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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19)|22살 아가씨, 인도네시아 도전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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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의 경영 탐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196회 작성일 2018-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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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손인식의 경영 탐문 19
 
22살 아가씨, 인도네시아 도전 30년
 
-김민규 사장, 시간을 선도하는 경영법-
 
 
때는 1989년 8월 어느 날,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핫타 공항에 한 한국인 아가씨가 등장했다. 소녀일까? 숙녀일까? 판단이 어려운 용모. 아담한 키에 군살 없는 체구,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 그리고 운동화에 방글방글 미소로 보면 딱 18세. 단발머리 동그란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에 귀엽게 도드라진 이마도 17살 소녀티 물씬. 그런데 좌우를 훑는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작은 가방 하나 둘러매고 크기 다른 캐리어 두 개 양손에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모습 딱 ‘나 야무짐’ 넉 자다. ‘나 똑순’ 석 자 단호하다. 22살 숙녀 인도네시아 도전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국 본사 파견 부하 직원을 공항에 마중 온 인도네시아 법인장 모 씨, 그는 이 앳된 숙녀가 출구를 나설 때 언 듯 모습을 훑었다. 그러나 설마 하고 곧 눈을 돌렸다. 자신이 들고 있는 이름을 향해 생글생글 다가오는 숙녀를 보면서도 상대의 착각이려니 했다. 숙녀의 정체를 알고 난 뒤도 믿지 않았다. 마중을 마치자마자 그는 서울 본사로 전화부터 돌렸다. 숙녀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회사 몇 개월 운영하고 문 닫을 겁니까? 맡아야 할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세요? 베테랑이 와도 될지 말진데 다 자라지도 않은 애를 파견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2주 정도 지났을 때쯤 숙녀를 보는 법인장의 눈길이 조금 달라졌다. 2달 정도 지나자 무시가 관심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뭐든 그의 편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변화가 꼬리를 물었다. 시대 상황과 맞물린 불안정에 대처해야 했다. 직장이 바뀌었다. 법인 경영자가 되기도 했다. 능력을 다시 보여주고 신뢰를 다시 얻어야 할 상황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인도네시아에 처음 진출하는 기업 인허가 컨설팅, 개인 체류 관련 비자 업무, 한국 중소기업들의 인니 진출을 돕는 민간 네트워크 업무, 사업장과 주택 등 부동산 구매 및 임대 업무, 인도네시아 진출 시 사업에 필요한 시장조사 및 마케팅을 돕는 리서치 업무, 업종에 따라 적절한 인력 채용에서 노무 관련 업무까지 원스톱 서비스 <컨설팅 법인>을 운영한다.
 
▲ Woori Consulting & Tour 사원들과 김민규 사장
 
컨설팅 고객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창업한 <투어 법인>을 경영하며, 한국의 뛰어난 기술력과 품질을 가진 상품을 유통하는 <종합무역법인>을 아우른다. 인도네시아 최고 뷰티 브랜드를 꿈꾸며 시작한 <기능성 화장품 런칭>을 완료했다. 현재 그녀 휘하에 함께 일하는 한국인 직원 10명, 인도네시아 현지인 직원 92명.
 
위는 모두 30여 년 전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 앳된 아가씨 이야기다. ‘나 야무짐’을 풍기던 그 소녀 같은 숙녀의 간추린 인도네시아 도전사다. Woori Consulting & Tour 김민규(52) 사장의 바로 지금이다.
 
▲ Woori Consulting & Tour 김민규 사장
 
이웃돕기가 창업으로
 
“근무하던 곳이 완구회사였어요. 제가 인도네시아 근무 지원 면접 순위 열다섯 번째였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제가 뽑혔어요. 어린 나이 짧은 경력, 특기도 별로 없었어요. “어디 갖다 놔도 살아남겠다.”라는 게 면접의 결론이자 파견 결정 이유였데요. 머나먼 낯선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무시당해도 할 말 별로 없었죠. 그게 제게는 도전의 시작이었고 의미였습니다.”
 
예상했던 언어불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큰 벽이었다. 변변한 인도네시아어 교재도 없을 때였다. 오직 말에 매달렸다. 단어 하나 붙들면 열 개 스무 개의 문장을 만들어 외웠다. 밤이 너무 짧았다. 이국 문화 적응도 넘기 쉬운 산이 아니었다. 눈물 흘린 날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새로움과 버거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래서 김민규 사장은 지금도 ‘최선’이란 말을 특별한 말로 취급하지 않는다. 최선이 그냥 일상이다.
 
“인도네시아에 온 것이 어차피 제겐 도전이었는걸요. 그게 도전의 시작이었고 그 도전은 지금도 그침 없습니다. 신기한 것은 언제나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생을 밝히는 선물도 이어졌다. 95년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선비 품성 물씬한 남편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젠 어느 사이 대학생이 된 장녀가 친구 같이 버티고 있다. 배려 많고 의협심 강한 대학생 큰아들은 든든한 울타리다. 인정 많고 생각 깊은 고3 막내아들 때문에 에너지 팍팍 솟는다.
 
▲ ▼ 가족과 함께 유렵 여행 중
 
 
“컨설팅 창업요? 우리 옛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하잖아요? 모르고 덤빈 겁니다. 오직 13년여 인도네시아 경험이 전부였어요. 그러나 돌아보면 가장 제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일이었어요. IMF 때 겪은 현실적인 위기의식은 남편만 믿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제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었죠. 아이를 키우느라 일을 하지 않을 때 현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것도 도움이 되었어요. 이웃들의 관공서 업무나 주택 임대, 계약 등 소소한 일들을 끊임없이 도왔는데, 그게 이렇게 본업으로 이어진 겁니다.”
 
그는 이웃을 돕는 일이 경험을 쌓는 일이요 실력을 키우는 일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밤을 지새며 익힌 언어가 그렇게 큰 무기일 줄 미처 몰랐다. 그가 관심을 가지면 꼬인 일이 잘 풀렸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이웃들의 권유가 잇달았다.
 
“마침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남편이 취업하게 됐어요. 활용할 사무실이 생긴 거죠. 임대료 부담이 없진 않았습니다. 주변의 우려도 있었지요. 3개월만 실험 삼아 해보기로 하고 나선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객 파일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연이은 한국 기업들의 인도네시아 진출, 증가하는 한국인 숫자는 그에게 컨설팅을 비전 큰 사업으로 인식하게 했다. 시급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일이니 즐거웠다. 기업이건 개인이건 또 다른 시작을 여는 일이니 신이 났다. 그는 아직도 일이 곧 돈벌이라는 개념이 약하다. 뭔가를 내 일처럼 일구는 것이 그저 흥미롭다. 좋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생각으로 늘 즐겁다.
 
▲ ▼▼ Woori Consulting 활동
 
 
 
믿음의 신
 
“삶의 목적이 뚜렷하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게는 참 막연한 꿈이 있었어요. 현실에 찌들지 않고 사는 거였지요. 연속극을 보면서도 상류층의 여유가 늘 눈에 들었어요. 직장에 다닐 때 고급 외제 차로 출근하는 2세도 그냥 보기 좋았어요. 부럽다거나 아니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요. 어차피 제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죠. 그와 다른 제 세계가 분명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걸 이루겠다고 맘먹었죠.
 
인도네시아에 살다 보니 그 꿈이 현실이란 느낌 물씬합니다. 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너무 좋아요. 운전은 기사, 일상 가정사야 도우미가 있으니까요. 밥상이 차려지고 깨끗이 손질된 옷이 제자리에 놓이며, 집을 나설 때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것을 보면 참 고마운 생각이 들어요. 한때 오직 남편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만 사는 현모양처 타령을 했었는데^~^“
 
그는 아무리 바빠도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가족과 맞춰진 시간도 철저히 지킨다. 정원을 돌보고 정원의 그네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간을 웬만해선 다른 시간과 바꾸지 않는다.
 
▲ ▼ 김민규 사장의 정원. 그는 이곳에 있는 시간만큼은 항상 세상을 잊는다고 한다.
 
 
그는 가히 믿음의 신이다. 아직도 한 번도 성경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말씀이 어떤 내용이든지 오직 아멘이라 했다.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분명했다. 그래서 세상도 믿고 고객도 오직 믿음으로 대하리니. 그는 그 믿음으로 참 행복하겠거니 싶다. 그러나 사람의 일인지라 일을 하다 실망할 때가 더러 생긴다고 했다. 일을 그르친 것이 세상이지 싶은데, 그 뒤에 꼭 사람이 있어 아쉽다고 했다. 사람의 일은 오로지 사람이 몫임을 깨달은 뒤부터 오히려 신앙심이 더욱 커졌다 했다.
 
“컨설팅 업무에 한 참 재미가 붙었을 땝니다. 기도했죠. ‘제 작은 힘을 많은 이들 돕는 데 기꺼이 쓰겠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이들을 제게 많이 보내주소서’ 하고 말입니다. 근데 진짜 도와줘야 할 일만 연속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또 기도했죠.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너무 힘들어요’ 하고 말이죠. 그랬더니 제 뇌리를 꽝~ 때리는 답 뭔 줄 아세요? ‘네가 원한 거잖아?’^~^”
 
믿음(信)이 무엇인가? 사전은 진실(眞)이라 밝힌다. 밝음(明)이라 설명한다. 마음에 새김(印)이라 전한다. 맡김(任)이라 가르친다. 신봉이며 신임이고, 성실함이자 확실함이라 기록했다. 의롭게 잘 활용하는 것이라 새겼다. 사랑, 사랑도 믿음에서 비롯된다. 믿음이 없는 사랑이면 아무리 고귀하다고 외친들 대체 무슨 소용일 것인가?
   
▲ 無信不立(무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바로설 수 없다.
信者 眞 明 印 任也 以故 無信不立.
믿음은 참됨, 밝음, 마음에 새김, 맡김이라.
이런 고로 믿음이 없으면 바로설 수 없나니.
이천 십 또 팔 무술년 여름 인재 손인식 작
 
사람을 알아가는 것, 때로 고난의 여정
 
김민규 사장의 10년 후 꿈은 비즈니스 센터 건립이다. 출퇴근 때 바라보이는 빌딩과 눈인사를 할 때마다 꿈을 펼칠 그 날을 향해 다가가는 또 하루가 즐겁다. 앞으로도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큰 교류 대상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 작은 규모의 자영업자들에겐 때에 알맞은 그리고 정직한 컨설팅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 효율을 갖춘 비즈니스 센터 설립이 그의 또 다른 신앙인 이유다.
 
“실패 경험이요? 왜 없을까요? 그런데 꼭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력을 더 하라는 가르침이었으니까요. 컨설팅은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신뢰하지 않으면 안 돼요. 신의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병일 때도 있습니다. 흔한 말로 돈 떼이고 관계 나빠지는 거죠. 너무 아껴서 해준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됐다고 할 때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그도 욕심이었나 싶어 사람에 관한 욕심을 점점 줄이고 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복잡한 일로 번질 때가 있다고 했다. 담당한 직원이 곤경을 겪을 때면 마음이 매우 아프다고 했다. 항상 신중하고 엄중한 일 처리를 추구하지만, 보람과 부정이 극명하게 엇갈릴 때가 더러 있다고 했다. 분명 사람이 희망이지만, 때로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고난의 여정이구나 생각도 한다고 했다.
 
▲ ▼ 사원의 결혼식. 그는 현지 직원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할 때면 항상 한복을 갖춰 입는다.
 
 
“재밌는 일요? 많죠. 예전엔 인도네시아인들이 유난히 저를 어리게 봤어요. 저보다 훨씬 어린 동료나 직원들이 제 엉덩이를 토닥이기도 했어요. 그런 사람들일수록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저를 좀 알게 된 다음부터는 슬슬 피하죠. 이름 땜에 에피소드도 있어요. 김민규, 제 이름이 남자 같잖아요. 고객 상담에 들어가면 대뜸 남자 사장하고 약속했다고 모시고 오라고 합니다. 통화해서 여자인 줄 알고 오시고도 제가 자리에 앉으면 자꾸 문 쪽을 봐요. 나이 지긋한 풍채 좋은 여사장이 들어오겠거니 하는 거죠.”
 
그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전 직원들과 함께 <밥퍼해피센터>를 찾는다. 2011년부터 시작한 일이다. 650명 한 끼 식비와 일손을 지원한다. “감사할 일이죠. 직원들 연수로는 그만입니다. 긍정과 나눔을 생생히 배우거든요.” 사랑의 전화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한국국제학교 학생은 1년에 1~2명을 선정 학비를 지원한다. 사정 때문에 신용 불량자, 불법 체류자 한국인을 도와 정상적인 가장으로 떳떳한 주재원으로 되돌려 놓기도 했다.
 
▲ 밥퍼해피센터에서 봉사하는 날
 
“한국 대학생과 청년들 인턴 과정을 돕는 게 재밌어요. 인도네시아 한인 기업이나 현지 기업에 취직할 땐 보람 커요. 또 한국인은 물론이고 현지 직원들이 우리 사업장을 통해 도약할 때면 마음 뿌듯하죠.”
 
믿음에 틈이 생기지 않기를 늘 기도
 
그는 2014년 우수 직원 30명을 선발해 함께 한국으로 날아갔다. 연수랄까 관광이랄까 다른 한편으론 복지라고 할 수 있겠다. 8박 9일 한국의 곳곳을 돌았다. 다양한 체험을 했다. 대학도 방문하고, 기업도 둘러봤다. 산과 바다 놀이터도 휘돌았다.
 
▲ 사원 30명과 함께 한 한국여행
 
“한국을 이해하는 데는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녀오더니 눈빛과 표정이 많이 달라지더라고요. 저는 저대로 감회가 깊었어요. 제가 항공료가 없어 친인척 애경사에 못간 적이 몇 번 있었거든요.”
 
그는 “칭찬도 가까이 있지만, 비판은 더 가까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늘 세상을 살며 요령 피우지 않겠다.”라고 다짐한다. 자신을 향한 믿음이 틈이 생기지 않기를 늘 기도한다. 소득에 관한 그의 생각은 참 각별하다. “일정 기간 맡은 느낌이 든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하여 알맞게 멋지게 쓰기 위해 궁리를 많이 한다고 했다.
 
“방학이면 아이들을 고향 집에 자주 보냈어요. 그 덕에 지금 한국에서 공부 중인 딸과 아들이 틈만 나면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를 거리낌 없이 찾아갑니다. 저는 노인과 어린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참 좋아해요. 어려서부터 눈에 익은 풍경이죠. 그래서 제가 언젠가 은퇴를 하면 그때부터 오갈 데 없는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항상 아이들이 그리운 노인들도 함께 모시고요. 양로원과 보육원 시설을 함께 갖추면 서로에게 좋은 보완이 될 거 같죠? 그 꿈도 제 신앙입니다.”
 
與時俱進(여시구진)이란 말 좋아하는 이들 참 많다. 시대의 흐름 따라 함께 전진하고자 함이리. 시간과 자신을 능동적으로 선도하고자 함이리. 숨차게 훑은 김민규 사장의 인도네시아 30년, 그 선도적 시간 활용을 통해 참 많이 배웠다. 그의 시간은 왜 그렇게 알차고 넉넉할까? 어찌 그리 아름다울까? 글을 정리하는 내내 참 뿌듯하고 흥겨웠다. 계속해서 펼쳐질 그의 여시구진에 신의 가호가 충만할 것을 믿는다.   
 
詩俱進(여시구진)/ 시대의 흐름 따라 함께 전진하다. 2018년 인재 손인식 작
 
※ 이 프로젝트는 <자카르타 경제신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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