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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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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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 이 원
7cm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플라스틱 칼처럼
한여름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출판기념회처럼 고독하다
영혼 없는 영혼처럼
코스프레처럼 고독하다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 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복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우리는 고독하다
손바닥만 한 개에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
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을 가진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하나의 창에서
인간의 말을 모르면서도
악을 쓰며 우는 신생아처럼
침을 흘리며 엄마를 찾는 노인처럼
물을 마시고
다리를 접고 펼치고
반은 침묵
반은 허공
체조선수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제 속을 불 지르고 만 새벽 두 시 도로처럼 고독하다
길들은 끊어지고 싶다
열두 살에 죽은 아이의 수목장 나무 앞에 놓인 딸기우유처럼 고독하다
막힌 문을 향해 뛰어가는 비상구 속 초록 인간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들과 함께
높은 곳의 바람과 함께
다른 말을 하나로 알아듣는 이상한 경계와 함께
우리는 고독하다
흰 변기가 점령한 지구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변기의 무릎을 갖게 된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펭귄은 지구에서 고독하다
토끼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로지 긴 귀가 머리 위로 솟아 있다
주파수 93.1MHz가 잡히는 지구는 고독하다
출처: 사랑은 탄생하리 (문학과 지성)
NOTE****************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먼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첫눈 소식을 듣는다. 당연한 줄 알고 봄을 맞고, 여름을 들이고,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났던 한국에서의 일상이 전생의 일이기라도 했던 냥 까마득하다. 사계절 중에서도 겨울은 늘 춥고 외롭고 고독한 계절이었다는 기억만 뚜렷하다.
날마다 한차례씩 비가 쏟아지는 우기의 적도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이름대로 고독하다. 어디를 가도 마음을 시원하게 드러내 보여 줄 친구도 없고, 살던 곳을 떠나왔다는 사실 앞에 늘 무기력하게 외롭다.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도 벽과 나란히 잠이 들면서 우리는 고독하다.
시에서 위로를 얻는다. 저토록 많은 이유들로 누구나 지구에서 고독하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다행이다. 어쩔 수 없이 모두가 고독하지만,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이 구원처럼 지구에 있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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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가을의전설님의 댓글
가을의전설 작성일
누구나 어디에서나 고독하군요...
지리한 차 속에서 나는 고독하다..