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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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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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시. 김 언
작곡하듯이 쓸 것
3차원의 문제도 4차원의 문제도 아닐 것
처음과 끝이 반드시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을 것
끝까지 듣게 할 것
시간이 아닐 것
어떻게 잡아챌 것인가. 그 종이의 다른 차원을.
그 노래를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음악을 대할 것.
소리 나는 대로 작곡하는 버릇을 버릴 것.
어느 좌표에도 찍히지 않는 점이 불가능할 것.
반드시 찍힌다는 신념을 의심하지 말 것.
차원의 문제는 신념의 문제에서 비롯될 것.
그 새벽의 전혀 다른 도시를 보여줄 것.
어느 공간에서도 외롭지 않을 문장일 것.
어느 시간대를 횡단하더라도 비명은 아닐 것.
고함도 아닐 것. 그것은 확실히 음악일 것.
작곡하듯이 되풀이할 것.
음표를 지울 것.
그리고 쓸 것.
그것의 일부를 묶어 모조리 실패할 것.
한 푼의 세금도 생각하지 말 것.
오로지 쓸 것.
한 명의 과학자를 움직일 것.
백 명의 민중을 포기할 것.
그 이상도 가능할 것.
다른 문장일 것.
(출처: 거인 –문예중앙 시선)
NOTE*************
봄이 시작될 무렵, 한국의 문예지에서 한꺼번에 3장의 시 청탁서를 받았다. 두 장은 나의 시를 문예지에 싣고 싶으니 4월까지 시를 보내달라는 청탁이었고, 한 장은 인도네시아 젊은 시인들의 시를 한국에 알리고 싶으니 시인들을 소개하고 시를 번역해 보내달라는 청탁이었다.
메일을 받고 얼마나 황홀했는지 청탁서를 프린트해서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운 좋게도 등단한 이후로 한 계절도 빠짐없이 한국 문예지에 시가 실리는 행운을 누려왔다. 그렇지만 이번 청탁서는 의미가 좀 달랐다. 내가 좋아하고 선망했던 문예지였고, 홀로 존경하던 시인의 이름으로 온 청탁서였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나 들떠서 그 동안 써 둔 몇 십 편의 시들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러는 와중에 김 언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시를 읽고 하루쯤 고민하다가 나는 시 파일을 휴지통에 몽땅 버렸다. 다 버리고 다시 써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내 시가 저 ‘시집’의 어느 한 구절쯤에는 닿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의심이 들었다. 사실 파일을 지우고서도 혹시 내다버린 시 중에 그래도 제대로 된 시 한 편쯤은 있지 않았을까 아까워하며 며칠을 끙끙거렸고, 새로 쓰기 시작한 시는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김 언 시인의 ‘시집’이라는 시는 결국 어떤 시가 진짜 ‘시’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어떻게 시를 써야 하는지를 시로 보여 준다. 거꾸로 시를 읽는 독자들도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를 분별하는 눈을 가지게 한다. 좀 더 정수를 찌르는 문장에 가깝게 닿는 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나는 이 시를 손 글씨로 베껴서 책상 앞에 붙여두었다. 전 세계에서 ‘시인’의 수가 가장 많다는 한국에서는, 오늘도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온갖 장사치들의 더러운 거래가 판을 치고 있다는 슬픈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지만.
*채인숙 /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고,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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