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20)|심각한가? 자기 없으면 세상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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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의 경영 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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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손인식의 經營 探聞 (20)
심각한가? 자기 없으면 세상도 없어
- 배재홍 전무의 자기 세계 경영, '화해' -
“음…… 가족은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하는 거 같아요.”
그가 느리게 그리고 나직이 곱씹은 말이다. 매우 지당한 이 말을 그는 이야기 도중 몇 번 신음처럼 토했다. 철학 운운하지 않았다. 이러쿵저러쿵 윤리를 끼우지 않았다. 그는 일 년이면 고작 5~7일 정도 가족과 만난다고 했다. 20 수년 동안 변함없이 그랬다고 했다. 아니 왜?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라고 그리 강조하는 사람이 뭣 땜에?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이 말, 핑계라고 을러댈 혹자 있을 거다. 그러나 세상의 보통 사람들에겐 안타깝게도 ‘하다 보니 그렇게 되고만 일’들 부지기수다. 어찌해볼 도리 없이 사정 따라 그렇게 되고 만 일들 산더미다. 그러나 별 도리 없다. 신의 시험일까? 타고난 운명일까? 등으로 얼버무릴 밖에. 답을 찾겠다고 업보니 윤회니 늘어놓아 봤댔자 난해한 말잔치로 끝이다. 묵묵히 견뎌야 하는 현실만 원래 그대로 남는다.
지금 그는 인도네시아, 그의 아내와 아들과 딸 세 가족은 인천에 산다. 무려 13년이나 연애를 하다 결혼한 부부, 이제 결혼 30주년을 앞둔 부부, 그런데 온전히 함께 생활한 기간이 고작 2년. 가장이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미얀마 중국을 맴돌다 인도네시에서 14년째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용기, 자기에게 화해 청하기
‘즐기기’가 대세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심각하면 지는 세상이다. 심각한 것을 심각하지 않게 다스려야 하는 세상, 하지만 아무 때나 아무 상황이나 즐기겠다고 들면 바보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괜찮다. 알고 된 바보는 용기요 지혜이니.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 세상은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것, 아닌 말로 자기 없으면 세상도 없잖은가. 그래서 새날을 위해 무의식으로 빠져드는 잠은 또 다른 위대한 의식세계 아니랴. 잠을 깨 새롭게 여는 아침은 또다시 누릴 새 세상 아니랴.
배재홍 전무(59. PT. PPF INDONESIA), 그는 자신을 바보라 규정한다. 세상이 뭐라 하던 자신을 그렇게 치부한다. 바보가 아니라고 항변하기에 세상은 그에게 너무 낯설고 이질적일까? 그가 화해를 청했다.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를 인정하기로 마음을 열었다. 자신과 가족에게 쓰는 아주 솔직하고 실로 애절한 편지 4통으로. 얼음이 녹으면 고기가 뛰놀고, 마음을 풀어 헤치면 자유를 얻나니(氷解魚躍 心解得自), 그의 용기와 실천에 존경을 표한다.
氷解魚躍 心解得自(빙해어약 심해득자)
얼음이 녹으면 고기가 뛰놀고, 마음을 풀어헤치면 자유를 얻나니
2018년 소만지절 인재 손인식 작
편지 Ⅰ - 배재홍이 배재홍에게
“야 너 참 이상하게 생겼다. 너 방글라데시에서 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얄궂은 시비였지? 술 취했으니 얌전히 집으로 가라는 자네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는데, 그 아가씨 적반하장이었어. 자네가 자리를 피하려고 차에 타자 오히려 사람 무시한다고 차문을 발로 찼지. 그 순간 자네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렀지.
자네는 그날 참 차분했었네. 최소한의 사과만 받고자 했어. 자네 회사 동료들과 그 아가씨 일행의 충돌로 파출소와 경찰서에 간 게 흠이었지. 경찰서 조서 과정에서 그 아가씨가 자네가 먼저 희롱을 했다고 말을 바꿀 때도 자넨 점잖게 그 아가씨를 타일렀어.
“아가씨 서양인에게 참 재밌게 생겼다고 할 수 있어요? 방글라데시 사람 생김이 뭐가 어째서 술 취한 아가씨의 놀림감이지요?”
노래로 말솜씨로 남을 즐겁게 하는 데 한 소질 하는 자네는 한편으로 능력을 갖춘 봉재 기술자이기도 하지. ‘말이 씨 된다.’더니 자네가 정말 방글라데시로 갈 줄 누가 알았겠나. 자넨 왜 세계물산 방글라데시 파견 기술자 모집에 기다렸다는 듯 지원했지. 방글라데시란 나라 이름도 모르던 자네가 왜 그리 끌렸을까? 하긴 당시 자네가 처한 상황 몇 가지가 급여를 많이 받을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리지 않았겠지.
▲ 배재홍 전무
1995년 1월 방글라데시 생활이 시작되었지. 당시 방글라데시에서 주재하는 한국인들끼리 족구를 자주 했었어. 자네 동남아풍 용모로 인해 자네가 속한 팀에게 진 팀에선 현지인 선수를 차출 했다고 소동이 일곤 했지. 고국에서도 자네 용모 시비는 마찬가지였어. 지하철에서 내릴 역을 몰라 허둥대는 동남아인 두 사람에게 내릴 곳을 안내해 주고 자리에 앉아 신문을 펴들었을 때야. 자네를 찬찬히 바라보던 옆자리 아주머니 점잖게 물었지? “신문의 한글 다 알아?” 그것도 반말로. 그때 자네 왈 “저 오리지널 국산입니다.” 그분 소스라치며 급히 자리를 떴지.”
가족을 두고 한국을 떠나는 복잡한 심경에 홀로 감행했던 설악산 야간 산행 기억하지? 길을 잃었고 산을 헤매다 날이 밝아서야 간신히 만난 등반객이 자네를 향해 던진 말 “Can I help you?” 중국 출장 때도 좀 별났지. 조선족 청년이 공항에 마중 나온다는 것에 자넨 좋아했어. 자네 이름을 들고 선 그에게 반갑게 다가가자 이름을 밝히기도 전 그가 하는 말, “No! I am waiting Korean."
자네의 용모로 인한 에피소드를 다 털어놓으려면 며칠 밤을 새워야 할까? 자네 임무가 외주 관리였을 때였어. 하도급을 줄 회사 현장 실사를 위해 그쪽 회사를 방문했을 때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네가 뭐라 말도 꺼내기 전 담당자 하는 말 “저희 회사는 외국인 안 씁니다.”였지. 바로 그 담당자와 약속하고 간 것인데도 자네 외모만 보고 동남아인 취급했어. 자네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 왔고 그 담당자는 후에 거듭 사과했지.
“요즘엔 인도네시아 애들도 김치 잘 먹어.”
어느 회사 구내식당에서 있었던 일이야. 자네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옆자리 그 회사 직원들이 수군댔어. 설마 알아들을 줄 몰랐지. 아니 한국인인줄 몰랐지. 나중에 자기 회사 상사를 만나러 온 손님인 줄 알게 된 그들이 얼마나 난처했을지…….
“보석이나 명품은 온전히 수공으로 생산된다는 거 아시죠? 그 많은 옷이 대부분 사람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제작됩니다. 소비자의 요구는 날로 변하고, 원단과 패턴 또한 끊임없이 변하지만, 변함없이 옷은 사람의 정을 담아 꿰맵니다. 봉재 일 40여 년을 넘기고도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제가 죽는 날까지 봉재를 손 놓지 않으려는 까닭입니다. 은퇴를 한다 해도 제가 할 수 있는 어떤 작은 역할을 찾을 것입니다. 재밌으니까요.”
자네는 평소 봉재의 장인임을 기꺼이 내세우지. 한 가지 옷이 많게는 백여 명의 손길을 거친다는 것이나, 정성을 쏟아야 하는 창의적인 작품임을 자넨 늘 강조하지. 봉재와 자네의 인연은 부친으로부터 비롯되었어. 원단 생산 공장을 운영한 부친께서 자네 9살 때 부도로 사업을 접으셨지. 그로 인해 몸져누우시더니 자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운명을 달리 하셨어. 자넨 택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진학을 포기하고 봉재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지.
▲ 현장 직원들에게 기술 지도 중인 배재홍 전무
▲ 배재홍 전무가 근무하는 PT. PPF INDONESIA 내부
자네가 봉재를 사랑하는 것은 의외야. 해외 근무자로서 연봉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고 일 때문에 일 년에 단 며칠 가족을 만나잖나? 게다가 현장의 수백 수천 노동자들 관리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동남아 4개국에서 가르치고 관리하면서 부딪친 어려운 일들 숫자로 셀 수나 있겠나? 문화가 다른 타국 더구나 텃새를 가진 그들의 나라 아닌가. 정말 고생이 많아.
근데 자네 혹 전생에 방글라데시 사람이었을까? 처음 방글라데시 갔을 때 약 3개월여에 그 어렵다는 방글라데시 말을 현장에서 일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구사했잖은가? 함께 간 7명은 모두 통역을 부르느라 바쁠 때 자넨 잘 소통했어. 하긴 이발소에서 조금만 자르라는 말을 조금만 남기라는 말로 표현해 까까머리가 된 적도 있었지만.
“제가 한국말을 좀 잘합니다.
”자네가 요즘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툭 던지는 말이야. 용모 땜에 생기는 설왕설래를 대번에 잠재우는 방법이지. 60 된 나이에 용모로 입씨름하기 싫은 그 심정 알아. 그래서 머리를 길러 뒤로 묶겠다는 발상 찬성이야. 자네가 늘 하는 걱정 하나 있지. 순수 한국인인 자네가 조금 다른 용모 때문에 수난이니 다문화 가정 2세들은 어떨까 싶어서. 걱정 마시게. 그들도 나름 지혜롭게 잘 대처할 걸세. 닮은 용모를 무기로 생산 현장에서 공감대를 잘 이뤄내는 자네처럼. 자네의 이 고백으로 인해 양쪽을 아우를 다문화를 가졌다고 오히려 부러워하는 정서도 생기지 않겠나?
"엄마 제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솔직하게 털어나 보세요."
자넨 이 농담으로 그동안 어머니를 몇 번이나 괴롭혔지? 자네 올 휴가 기간이 코앞이군. 이번에 어머니 찾아 뵐 때는 정말 농담하지 마시게. 8년이나 요양병원 신세를 지시는 노모 아니신가? 위로 형님과 누나, 아래 동생에게도 그런 농담 이젠 그만해. 자네 어머니께서 어서 기운을 차리셔서 그런 실없는 농담 내갈기는 자네를 부지깽이로 후려치셨으면 좋겠네.
편지 Ⅱ - 배재홍의 아들에게
아들아! 내 아들아! 고맙다. 너는 오늘도 아빠를 진지하게, 성실하고 바르게 살게 한다. 너는 아빠와 엄마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바탕이고 또 부부 사이를 단단하게 붙드는 힘이다.
아들! 미안하다. 아빠는 이제껏 아들 자랑을 해 본 적이 없구나. 지체장애 아들 이야기를 일부러 꺼낼 필요 뭐 있겠나 싶은 생각만 하고 살았다. 남들이 아들 자랑을 할 때면 부러워하면서 죄지은 것도 아닌데 너를 숨기다시피 했다. 아들아 너는 천사다. 네 마음 안에는 욕심도 없고 시기도 없잖니. 세상을 탓하고 비교하는 마음도 없지. 네 자신도 통제가 잘 안 되는 신체와 정신으로 인해 아빠 엄마를 안타깝게 하지만, 반항할 줄도 모르고 살지. 공부로 부모를 기쁘게 하지는 않았지만, 28세가 된 지금도 네 엄마 곁을 잘 지키는 부부의 버팀목이다.
아들아! 기억하니? 아빠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날을. 아빠나 엄마는 네가 어렸을 적 발육이 좀 느리거니 했다. 그래서 자폐증 판정이 굳어진 그날 아빠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암담했다. 너의 자폐아 생을 곁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어. 아빠는 그날 너를 태우고 극단을 생각하며 한강으로 차를 몰았지. 아~ 그러나 차마 어찌 할 수 없었다. 강변에 차를 세운 아빠는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너는 그때 아빠의 눈물을 닦아주더구나. 세상에 이런 위로가 있나 싶었다. 아빠는 그날 다짐했다. 죽는 날까지 널 지키겠다고. 아주 느리지만 너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만날 때는 물론 전화 목소리를 들을 때 마다 아빠는 그걸 느낀다. “아들아 잠시나마 헛생각을 했던 이 못난 아빠를 용서해라.”
아들아 잠시 혼돈으로 지하철 반대편 종착역으로 간 것, 정상인도 살면서 있을 수 있는 해프닝이다. 비싼 핸드폰만 사주면 뺐기고 들어온다고 엄마의 한숨이 크다만, 아빠 생각엔 자꾸만 좋다고 만지는 친구에게 심성 좋은 네가 가지라고 줬지 싶은 거다. 비싸게 산 유명 브랜드 옷 입고 나간 첫날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속옷 차림으로 떨며 집으로 돌아온 것도 네 잘못이 아니다. 비행기 타고 겁내는 너 땜에 아빠가 일하는 나라에 한 번도 못 왔지만, 그게 뭔 대수냐.
아들아! 너는 태어난 인천에 살아야 했고, 아빠는 일을 찾아 집을 떠나야 했다. 26년여 아빠가 어디에 있던 너는 늘 아빠의 중심이었다. 네 엄마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게 했다. 아빠는 그 긴 세월 혼자 생활했어도 허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술로 순간을 회피하거나 외도 따위도 멀리 피했다. 다 너의 기둥 역할 때문이다. 아들아 부탁이 있다. 네 엄마의 크나 큰 노력과 정성, 한순간도 잊지 말아다오. 너를 정상인으로 살게 하려고 네 엄마는 정말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한다. 물론 엄마는 앞으로도 그 노력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들아! 아빠가 맥주 한 잔도 버거운 체질인 거 알지? 근데 오늘은 너와 술 한 잔 나누고 싶다. 네가 당당히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미래가 어디에 있을지 함께 찾으며~.
편지 Ⅲ - 배재홍의 딸에게
딸! 올해 처음으로 어버이날 축하 메시지를 너로부터 받았다. 24살 딸이 철들었다 싶어 아빠는 철모르고 눈물을 흘렸어.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딸의 전화가 생각나더구나. 못 받은 딸의 전화를 확인하고는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네게 전화를 걸었지. “잘 못 눌러진 거야~” 네 대답이었어. 네가 그렇게 말해도 아빤 기분 좋더구나. 딸이 한순간 아빠 생각해줬구나 하는 느낌에. 아빤 그때 딸이 고마웠다.
미안하다 딸. 아빠는 항상 네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네 사춘기도 알지 못했다. 외국인 닮았다고 아빠를 싫어하는 네 옆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있는 것이 좋은 아빠 역할이라 생각했다. 장애인 오빠를 학교에 태워다 줄 때 너는 아빠 싫다고 차에 타지 않았지. 너 어렸을 때 아빠가 모처럼 집에 가면 너는 엄마에게 칭얼댔어. 아빠가 왜 엄마하고 자느냐고. 아빠는 왜 자기 집에 안 가느냐고. 울어도 심하게 울었지.
이게 다 아빠 때문 아니겠니. 네가 태어날 때 엄마 혼자 산고를 겪게 하고 너의 성장을 엄마 혼자 책임지게 했잖니. 딸이 아빠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게 한 아빠는 벌 받아 싸다. 관광학이 전공인 너는 이제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지. 딸, 아빠는 멀리해도 괜찮다. 그러나 부디 오빠는 가까이해다오. 친구들에게 자랑할 오빠는 아닐지라도 오빠를 네 맘속에 늘 간직해다오. 어렵고 힘들어도 더불어 즐겨다오.
아빠가 너를 힘들게 했는데, 오빠까지 네 짐이 되게 하다니. 세상에 이런 경우 또 있겠나 싶다. 딸 정말 미안하다. 사랑하는 딸! 네게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엄마가 계시다. 엄마를 믿고 엄마를 위해 세상을 거침없이 날렴. 아빠는 오직 딸을 자랑스러워하리니.
편지 Ⅳ - 배재홍의 아내에게
여보! 그거 알지요? 내 꿈이 가수였던 거. 중학교 때부터 무대가 있으면 진행은 내차지었다는 것도. 숙녀복 제조회사에 근무 시 자체 패션쇼 때마다 나는 늘 응원 단장과 진행자였어요. 지금도 작은 골프모임 뒤풀이 진행까지 내 몫이니 아마 당신이 옆에 있으면 이제 그만 하라고 말리지 싶소.
▲ 친선 골프 모임 후 시상식을 진행하는 배 전무
나이 18세에 내 최대의 보물 당신을 발견한 것도 고향 경북 달성(현 대구시 달성)의 무대 위에서였지요. 그때도 지금도 내 이상형인 당신은 첫눈에 내 정신을 아찔하게 했지요. 마침 연결 고리도 있어 그로부터 당신과 나는 펜팔을 시작했어요. 우리는 늘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습니다. 당신은 인천에서 나는 대구에서 출발했지요. 달려가고 달려와 만나던 지점 대전이 왜 그리 멀고도 가까웠던지.
여보, 우리는 늘 이야기 하지요. 연애를 너무 오래 해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살아도 괜찮다고.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모범부부라고. 우린 만나도 대화가 적지요. 말해도 알고, 안 해도 안다고. 서로의 가슴 한쪽이 서늘하고 씁쓸하다는 것 서로 모를 리 없으면서. 여보!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여보! 사랑해!”
이 흔한 말을 나는 말로 못 하고 글로 적네요. 옆에 있으면 벌써 꼬집혔겠지요? 그러고 보니 나는 당신에게 ‘여보’라고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네요. 젊을 때는 어색해서 못했고 떨어져 산 뒤론 부를 틈이 없었지요. ‘사랑한다’라는 말도 그래요. 그냥 그 말 언제 했나 아득해요. 그래도 당신은 한 번도 나를 타박하지 않지요. 당신에게 진 빚 내 어찌 다 갚을지.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당신이 흔히 내게 하는 말이지요. 만났을 때도 전화를 할 때도 항상 할 말을 줄이는 당신, 남편이 곁에 없는 상황에서 자폐아 아들을 키우는 그 고난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것 압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당신에게 더 묻지 못합니다. 당신 언젠가 우리 가족 사진을 내 가방 속에 가만히 넣어뒀더군요. 딱 한 번 찍은 그 가족사진 말입니다. 일터로 돌아와 가방을 풀며 그 사진을 발견한 그 날 밤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지.
여보! 당신은 여전히 네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답답합니다. 까맣게 탔을 당신의 그 가슴속을 어떻게 성형해야 할지 몰라 숨이 가쁩니다. 여보, 나는 당신과 우리 두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몸과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여보, 몸과 마음이 차가워지면 병이 생긴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삭이지 못하면 낮은 온도에 얼음이 얼 듯 몸이 굳어진다고 합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이 늘 따뜻하기를…….
사랑하는 여보 홧팅!
자기 세상 경영,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고백을 세상에 들춰내는 필자 지탄받아 마땅하다. 몇 번이나 설득 끝에 공개하는 것이니 열 번 비난 받아도 할 말 없다. 비난은 두렵지 않다. 그의 숭고한 자기와의 화해에 관한 사람들의 이해도 각자의 몫이니 그 또한 필자가 걱정할 일 아니다. 필자에게 소중한 것은 이 고백을 정리하면서 느끼고 배운 점이다. 그의 용기에 감탄하고 그의 솔직함에 존경심 절로 솟구쳤다. 다만 그에게 미안한 게 있다. 정작 그는 차분하게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하는 필자가 내내 담담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가슴 먹먹했다. 몇 번이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자신을 하늘이나 부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단순 피조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편견에 치우치던 긍정으로 조화하던 각자도생이다. 바로 거기 화해가 불필요한 사람 있을까? 세상이나 자신, 그 누구와도 화해할 일 없는 삶 있을까?
자기 세상 자기 경영, 오직 각자에게 달렸다. 사람과 사물이란 겉을 보고 판단할 것이 절대 아님을 오늘 다시 단단히 새긴다. 배재홍 전무의 용기와 화해의 세상이 서광으로 넘치기를 간절히 빌며 정리를 마친다.
※ 이 프로젝트는 <자카르타 경제신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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