.
“태어나고 자란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타국에서 살고 있는데, 모두 수고하는 것마다 좋은 열매가 맺어지길 바랍니다. 아울러 바라는 것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곳에서 자라나는 우리의 후손들이 건강하며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기를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아주 열성적이라는 것은 세계인이 거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이는 좋은 장점임이 틀림없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단점이 돼요. 이젠 서두르지 말고 지닌 역량을 잘 발휘하면서 내실에 힘쓸 때라고 생각합니다.”
▲ ▼ 고 서만수 목사 기념관 개관식과 현판식
서두르지 마세요. 자신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세 번이나 사경을 헤맨 경험이 있어요. 언제 또다시 그런 일이 닥칠지 예상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합니다. 저는 가끔 골프를 치는 것 외에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취미가 독서예요. 사진 찍기도 좋아합니다.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어머니에게 받은 선물 카메라로 인해 그때부터 사진 찍기를 즐겼어요. 특히 한 때 야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노력했었지요.^~^”
야경! 휴식의 밤이다. 생성의 밤이다. 야경에서 그가 무엇을 발견하려 했는지 필자는 묻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인가로부터 분출되어 나오는 빛이 그의 카메라 렌즈에 잡혔을 것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위대한 우주의 빛이었을까? 밤 세상이 토해내는 현란하고 다양한 빛이었을까? 더러 어둠에 기댄 사람들의 퇴색한 빛도 있었을까? 그는 과연 무슨 빛을 찾아 굵은 눈썹을 거느린 안광을 형형히 발했을까? 그 빛은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낮 동안의 빛과는 달랐을 것이거늘, 그 어떤 빛이 오늘 그의 마음에 담겨 있을까.
필자는 지금 ‘빛’이라는 글자 하나를 화두로 삼는다. 언젠가 그 화두가, 야경에서 그가 발견하고자 한 빛에 어렴풋이나마 접근했다는 확신이 들면 필자는 그 날 꼭 여쭈리라. 그의 내면에 담겨 있을 그 빛에 관해 여쭈리라.
예수님의 가르침 모두를 단 한 단어로 압축하면 ‘사랑’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때로 분노의 하나님이기도 함을 우리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랑 실천으로 평생을 살아온 선교사 서만수 목사, 성도들 개개인은 물론 어린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다. 그에게도 분노가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분명 예수님도 때로 분노를 하셨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드러낸 분노에는 모두 그것이 지닌 진실이 있어요. 목사나 장로는 함부로 분노를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또는 누구에게라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고 화를 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아! 대 목사께서 무조건 반성이다. 가르칠 교(敎)자의 옛글자 금문(金文)에는 매가 쥐어진 손의 형상이 삽입되어 있다. 사랑의 매가 필요했음을 나타낸다. 바른 영적 성장을 위해서 때로 호된 꾸지람이 어찌 필요하지 않으랴.
“함부로 옮겨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왔다 갔다 하는 성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낚시꾼도 진정한 프로는 한 자리에서 고기가 물기를 기다린다고 해요. 수적석천(水積石穿)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정성을 가지고 닦으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삶에서도 무리하면 인격적인 문제가 생기는데 하물며 영혼의 문제에서야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신념을 가진 분, 차려 입은 옷차림에서도 멋이 물씬 드러나는 분, 초대형 성전에는 그의 모든 것이 꿈틀 거린다. 토지 구입에서부터 설계도나 건축에 쓰인 모든 자제 하나하나가 그의 깊은 성찰로 비롯되었다. 건축 후에는 화분 하나 놓이는 위치까지 자식을 낳고 돌보는 것처럼 실행했다. 그러기에 실제 낳고 기른 자녀가 없는 것이 “성직생활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 한다”고 말할까?
외국인데 그리 큰 성전을 지을 필요가 있느냐고 의문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남의 나라 좋은 일 해줄 필요가 있느냐는 세속적 간섭도 있었다. 그는 “마음이 모이는 이 증거들을 보라. 모두의 마음이 모여 이룩한 위대한 성취를 보라”고 외쳤다. 그에게는 “내꺼 목사님”이라는 어린 성도의 표현이 늘 기억에 남아 있다. 중환자실의 그를 만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신자들이 많았다 한다. 그들의 한결같은 믿음, “목사님이 아시면 나만은 허락하실 것”이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이 존경스러워 보인다면 우리는 그 삶 속에 철저히 절망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가늠해야 한다. 절망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지혜, 그리고 희망을 새롭게 다진 순간들이 많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고격한 정신을 가졌음을 존경해야 한다. 세상과 사물에 대해 담대하고 지혜를 지녔으며 참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서만수 목사의 희망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 칭하면서 치부마저 들췄던 사도 바울” 닮기다.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가 그의 오늘이다. 오늘 우리는 성직자 서만수 목사를 함께 만났다. 오늘 우리는 또 하루를 쌓았다. 한편으론 또 하루 소멸이다. 그러므로 도전과 개척, 희망과 사랑으로 앞에 있는 좌표를 좇아가는 서만수 목사의 그 하얀 희망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참으로 크지 않은가.
▲ 고 서만수 목사께서는 예술가이자 예술 후원자셨다. 필자의 전시장에서 함께
그는 “늘 자기 컨트롤이 필요한 것이 사목자의 삶”이라고 간결하게 결론지었다. 스스로 한 가지 일에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는 단점으로 인해 목회자의 길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계속 “선한 고민만을 하고 싶다.”고 했다. 호사가들이 관심거리일 교회 세습 따윈 관심 밖이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익숙하고도 낯익다. 그의 삶은 실증한다. 편안한 것은 육체를 게으르게 하고 정신을 마비시킨다고.
해외의 생활이란 어느 부분 도전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타국에 살면서 그를 이웃하며 살 수 있음이 얼마나 행운인가. 그의 군더더기 없고 투명한 희망을 거울삼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복인가. 그러므로 우린 잠시 한 걸음 물러서서 그가 펼친 거울을 들여다보자.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들여다보자. 그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필자에게 두터운 은총이었다. 신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 오늘 다시 고인을 기리고 추모하며 아울러 고 정소라 전도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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