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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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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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시. 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을 붙이고 서 있던 여름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출처: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NOTE****************
해마다 칠월이 오면, 칠월을 맞는 무슨 의식을 치루듯이 가장 먼저 꺼내서 읽는 시다.
여름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칠월이면 어김없이 태풍이 북상하거나 장마 비가 쏟아진다. 그러다가도 도처에 뜨거운 태양 빛이 타오르듯 거리를 덮고, 세상의 온갖 열매가 가장 풍성한 결실을 내놓기 위해 한껏 빛을 끌어당긴다. 그 칠월에도 어떤 연인들은 이별을 겪는다. 그들에게 비와 태양이 넘치는 여름날이 천국일 리는 없다.
비가 내리는 칠월의 어느 날, 사랑을 잃었으므로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시인이 처마 밑에 서 있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문득 골을 파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한다. 어찌할 수 없는 이별 앞에 온갖 ‘체념’이 ‘흑백영화’처럼 흘러가고, 급기야 빗물이 쓸려 내려가듯이 추억이 되어버린 ‘잊은 그대’를 떠올린다. 처연한 여름날의 풍경이다. 그럼에도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앞에서, 시인은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한다. 그 처마 아래에 같이 서서 나와 당신이 잃어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다시, 칠월이다.
* 채인숙 /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고,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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